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 가르쳐준 새로운 시간의 흐름
영화 <퍼펙트 데이즈>의 주인공 히라야마는 도쿄의 공중 화장실 청소부로 일해. 그는 잠깐의 휴식 시간에도 하늘을 올려다보곤 하지. 하지만 그건 잠깐의 휴식 시간에 어쩌다 이루어지는 행위는 아니었어. 그는 매일 아침 집을 나서며 하늘을 올려다보거든.
특히 아침에 집을 나오면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건, 내게 '하루가 다시 시작된다'는 자기만의 작은 의식이자 '하루의 문을 여는 행위' 같이 느껴졌어. 사실 히라야마는 거창한 욕망을 추구하지 않거든? 대신 매일 반복되는 삶에서도 작은 아름다움에 감사하는 태도를 보여. 하늘을 올려다보며 짓는 미소는 오늘도 이 하늘 아래 살아간다는 단순한 기쁨이자 겸허한 수용 같다고도 느껴졌어.
사실 나의 아침은 올해 여름 이후로 조금은 '히라야마'랑도 가까워지고 '하늘'과도 친해진 것 같아. 그리고 무엇보다 좋은 의미로 '많이 느려졌어'. 물론 당연히 음악의 도움이 있었지.
내가 다니는 회사는 출근셔틀버스를 운행해. 그 버스는 내가 사는 집에서 걸어서 7~8분 거리의 정류장에 6시 50분을 시작으로 7시 20분 사이까지 운행을 해. 7시 20분 버스를 놓치면 꽤나 귀찮은 출근길이 되므로 7시 20분 버스를 꼭 사수해야 하지. 그런데 올해 여름 전까지만 해도 나는 분주하게 출근 준비를 마치고 7시 10분이 되어서야 집을 나섰고 막차를 놓치지 않기 위해 전속력으로 뛰기 일쑤였어. 서둘러서 뭔가를 하기보다 늘 미리미리 준비하는 나지만, 아침 출근은 여전히 쉽지 않은 일이니까 말이야.
그런데 모닝바흐 덕분에 아침 기상시간이 5시대로 빨라진 것이 큰 이유겠지만 사실 더 큰 이유는 몇가지 아침 루틴이 생겼기 때문이야. 나의 모닝 루틴은 이래.
첫째, 먼저 (아침에 책을 읽던지 공부를 하던지 간에 여하튼 집중의 시간이 끝나고서) 7시가 되면 무조건 집을 나서. 그런데 이 때 무조건 KBS 클래식 FM의 이재후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출발 FM과 함께>의 오프닝을 들으면서 집을 나서는 것이 핵심이야.
둘째, 아파트 현관문을 나서면서 하늘을 올려다봐. 이건 의식적으로 그렇게 하려고 노력 중이야. 바닥 보고 골똘하게 생각에 잠겨서 하루를 시작하고 싶진 않았거든. 이건 그렇게 하늘을 보다가 며칠 전 아침에 가을 하늘이 너무 예뻐서 찍은 사진이야.
셋째, 이제부터 하늘도 보면서 음악도 들으면서부터는, 나의 모든 신경은 '첫 곡에 대한 기대'야. 예전에는 가끔 미리 선곡표를 보기도 했었는데 지금은 첫 음악을 기대하고, 그 첫 음악의 작곡자/곡목/연주자를 맞추는 것이 '내가 나랑 하고 있는 꽤나 재밌는 놀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 사실 작곡자/곡목/연주자, 3개를 거의 다 맞추는 건 거의 쉽지 않아. (연주자까지 맞추는 건 꽤나 유명한 곡이 아니고서야 쉽지 않지. 가끔 마우리치오 폴리니, 조성진, 김선욱이 연주하는 피아노 연주곡이 나올 때는 가끔 맞추기는 하는데 쉽지 않아^^)
사실 3개 다 '아예 모르겠다' 싶은 곡도 상당한데 그렇다면, 이 음악이 작곡된 시대를 대충 짐작하는 것이 그 다음 순서야. 바로크 시대인지, 낭만주의 전기 음악인지, 후기 음악인지 또는 인상주의 음악인지 등에 관해 악기의 쓰임이나 분위기로 대충의 추론을 하는 거야. 그리고 곡이 끝나고 DJ가 밀하는 작곡가와 내가 추론한 시대를 인터넷이나 AI로 확인해보면, 기쁘게도 요즘은 얼추 90% 이상은 다 맞추더라구.
