크리스마스 다크니스

메리 크리스마스.

by jungs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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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헤맨 과정이 다 네 거야. 너만 가진 거야."<나를 움직인 문장들>, 오하림





그래. 나만 가진, 내 이야기를 해야겠다. 이 이야기는 단 하나의 엄중한 질문으로 운을 떼야 한다. 성탄절을 앞둔 나의 영혼은 어떤 상태일까.


스물..두 해 평생을 살며 이렇게 불안하고, 두렵고, 헛헛하고, 마음 저리는 성탄절은 없었다. 근래.. 이십대(?) 이후 매해 그 공허함의 강도는 새롭게 경신되고 있지만. 어쨌든 바로 오늘, 올해 나의 크리스마스 다크니스를 증명할 수 있는 무척 부끄러운 사건이 있었다.


여느 때처럼 나는 심야 장보기 마트 임장에 나섰고, 한 손에는 느려터진 스마트폰이 들려 있었다. 몇 개의 금융 앱을 순례하고, 인스타를 하고, 뭐 달콤한 당근이 없나 중고 거래 앱의 피드를 보고 있었다. 아, 당근의 재미에 빠지다못해 근자에는 동네 모임에까지 마수가 뻗치던 참이었다. 몇 해 사이 기타 레슨 동아리와 독서 모임에 드문드문 나가 보았었다. 하지만 이번처럼 주제가 없는 no title 모임에까지 손을 대지는 않았는데.


나는 어린 시절, 동네 친구들과 뛰돌던 시간들을 누구보다 사랑했다. 친구들과 목적 없이 만나 순수하게 놀던 젊은 날들을 그리워했다. 그렇다고 이렇게, 다 크다 못해 이제 육체적 정신적 성장의 반환점을 지나 모든것이 쪼그라들기 시작하고, 고속 노화를 맞을 변곡점만 기다릴 만한 나이가 되어서도 그렇게 놀 수 있으리란 상상은 미처 하지 못했다. 그럴 수 있다 해도 모르는 동네 사람들을 만나 시덥지 않은 시간을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럴 마음의 여유도 없었고 말이다. 차라리 원래 내 성격대로 모든 노화와 외로움을 정면으로 장렬하게 맞으며 나홀로 집에와, 브릿지존스의 일기와, 각종 성탄절 특선 영화들을 정주행하고 말지. 그게 나다운 선택들이지.


그런 기개와 생기도 늙고 있었던 건지, 이즈음 자신의 마음이 약해지는 것을 느끼기는 했다. 지방에 다녀오던 어떤 날은 혼자 집으로 들어가는 일을 견디지 못해 친한 동생들 서너 명에게 동시에 카톡을 보내기도 했다. 어떤 전조였다. 아니 망조였나.

그렇게 크리스마스 이브의 이브날, 마침내 노타이틀 모임에 가입하기 버튼을 누르고 만다. 방장만 요란하게 나를 반길 뿐, 또 하나의 아저씨쯤 들어오든 말든 수십 명 이상의 회원이 있는 각 모임방들에는 대체로 아무런 파문도 없는 듯 했다.

그러다가 우연히도, 정말 우연히도, 아직 회원이 몇 사람 없는 신생 모임에까지 들어가보게 된다. 안녕하세요. 성탄과 연말의 혹독한 외로움에 지레 겁먹어 가입했습니다. 기안/84/남. 그렇게 야채가게에서 양파나 대파를 집어들듯 말미잘처럼 하늘거리며 가입인사 몇개를 날리고 이브의 이브, 집을 나섰다.

밖에 나와 한창 올리브올드 화장품점에서 놀고 있을 때, 당근! 하나의 말풍선이 올라온다. 내일 시간 되시는 분? … 내일? 내일이라면 성탄절 이브잖아. 신세계 백화점의 전광판만 찬란할 뿐, 역시 다들 혼자구나. 무심코 알림창을 닫고 지나치려는데. 언듯 보니 아까 가입한 그 신생 모임의 모임장 여자분 같다. 전체 회원이라봐야, 예닐곱 명 정도밖에 없던. 모임장 외에는 다 남자였던. 어딘지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는 그 노타이틀 모임.

이 여자는 자기 외에 다 남자인 곳에서 지금, 이토록 영롱하게 크리스마스 이브에 번개를 친 거야? 그렇게 여기고 휴대폰을 까맣게 닫았다. 화장품 가게에서 이것저것 바르고 뿌리고 구경하고 있는데, 왜인지 그 분의 외침이 뇌리에서 잘 지워지지 않는다. 내일 시간 되시는 분. 솔로에게가장고통스럽고두려운날인크리스마스이브인 내일 시간 되시는 부운부운부운..

다시 휴대폰을 켜고 그 채팅창을 슬쩍 본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놀랍게도 아무도 답하고 있지 않다. 극내향형 남자들만 있나. 모임장의 당찬 외침에 기가 눌렸나. 아니 남자들이 이렇게 기사도 정신이 없어서야. 자기들이 가입하고 여자 모임장이 용기내 외친 간절한 물음을 외면해? 이런데 기웃거리는 것도 볼품없는데(나), 답을 안 하는 것은 더 볼품없다고 생각하고 있을 찰나, 모임장이 회원들 닉네임 하나하나 태그를 걸며 답이 없으면 강퇴하겠다는 으름장을 놓는다. 와, 이 분은 또 왜 이러지. 자존심이 상했나. 좀 그런(?) 분인가. 어떻게 전개가 이렇지. 많은 생각이 스쳤다.

나는 강퇴당하고 싶지 않았다. 이즈음 나의 생의 맥락은 거절감에 무척 취약한 상태였다. 그렇게 기사도정신과외로움과고독과아픔과상처와결핍과협박의 복합적인 압력에 튕겨져 나가는 스프링처럼 답을 한다. 몇 시에요?


성탄절 시즌 특유의 우울감과 체력의 한계로 여기서 맺어야겠다.

(ㅡ.ㅡ^ * 죄송합니다. 읽어주시는 독자 여러분. ㅠ 추후 이어서 계속 써볼까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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