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에서 운전을 하다 보면, 직선으로 뻗어 있는 거리에 오로지 내 차만 달리고 있을 때가 있다. 노래에 빠져 캐나다의 멋진 나무와 푸른 하늘에 빠져 달리다 갑자기 경고음이 울린다. 제한 속도를 넘어간 것이다. 제한 속도 80인 도로. 내 차 속도를 보니 95 숫자가 빨갛게 떠 있었다. 브레이크 밟아 속력을 줄였다.
2차선 도로로 빠져나올 때쯤, 내 옆에 차 2대가 슝 지나갔다.
'내가 너무 느리게 달리나?'
액셀을 밟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보니 내 속도는 95였다.
제한 속도 100인 도로였다.
잘 달리고 있다가도 차 몇 대가 내 앞을 앞서가면 갑자기 나는 느리게 가는 차가 된다.
주변에 차가 없을 때에는 빠른 지도 느린지도 모르고 달린다. 그러다 하나, 둘 나보다 앞서가는 차가 오면 같은 속도여도 괜히 내가 느린 건 아닌가 액셀을 밟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고등 시절, 공부를 할 때도 충분히 했고, 시험도 잘 볼 것 같았는데 독서실 옆 자리 아이보다 먼저 일어나 집에 돌아갈 자신이 없었다. 더 버티면 1등급 문이라도 닫을 텐데, 지금 일어나면 2등급으로 내 앞에서 문이 닫힐 것 같았다.
우리 엄마는 시집살이를 하며, 일을 하고 두 딸을 키워냈다. 아빠의 육아 참여가 매우 적었던 그 시절의 엄마. 대체 어떻게 해냈을까. 어느 날, ADHD 아이 세모가 너무 버거워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는 어떻게 했어? 다른 사람들은 다 쉽게 키우는 것 같아."
"그냥 나는 내 것만 봤어. 다른 집은 어떻게 키우는지 몰랐지."
아이가 진단을 받고 나서는 공부나 여러모로 많이 내려놨지만, 요즘 제일 걱정하는 건 아이의 키 성장이다. 다른 집 아이들은 그냥 자라던데 우리 아이는 잘 차려줘도 편식하고 또 열심히 우유를 챙겨줘도 참 성장이 더디다. 아이가 같은 나이 또래 무리에 쓱 들어가는 순간, 드러나는 아이의 작은 키에 갑자기 나에겐 걱정이 몰려온다.
모든 게 그렇다.
혼자 달릴 땐 풍경도 아름답고 내 속도가 빠른지 느린지 알게 뭐람. 행복감도 내가 보는 대로 느낄 수 있는 자유로움이 있다. 그러다 하나 둘 옆차가 조금만 더 빨리 달려도 같은 속도여도 느리게 느껴지는 것.
<시대 예보>의 저자 송길영 작가는 말했다. 공연장에서 앞 자리의 청중이 일어나면 보이지 않아 뒷 자리 그 뒷자리까지 다 일어나야 하는 현상이 꼭 한국 사회의 경쟁 중심 문화와 같다고.
다 그렇다. 아이 하나만 보면 내가 깊이 소망하던 대로 손가락 열개, 발가락 열개, 남편을 닮은 눈웃음, 힘차게 달리는 다리, 숫자도 읽고 글자도 읽고, 꿈도 많은 건강한 아이가 내 앞에 있다. 그러다 옆에 하나, 둘 또래 아이가 뭐든 빠르게 나아가는 모습만 보면, 내 아이는 갑자기 부족한 아이로 보인다. 그러다 갑자기 마음이 먼저 달리기 시작한다. 아이의 마음은 볼 겨를도 없이.
내가 요즘 되뇌는 말이 있다.
"I'm not doing this."
또 또 그런다. 그렇게 생각하지 말자.
어른이 되어간다는 건,
내가 보고 싶은 관점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I'm not doing this.
옆차의 속도를 따라가지 않을 거야.
나는 내 속도대로 갈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