그렇게 하늘도 보고, 음악도 듣고 하다보니, 이 시간이 좋아서 나는 최대한 천천히 걷게 되었어. 세상에! 아침 출근길을 말이야!!!
나랑 같은 아파트에 살면서 회사 안에서 일하는 건물도 같아서 가끔 마주치는 회사 동료분이 있는데, 얼마 전에는 내 뒤를 따라 걷다가 나를 앞질러 가면서 "아, 대게 천천히 걸으시네요"라고 예의 그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말씀하시더라. 이어폰을 끼고 있어서 정확히 다 듣지는 못했지만, 그 말이 왠지 기분 좋게 들렸어.
'나도 이제 천천히 걷는 사람이 되었구나'
아마 회사 사람들이 내가 아침에 이렇게나 천천히 휘적휘적 걸어서 출근하고 있는 모습을 본다면 깜짝 놀랄 수도 있을 것 같아. 나는 그들에게 늘 바쁜 사람으로 보이니까. 그런데 나는 이런 천천히 시작하는 아침을 정말 좋아하게 되었어. 그리고 가끔 정말로 너무 좋아하는 노래가 이 라디오 프로그램의 첫 곡으로 선곡되는 아주 놀라운 순간을 맞이하게 되기도 해. 그럼 정말 감격해서 그 자리에 멈춰서기도 해.
이 곡은 얼마전 <출발 FM과 함께>에서 첫곡으로 선곡되어 나를 '멈춰서게 한' 포레의 <장 라신의 찬가>라는 곡이야.
https://youtu.be/g16zSj6Ynko?si=k6HNjyBMmPj31jcU
작곡가: Gabriel Fauré
곡목: 장 라신의 찬가(Cantique de Jean Racine)
연주/노래: Barnaby Smith가 지휘하는 English Chamber Orchestra와 VOCES8의 노래(2021년)
가을이 시작되는 요즘에 듣기에 정말로 좋은, 평정심을 가져다주는 아름다운 곡이야.
사실 저녁이야말로 천천히 걷기 최적인 시간이지.
보통 평일 저녁에 두번은 피트니스 센터를 갔다가 밤 9시 넘어서 집까지 약 20분 동안 걸어야 하거든? 이 시간은 운동을 마치고 몸이 가벼워진 상태라, 그 상쾌함이 늦여름 밤공기의 후덥지근함은 간단히 제압해버릴 것 같지만 사실 마냥 그렇지만은 않아. 예전 글에도 얘기했지만 나는 늘 작은 소소함에 감사하지 못하고, 언제나 다가가지 못한 이상과의 거리 같은 것으로 인해, 늘상 미세하게 허무함을 안고 사는 사람이라서 말이야.
사실 그 글에도 있지만, 쇼펜하우어가 말한 "인생은 고통과 권태 사이를 오간다"는 말이 끼친 영향이 꽤 컸어. 그 문장은 삶을 절망적으로 해석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소소한 기쁨에 대한 가장 긍정적인 해석을 가져다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그 글에서 나는 앞으로 매순간 이 말을 떠올리며 내 생각의 변화를 관찰해보는 실험을 하겠다고 했어.
