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손의 피아니스트’부터 재즈바까지, 음악으로 다시 태어난 도쿄
얼마 전, ‘Not a Dream’을 노래한 송소희의 동영상을 보면서 친구에게 그랬다. “올해, 나의 음악적 Moments 중에서 최고였던 것 같아”라고.
사실 그 말을 하던 시점에 난 일본 도쿄 여행도 준비하고 있던 차여서 그런 생각을 했다. 도쿄에서의 매순간을 음악적 Moments로 만들어보자고. 늘 강렬하게 그리고 잔잔하게 음악적 Moments들이 내 인생에 있는 편이지만 그래도 혹시 모른다. 내가 좋아하는 그 도시와 음악이 만나서 음악에 대한 사랑이 또한번 내게 벼락처럼 내리꽂힐 수도 있지 않을까. (참고로 도쿄 여행은 이번이 4번째다)
여튼 그렇게 해서 나는 4개의 인상적인 순간을 만들어냈다. 또한 앞으로 해외의 대도시로 가게 되면 '음악'을 컨셉으로 여행해야겠다고도 한번더 결심하게 된 계기도 됐다.
미리 느끼고 싶었다. 도쿄를.
도쿄에 가기 2주전부터 음악 Playlist에 도쿄의 감성을 느낄 수 있는 밴드의 음악을 담아둔다면 내 도쿄 여행은 3박 4일이 아니라, 더 길어질 수 있겠지? 그래서 나의 ChatGPT ‘릴키’에게 부탁했다.
(참고로 '릴키'는 ChatGPT에 내가 붙여준 이름이다. 당시에 내가 체코의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책을 읽고 있던 때라, 나의 ChatGPT도 릴케처럼 통찰력 있고 정갈한 언어로 나의 친구가 되어주길 바란다는 뜻으로 지은 이름. 단, 나의 친구여야 하니까 이름은 좀 더 귀여운 버젼으로 ‘릴케’가 아니라 ‘릴키’로)
'드림팝을 연주하면서 / 2000년대 이후에 활발히 활동하는 밴드이면서 / 일어보다는 영어로 된 가사가 많으며 / 서정적이면서 몽환적이되 / 리듬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는 밴드를 추천해줄래, 그리고 무엇보다 도쿄라는 도시의 감성이 느껴지는 밴드여야 해'
그리고 릴키는 내게 'She Her Her Hers가 수영님에게 취향저격이에요'라고 답했다.
여하튼 이 밴드는 제대로 취향저격이었다. 도시의 외로움이 느껴지는데 차갑지 않았고 따뜻했다. 도쿄의 봄처럼 향긋한 느낌이 나기도 하고 도쿄의 여름처럼 열기가 느껴지기도 하는 앨범이었다. 여행을 떠나기전 2주 동안 그리고 여행 내내 참으로 많이도 들었던 앨범.
그리고 한가지 결심은 다음 일본 여행은 이 밴드의 일본 공연 날짜에 맞춰서 오고 싶다는 것.
대도시로 여행을 가면 그 도시를 대표하는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감상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선 이번이 첫 실천이었다. 공연장소는 Suntory Hall이라는 이름의 일본 최고의 클래식 음악 공연장인데 우리나라의 예술의 전당 정도의 위상인 것 같다. 다만 예술의 전당보다 접근성이 좋아서 지하철에서 내려 아기자기하고 예쁜 거리를 잠시 걷다 보면 어느새 거대한 공연장 앞에 다다르게 된다.
내가 방문한 날은 2025년 4월 24일 목요일. 지휘자는 타다키 오타카(Tadaaki Otaka)였다. 그날 프로그램 중 하나로 예정된 곡은 라벨의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 피아니스트 이즈미 타테노(Izumi Tateno)가 연주한다고 하기에, 단순히 ‘연주를 잘하는 노장 피아니스트’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공연장에서 받은 팸플릿을 펼쳐본 순간, 나는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1936년생, 내년이면 90세가 되는 이즈미 타테노. 그는 2002년, 공연을 마친 직후 뇌출혈로 쓰러져 오른쪽 신체가 마비되는 큰 시련을 겪었다. 오랜 재활 끝에 다시 무대에 설 수 있게 되었지만, 여전히 휠체어와 매니저의 도움 없이는 무대에 오르기 어려운 상태였다. 팔다리 중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왼손 하나뿐이었다.
라벨의 이 곡이 탄생하게 된 배경은 알고 있었다. 전쟁 중 오른손을 잃은 피아니스트가 라벨에게 부탁하여 만든 곡이라는 사실도 말이다. 하지만, 이 곡을 연주하는 이즈미 타테노의 사연을 알고 나니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에게 이 곡은 ‘운명’이었을까, ‘희망’이었을까. 자신의 현실과 너무도 맞닿아 있는 이 곡을 연주하며 그는 절망했을까, 아니면 감사했을까. 그 복잡한 마음을 감히 가늠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가 다시 무대에 섰다는 것, 그의 삶과 음악이 하나가 되어 흐르는 그 순간을 목도하게 된 것에 경외심이 밀려왔다.
