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이건 그냥 내 기분일 뿐이라는 사실

세상이 짜증 나고 미울 때

by 이사비나

어느 날, 방에서 책을 읽는데 비가 시원하게 내렸다.

'더 내려라. 더 더 더.'

땅에 내리꽂듯 더 크게 내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비를 하나도 맞지 않고, 바깥에 비가 시원하게 내리는 느낌을 좋아한다.

그러다 3시가 되어도 그치지 않는 비에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아이를 데리러 가야 하는데 운동화가 젖은 운동장을 밟는 게 싫었다. 우산을 써도 바짓단은 젖어야 하는 그런 날씨가 싫었다.


비는 늘 똑같이 내릴 뿐이었는데 내 기분에 따라, 내 상황에 따라 좋았다가 싫어진다. 생각해 보니 일상에서 이런 비슷한 일이 많은 것 같다.


브런치 썸네일 (페이스북 게시물) (42).png


"빨래 좀 개줘."

이제 커피를 마시고 쉬려고 앉았는데 남편이 말한다.

나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쉬려고 하는데 왜 시키지?'

"지금 꼭 해야 해?"

세모에게 듣기 싫은 말인데 내가 하고 말았다.


사실 매일 묵묵히 빨래를 개는 남편의 뒷모습을 보며 감사하게 생각해 왔었다. 그런데 참 이기적 이게도 잠을 잘 못 자거나 컨디션이 꽝인 날에는 그냥 한 번쯤 부탁하는 그의 말도 짜증 나게 들렸다.


"엄마! 엄마!"

제발 나를 아무도 안 불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방학을 두 달 반 보내고 나니 마치 시녀처럼 바로바로 자신들의 요구를 해결해 주기를 바라는 아이들의 부름이 정말 듣기 힘들었다.


친구를 만나러 남편에게 아이를 맡기고 저녁 늦게 들어간 날, 아이들이 "엄마!" 하고 부르며 달려온다. 아이들이 나를 그리워해줬다는 사실에 기분이 사르르 좋아진다.


어쩌면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인지도 모른다. MBTI에서 I와 E가 55:45일 정도로, 혼자 있고 싶다가도 금세 누군가를 찾게 된다. 사람들을 만나면 '언제 집에 가지?' 하다가 또 하루 종일 집에 혼자 있는 날엔 바깥에 나가 사람들을 만나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진다.




날씨 탓, 남편 탓, 아이들 탓…
그렇게 탓하고 있는 나를 문득 발견할 때가 있다.

일상이 짜증 나다 못해 세상이 원망스러울 때,
그냥 이렇게 생각해 보기로 했다.

‘이건 내 기분 탓이야.’

아이도, 남편도, 아이의 ADHD도,
지쳐가는 일들도 그냥 일어나는 일들일뿐.

그것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다룰지는
내 마음이 결정할 수 있다고 믿기로 했다.

지금은 고단해도, 이 모든 일이 언젠가는
내게 꼭 필요한 일이었음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

다른 스토리를 쓰게 될지도 모른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