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 자해라는 문화를 공유하는 아이들
"선영아!"
우리 반 선영이가 조용히 교무실에 들어왔다.
무더운 여름, 하얀 하복 교복을 입은 선영이의 팔에 뚝뚝 떨어지던 피를 기억한다.
"선영아, 무슨 일이야. 왜 그랬어?"
"그냥 못 참겠어요."
선영이의 팔에는 길고 얇은 상처들이 가득했다.
나란히 나란히, 또는 서로 얽혀있는 상처 자국이 채 아물기도 전에 다시 자해를 한 것이다. 서둘러 보건실로 데려가 소독을 하고 밴드를 붙여주었다.
선영이의 자해는 1년 전부터 시작됐다.
처음 시작은 달려가는 자동차에 몸을 던졌던 일부터였다. 아니, 더 거슬러 올라가면 초등학교 때 당했던 왕따 경험 때문이었다.
선영이는 정신건강의학과에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
학생이 완강히 거부했기에 부모도 억지로 데려가지 못했다. 학교에서는 위기 학생으로 지정하여 선영이의 모든 일거수 일투족에 대해 관찰하고 기록하기 시작했다.
당시 30명이 넘는 담임 반 아이들을 돌봤지만, 내 온 신경은 1년 내내 선영이를 향해 있었다. 무엇이, 또는 누군가가 선영이가 다시 자해를 하도록 만들까봐. 무엇보다 내 자신이 그 발단이 되지 않기 위해 모든 말과 행동을 조심해야 했다. 지금 돌아보면 나 역시 제 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도, 전문 상담사도 아닌 일개 평교사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어 애쓰는 10대 사춘기 아이의 자해와 자살 시도를 여러 번 목격해야 한다는 것이 과연 흔한 일일까.
"선생님, 건영이도 그래요."
옆반 선생님이 어렵게 말을 꺼냈다.
옆반 아이 건영이도 열심히 손목을 그었다고 한다.
"또 있다고요? 유행이에요?"
"유명 가수가 자해한 사진을 올리고 그랬대요. 그래서 궁금해서 해봤다고 하더라고요.
하고 나면 시원하대요."
"시원하다고요...?"
그렇다.
아이들은 자해라는 문화를 공유하며 여기저기서 자신을 아프게 해치고 있었다.
선영이와 깊은 대화를 나눴던 기억이 난다.
"선영아, 팔로 칼을 그으면 어때?"
"스트레스 받을 때 긋고 나면 마음이 편해져요."
"어떨 때 스트레스 받는데?"
"내 맘대로 안 될 때요."
통제하고 싶은 마음이다. 불안하니까.
선영이의 긴팔 동복에 가려진 상처를 나는 보지 못했었다. 무더운 여름이 되고 나서야 보였던 아이의 상처.
어쩌면 우리 어른들이 잘못본 것이 아닐까.
피가 뚝뚝 떨어져도 딱지가 생기고 울퉁불퉁 못나게 생살이 다시 올라온 모습만 본 게 아닐까.
그건 분명 아이의 신호가 아니였을텐데 말이다.
마음이 너무 아프니까, 마음은 아무리 아파도 어른들은 볼 수 없으니까. 자신이 상처를 아프고 깊게 내면 낼수록, 적어도 어른들이 그 신호를 들어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의 마지막 절규가 아니었을까.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은 순간이 온다면,
무엇에 화가난 지 몰라 자신을 해치고 나서야 비로소 해방되는 마음이 든다면,
꼭 기억해줘.
넌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은 게 아니야.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 거야.
해방감이 들고 시원한 '기분'이 들어도
그건 절대 해결책이 되지 않아.
마음의 상처를 제대로 보지 못해서
자꾸만 네 몸에 생채기를 내게 되는 거야.
한번 더 상처를 내고 싶을 때,
도저히 멈추지 못할 때
꼭 누군가의 옷자락이라도 붙잡아.
그리고 외쳐.
도움이 필요하다고.
그게 어떤 도움의 손이든지
너의 앞에 놓여지는 순간,
그 순간을 절대 놓치지 마.
그 손을 잡는 순간 알 거야.
넌 분명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지 않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