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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사비나 Feb 23. 2023

엄친아보다 두려운 아친엄과의 관계

ADHD 아이를 키우며 만나는 “아이 친구 엄마들”

  유치원 시절 사고뭉치 세모는 가끔 지나가는 친구의 배를 주먹으로 치거나 갑자기 지나가는 친구를 붙잡고 어디 가냐고 대뜸 묻거나 하는 등 내 얼굴을 붉히는 일들을 참 많이도 저질렀다. 이런 일들을 겪을 때마다 나는 내 얼굴이 붉어지다 못해 더 이상 남아있는 피부가 없을 정도로 면피가 한겹씩 벗겨지는 기분이었다.


한 마디로,

쪽팔림 그 자체였다.

온 몸이 쪼그라들듯 쪽팔린 그 기분을 아는가?


민망한 상황이 종료되면 실 없이 웃고 있는 세모에게

그 상황이 얼마나 황당하고 잘못된 것인지 매몰차게 설명하는 나의 말들이 허공으로 흩어지는 것을 매번 보아왔다. “죄송합니다.” 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자동으로, 한 번에 자존심따위 거치지도 않고 나오는 사과의 말을 하는 날 보며, 나름 교사로서 자식 하나는 잘 키우겠지 하고 자만했던 나에게 한번 더 ‘니가 얼마나 오만했더냐.’ 하며 쪽을 주곤 했다.


엄친아(엄마 친구 아들)이 아니고,

아친엄(아들 친구 엄마).


난 그들이 참 두려웠다.

세모의 과한 행동들과 사회화되지 않은 이 생명체가 주는 피해가 그들에겐 많이 불편해보였다. 가끔은 아친엄들이 자신의 아이들을 우리 세모로부터 지켜야한다는 의무라도 있듯이 방어 자세로 눈빛을 날릴 때면 난 한 없이 작아졌다. 아친엄들이 복수로 모이면 그렇게 두려울 수가 없다.


이 아친엄들의 눈빛과 소문들로 상처입은 나는 미숙하게도 그 분노를 우리 세모에게 퍼부었다.


“엄마가, 몇 번 말했어? 그 행동은 다른 사람 피해주는 행동이라고 했어? 안 했어?”

“너 그렇게 하면 아무도 너랑 안 놀아줘!”


이렇게 모진 말들을 쏟아내고 그 끝은 자책이었다. 이런 부정적인 감정들이 무엇이 문제인지도 모르고 축적되어 결국 나를 ‘우울’이라는 늪에 빠지게 했다. 내 자신마저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이 아이가 너무 버겁다.

이 아이가 잘 해주기만 하면 아친엄들에게 내가 그런 대접 받을 일도 없을텐데.

아님 내가 지금 사라지면, 이런 감정들따위 느끼지 않을텐데.


 그렇게 나는 살기 위해 심리상담센터에 갔다. 6개월의 긴 상담을 받았다. ADHD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은 나와 같은 부정적인 감정의 싸이클(수치심- 분노- 자책)에서 빠져나오기 어려울 거라 생각한다.

 

상담의 과정에서 수치심과 분노의 감정의 근원을 알게 되었다.


‘교사라는 직업을 가진, 나라는 사람의 자아상을 세모의 태어난 그대로의 존재와 분리하지 못한 탓’이라는 것을...


자녀와 나를 분리할 수 있다면, 세모가 문제를 일으킨 상황에서 내가 수치심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이해했을 것이고, 세모에게 침착히 행동의 잘못됨을 알려주고 피해를 받은 사람에게 사과를 하도록 당당히 가르쳤을 것이다. 아친엄들은 나와 아이를 세트로 묶어 따가운 눈총을 날렸을지 모르나 세모의 행동에 불편함을 느낀 것이지, 나에게 날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내가 알았어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아이에게 ‘이게 다 너 때문이다.’ 라는 메시지들이 얼마나 아이의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지도 깨달았다. ADHD 아이들은 보통 뇌신경회로의 다양성 때문에 본인이 왜 이 행동을 했는지 저 말을 했는지에 대해 생각하고 행동하기가 매우 어렵다. 상대방이 불편해 하는 표정과 목소리 톤 마저 주의력 부족으로 공감하기 어려워한다. 내가 이 특성을 좀더 마음에 새기고 있었다면 세모에게 의도가 있었다는 듯 세모의 탓을 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아친엄들과의 두려운 관계를 어떻게 극복해야할까?


1. 세모의 행동에는 의도가 없음을 마음에 새긴다. 그럼으로써 좀더 세모의 행동을 이해하고 혼내기보다는 가르쳐줄 마음이 생긴다.


2. 아친엄들의 불편함을 백번이고 이해해본다. 우리 아들래미의 충동적이고 과한 행동들 때문에 비ADHD 아이들은 불편하기 쉽다. 그렇기에 아이들이 많은 상황에서는 그 상황을 미리 피한다. 외롭고 억울한가? 그 생각은 이제 버리자. 아이에겐 내가 있다. 나에겐 아이가 있다. 우리 서로는 나뭇가지든 돌이든 뭐든 다 놀잇감이 될 수 있는 무엇인가를 갖고 있다.


3.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과하게 신경쓰고 있다면 자신이 자의식이 강한 사람인지 돌아보자. 자의식이 강한 사람은 높은 도덕성과 과한 눈치가 자신을 갉아먹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한, 아이를 감사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을 방해한다. 타인의 시선이 수치스러운가? 그 타인은 아마도 나와 길어야 3개월 정도 지나가며 만날 사이이다. 나와 아이는? 내가 죽을 때 내 곁을 지킬 가족이다. 가치있는 곳에 의식을 두자.

4. 그리고, 마지막으로...

   “용서하자.”

  그들은 모른다. ADHD 아이를 키운다는 짐의 무게를.

 그들은 모른다. ADHD 아이들이 얼마나 고군분투하며 하루를 견디는 지를.

  그들은 모른다. 우리 아이들의 반짝임을.

  그러니 용서한다. 그들의 무지에서 오는 공감의 부재를.


신기율 작가님의  <관계의 안목>이라는 책의 에필로그 중,

‘후회없는 관계는 내가 먼저 상대의 잘못을 용서하는 용기를 낼 때 만들어질 수 있다. 용서할 수 있어야 미움 없이 상대에게 공감할 수 있고, 공감할 수 있어야 상대의 모습을 온전히 볼 수 있는 맑은 눈을 갖게 된다.’

라는 글이 나에게 깊이 와닿았다.


  결국 아친엄 그들을 이기는 방법은 용기있는 우리의 용서일 것이다. 그래야 맑은 눈으로 아이를 보고 아이가 만나게 될 사람들을 온전히 그 모습 그대로 볼 수 있다.


ADHD 아이들은 어쩔 수 없이
사회에서 우당탕탕 잦은 실수를 할 것이고,
아이들도 “죄송합니다.”를
자동화하는 어른이 될 것이다.
그렇기에 용서해야 한다.
우리가 하는 용서가
그들에게 깊은 무게로 전달되어,
우리 아이가 편히 용서받을 수 있는,
그런 배려가 흐르는 사회에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사진 출처- 여성 중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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