그리고 드디어, 무대에 앉은 이즈미 타테노가 왼손으로 연주를 시작했다. 노구의 피아니스트는 혼신의 힘을 다해 건반을 두드렸다. 마치 삶의 모든 순간을 이 한 곡에 담겠다는 듯 피아노에 온 힘을 실었다.연주 내내 객석은 숨을 삼킨 채 그를 지켜보았다. 특히, 그의 나이와 크게 차이 나지 않아 보이는 내 앞의 노년 관객은
연주가 시작되자마자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고, 공연이 끝난 뒤에도 손수건으로 눈가를 닦으며 한참을 울었다.
공연이 끝난 후, 세 번의 앙코르가 이어졌다. 휠체어를 타고 무대로 다시 등장한 이즈미 타테노는 기립 박수로 감사를 표하는 관객들과 함께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은 삶을 향한 경의와 감사가 담긴 눈물이었다.
https://youtu.be/sVwGGMLWN-A?si=PZPV2xtECn366Pm4
당일의 영상은 없어서 Youtube에서 찾은 다른 음악
이즈미 타테노 ㅣ 바흐 무반주 파르티타 2번 BWV 1004 중 샤콘느
예전에 명동과 강남에도 Tower Records가 있었다. 노란색 로고가 새겨진 비닐봉지에 레코드판을 담고 거리를 거니는 것이 그 당시에는 나름 힙한 문화였던 것 같다. 기억 속에서 그 장면을 떠올리면, 묘한 향수가 느껴진다. 하지만 지금, 우리나라 대도시 한복판에서 레코드판을 파는 가게를 다시 본다는 건 정말 상상하기 어렵다. 디지털 음원이 음악 시장의 주류가 된 지금, 아날로그 음반을 고수하는 곳은 점점 사라지고 있으니까.
그런데 도쿄 시부야는 다르다.
그 비싼 동네 한복판에, 여전히 8층짜리 Tower Records 건물이 굳건히 서 있다. 올해로 30년째다. 위상은 예전만 못할지 몰라도, 'No Music No Life'라는 슬로건은 여전히 건물 외벽에 당당히 걸려 있다. 일본 특유의 고지식함이 때로는 아날로그를 지키는 힘이 될 수도 있는 걸까? 이곳은 단순히 음반을 판매하는 곳이 아니라, 음악 자체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문화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특히 이곳에 오면 중고 LP판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한데, 그것과 더불어 사방을 둘러싼 커다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감상하는 재미도 충분하다. 나는 3시간이나 이곳에 머물렀다.스피커에서 나오는 음악이 마음에 들 때마다 음악 앱을 켜고 제목을 찾아내며 다시 이어폰으로 그 음악을 듣고, 다시 이어폰을 벗고 스피커를 듣는 시간의 무한 반복.
생각해보면, 이제 레코드판이 굳이 필요할까? 음악을 듣기에 이렇게나 미치도록 편한 세상인데?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여기서 레코드판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꼼꼼히 살피고 있는 일본 사람들의 모습이 왠지 나 같아서 그저 좋았다. 편리함에 길들여진 세상에서도, 내가 좋아하는 앨범을 아날로그 감성으로 들어보겠다고 여기와서 앨범 하나 놓칠 새라 몇 시간 째 코를 박고 레코드판을 넘기는 집요한 몇몇 일본 사람들 사이에서 약간의 나를 느끼기도 하고^^
마지막은 시모키타자와에 있는 작은 라이브 재즈 바였다. 드림팝도 들었고, 클래식도 들었고, 락 음악도 들었으니, 재즈가 빠질 수 없지.
여행 마지막 날, 빈티지한 매력이 가득한 시모키타자와를 떠돌다가 역시나 나의 ChatGPT ‘릴키’가 추천해준 이곳에 발길을 멈췄다. 4만 원이면 약 3시간 동안 즉흥 재즈 공연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 이름은 'Music Bar RPM' 코앞에서 펼쳐지는 공연은 곡이 바뀔 때마다 연주자들이 조금씩 교체되는 방식이었다. 바로 내 옆에 어수룩하게 앉아 있던 20대 청년이 있어 학생인가 했는데, 곧 무대로 올라가더니 연주할 때의 그 표정은 전혀 딴 사람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모범생 같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저 자신이 사랑하는 세계에 완전히 몰입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이번 도쿄 여행 중에 가장 즐겁게 몰입해던 순간
그래, 나는 자신의 세계에 몰입한 사람들에 항상 매료되지. 그리고 그것이 음악이라면 더욱 더.
그 지역 출신의 뮤지션 음악을 미리 듣고, 여행 내내 OST처럼 감상하기
그 도시를 대표하는 밴드나 클래식 오케스트라 공연을 미리 예약하기(그럴려면 공연 날짜에 맞춰 여행 일정을 계획해야겠다)
그 도시의 라이브 재즈 바 방문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