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이 주는 감동과 멋, 동궁과 월지

이 예쁜 야경을 이제야 보다니.

by 금파랑

작년 겨울 캐나다인 남편과 경주를 짧게 여행했다. 우리의 일정상 허락된 시간은 단 1박 2일이었다. 엄마는 나의 결혼 후 줄곧 성화였다. 왜 외국인 남편을 데리고 경주를 가지 않냐며,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데 분명히 그가 좋아할 것이라고 말이다. 참고로 이 여행은 즉흥적으로 2박 3일로 연장되었다.


바로 그 이유는 남편이 경주의 멋에 푹 빠졌기 때문이다. 하하. 정말이지 뿌듯하지 않을 수 없었다. 1박 2일 동안의 경주라면 하루 반나절은 천마총과 대릉원 주변을 둘러보고, 그다음 날 아침 일찍 불국사와 석굴암 정도를 본다면 짧고 알찬 계획이 될 거라 생각해 그렇게 일정을 짰다.


특히나 보문단지 일대는 내 계획에 없던 일정이었다. 그런데 그 일대가 마음에 든 남편이 숙박을 하루 연장하자고 했고, 나 역시 흔쾌히 동의했다. 그렇게 하루의 시간이 더 주어진다면 바로 이곳, 동궁과 월지를 드디어 방문해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IMG_9952.jpeg
IMG_9934.jpeg
IMG_9864.jpeg
IMG_9892.jpeg


나는 30대 중반의 나이다. 사실 원래 이곳은 야경으로 그렇게까지 유명한 곳은 아니었다. 적어도 내가 10, 20대였을 때, 한창 전국 팔도를 누비며 돌아다녔던 시기에는 말이다. 경주를 방문해도 으레 사람들이 자주 들르곤 했던 장소는 대릉원 일대와 첨성대, 국립경주박물관, 그리고 불국사 정도였다.


그렇게 이곳에 대해서, 그리고 경주에 대해서 한동안 잊고 살았다. 월지의 야경이 아름답다는 입소문을 듣게 된 것은 몇 년 전이었다. 언젠가는 한 번 가 봐야지 하고 생각만 하고 있었던 그곳을 작년 겨울 마침내 인생 처음으로 방문한다는 생각에 택시 안에서도 괜스레 설레는 마음이 들었다.


매서운 겨울의 밤추위를 뚫고 달려간 그곳은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인파를 뚫고 가장 가까이에 보이는 큰 누각으로 향했다. 마침내 그 누각의 끝에 발을 딛고 호수를 둘러보게 된 나는 그 풍경에 마음이 찌르르해져 왔다. 압도적이고 화려한 아름다움을 자랑하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사람의 마음에 서서히 물처럼 스며드는 듯한 감동이 전해지는 공간이었다.


IMG_9885.jpeg
IMG_9916.jpeg
IMG_9928.jpeg
IMG_9908.jpeg


특히나 인상적이었던 것은 호안의 대비였다. 커다란 호수를 가운데 두고, 서쪽 호안은 거의 직선에 가깝다. 그리고 동쪽 호안은 아주 복잡하고 입체적인 모습을 보인다. 어느 한 면에서 절대로 호수 전체를 다 볼 수 없을 정도로, 구불구불하게 호수면으로 들어왔다 나왔다 하는 곡선으로 이루어진 정원이 보는 이의 시선을 즐겁게 한다.


마치 물속에 산이 갇힌 듯, 혹은 산봉우리들이 물에 갇힌 듯, 복잡하면서도 아름다운 감동을 선사한다. 살면서 '공간이 주는 멋'이라는 것을 느낀 적이 드물게 몇 번 있지만, 월지는 바로 그런 곳 중 하나였다.


나는 그곳을 떠날 줄 몰랐다. 세 개의 누각 모두에 발길을 향해 사진 몇십 장을 찍으며, 이 각도에서 다르고 저 각도에서 다른 호안의 모습을 요리조리 둘러봤다. 한참 후 한국의 겨울 추위를 못 견디는 남편이 이만 돌아가자며 재촉했지만, 매정하게도 그의 요청을 무시했다.


공간이 주는 그 느낌에 조금 더 나 자신을 푹 가라앉혀 그것이 내 심연을 떠돌게 하고 싶었다.




사료를 찾아보니 월지가 세워진 통일 신라 시대는 문무왕 치하에 건축, 공예, 조각 기술 등이 발달한 문화적으로 융성했던 시기였다. 당나라와 일본과의 교류도 아주 활발했다고 한다. 우리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능히 그 시대의 '메트로폴리탄'에 가까웠을 것이다. 경주 월성, 즉 서라벌이라는 곳은 말이다.


또한 동궁과 월지는 삼국을 통일한 신라 문무왕이 세운 일종의 '승리의 기념비' 겸 신라인들이 생각하는 이상향, 일종의 유토피아라고 한다. 원래 이곳에는 몇십 개에 달하는 전각들이 더 많이 있었다. 지금처럼 텅텅 비어 있지도 않았다.


호수를 빼곡히 둘러싼 숲에서 길러진 진기한 동물과 식물들, 호수 가운데 자리한 아름다운 연꽃의 군집, 물 위에 나무 쪽배를 띄우고 주담을 나누며 마치 산처럼 보이기도, 혹은 바다처럼 보이기도 하는 신비로운 호안의 모습을 즐기는 사람들. 그 모습은 가히 아름다웠을 것이다.


IMG_9906.jpeg



수, 금 연재
이전 09화나를 울린 단 하나의 SF, <프로젝트 헤일메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