실험 결과를 말하자면, 나는 쇼펜하우어의 저 말 덕분에 감히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해도 될 것 같아. 나는 이제 내가 느끼는 '약간의 허무함/충만하지 못함/다달하지 못하는 미진함/그로 인한 불안함' 과 같은 정서를 '내가 어떤 것을 덜해서가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조건'으로 받아들이고 있어. '아, 이건 고통과 권태의 틈새 같은 거야. 인생이라면 당연한 거야'라고 해석하면서, 마음의 숨통이 트인 거야. 단순한 위로를 넘어, 네가 앞으로 살아가는 데 아주 강력한 철학적 기반이 될 수도 있겠다는 설렘까지 들어. 고통도 권태도 인간이라면 피할 수 없는 조건이지만, 그 사이를 어떻게 살아내느냐는 전적으로 나의 몫이니까.
결국 이 저녁 시간에 내가 붙잡을 수 있는 건 이런 것들이야. 운동 끝난 후 느껴지는 근육의 긴장감, 음악 한 소절, 산책길의 바람 같은 것들말이야. 그리고 그 중에서 내가 맘대로 해볼 수 있는 가장 부담없는 것은 역시나 음악 한 소절이 될거야.
이 노래는 Annie B Sweet 이라는 스페인 싱어송라이터가 부른 'Take on Me'라는 곡이야. 가을이 시작되는 요즘 같은 날 들으면 너무 좋은 노래인데, 이런 음악을 들으면 허무함이고 뭐고 싹 날려버리게 돼. 허무함은 커녕 일순간 '경이로움'이라는 감정으로 직행할 수도 있어. 이 곡의 2분 30초 정도부터가 이 곡의 뒷부분이라고 볼 수 있는데 허밍 소리가 너무 아름다워. A-Ha의 그 전자적이고 감각적인 노래가 이렇게 내밀하게 바뀌었는데, 홀딱 마음을 뺐기게 돼.
https://youtu.be/GJuwdcQlT1g?si=uktYODEMifY3zOCe
가수: Annie B Sweet(스페인 싱어송라이터)
원곡: A-ha의 Take on me
9월이 시작되었어. 여름과 나는 맞지 않다며, 지금은 그저 애쓰지 않고 맞지 않음을 받아들이는 시간이라는 글을 쓴지도 3달 가까이 된 거야. 시간만큼 위대한 것이 있을까 싶어. 모두에게 평등하고, 잊고 싶지만 잊을 수 없을 것 같던 어떤 기억도, 결국 시간은 반드시 그것을 무력화해버리니까.
그리고 9월과 함께, 오지 않을 것 같던 가을이 아주 조금씩 오고 있는 것 같아. 여전히 후덥지근한 바람이지만 이 정도도 충분히 감사하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야. 맨날 고개 숙이고 어떤 생각에 잠겨 걷던 나는, 요즘 더욱 더, 내 옆에 음악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여 밤하늘도 올려보고, 한때 벚꽃을 피웠던 그 나무들이 이제 짙은 녹색으로 무성해진 모습을 뒤늦게 알아차리며 15분 거리를 엿가락처럼 늘리고 늘려서 30분을 만들고서야 집에 도착하곤 해.
이제 정말 완연한 가을이 오면 더욱 천천히 걸을 수 있을까?
이렇게 음악은 언제나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줘. 너에게는 늘 내가 있다고, 그리고 지금까지 너를 지탱해왔다고 말이야.
아침에는 클래식이 하루를 여는 작은 의식이 되어주고, 저녁에는 장르 상관없이 여러 세계의 음악이 하루를 마무리하는 위로가 되어줘.
그리고 무엇보다, 음악은 나를 천천히 걷게 해. 급하게 목적지에 도달하려 하지 않고, 지금 이 순간의 하늘과 나무와 바람을 느끼며 걸을 수 있게 해주거든.
히라야마처럼 하늘을 올려다보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음악 덕분에 조금씩 그런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아. 바닥만 보고 걷던 내가 이제는 밤하늘도 올려다보고, 계절의 변화도 느끼며 산책하듯 걸어.
최대한 천천히 걷기. 이것이 음악이 내게 선물한 가장 소중한 변화야. 그리고 아마도, 앞으로도 계속될 변화일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