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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창우 Dec 26. 2018

사색29. 세고비아 기타 수리

3월 21일(금)

고향집 아침, 어머니는 연포탕을 아침 식사로 차리신다. 점심도 잘 챙겨 먹으라며 카레를 준비해놓고 출근하신다. 모처럼 집에 사람이 있어 아침을 차린다고, 덕분에 출근시간 늦었다며 뛰어나간다. 창밖으로 멀리 사라지는 엄마를 보곤 창문을 열어 ‘엄마~’ 하고 부른다. 엄마는 쿨하게 뒤 돌아보지도 않은 채 손을 들어 흔들며 아파트 단지 코너를 휙 지나 사라진다. 어머니는 일하러 나가고 실직한 아들은 집을 채운다. 2년 전 아버지께서 갑작스레 돌아가신 후 어머니는 혼자 빈 집을 채우고 계신 게 괴롭다며 일자리를 찾으셨다. 집 앞 어린이집에 아이들이 먹을 밥을 만드는 일을 시작하셨다.      


어젯밤, 무엇을 할 것인가. 계속 서울에서 혼자 살 텐가, 아님 고향으로 내려와 살 것인가 어머니랑 이야기를 했다. 어머니는 사람을 툭툭 짜르는 불안정한 직종에서 계속 일을 할 것이냐, 불안감은 둘째 치더라도 그런 처우가 못마땅하단다. 나는 전공, 경력도 이제 다른 직종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어쨌든 다시 그쪽 문을 두드려야 할 거라고 했다. 그리고 신앙으로 점프했다. 이 상황을 신앙인으로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까 고민 중이라고 신앙고백을 했다. 신앙으로 접근한다면 눈앞이 캄캄해도 어머니는 안심할 수 있단다. 자식은 못 미더워도 하나님이 우리 아들 보살펴줄 거라는 건 믿어지나 보다. 신앙은 효도스럽다.      


주방 형광등을 교체한다. 여자 혼자 있는 집은 어둑한 형광등을 교체하는 걸 미루고 둔탁한 불빛을 견디고 만다. 남성스러운 집안일을 찾는다. 통기타가 눈에 들어온다. 어머니께서 동생이 중학생이 된 기념으로 사줬던 세고비아 기타. 오래된 만큼 기타 줄을 몸통에 잡아주는 브릿지가 부웅 떠있다. 세월이 흘러 6현의 장력을 겨우 견디고 있는 브릿지 꼴이 안타깝다. 이걸 고쳐볼까. 인터넷에서 수리하는 방법을 찾아본다. 할 수 있을 것 같다. 철물점에 가서 사포와 목제 접착체를 산다. 가벼운 녹이 슬어 있는 6현을 한 줄씩 풀어낸다. 디이잉, 두우우웅, 버텨 왔던 기타 줄은 연한이 다한 소리를 내며 제 음보다 훨씬 낮은음을 마지막으로 울리곤 끝내 풀어지고 만다. 어릴 때 열렬히 퉁기던 이 기타는 주인들이 집을 떠난 뒤 주로 작은방 창고에 놓여 있었다. 이걸 고쳐보겠다. 잠시 고향집에 있을 동안 이 기타를 고쳐 연주하며 시간을 보낼 테다. 겨우 달려 있던 브릿지를 펜치로 조심스레 뜯는다. 쉽게 뜯어질 줄 알았는데, 기타 몸통의 합판이 브릿지를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사랑니를 빼야 하는 치과 의사는 환자 이를 잡고 있는 잇몸을 칼로 찢어서라도 빼고 만다. 의사의 냉정함을 실현해본다. 펜치에 더 힘을 주면 기타 몸통이 상할 것을 알면서도 부드득 뜯어낸다. 떨어진 브릿지와 브릿지가 붙어 있던 몸통 부분을 사포로 매끄럽게 다듬는다. 미세한 나무가루가 사포질에 딸려 먼지 같이 베란다에서부터 거실까지 날린다. 뭔가 하고 있다는 기분, 이 자체가 좋다. 베란다 밖에는 20층짜리 아파트가 올라가고 있다.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나는 기타를 고치는 일을 한다. 우리는 동시에 자기 일을 하고 있다.         

 

브릿지에 목제용 하얀 접착제를 바른다. 접착제 묻은 브릿지를 곧장 몸통에 붙이지 않고 공기 중에 좀 두면 접착력이 더 높아져 단단하게 붙는단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엄지손가락을 접착제에 가볍게 두드려본다. 하얀 찐득한 접착제가 손가락에 묻어 피자 위 모차렐라 치즈처럼 주욱 늘어난다. 이 정도면 잘 붙겠다는 됐다는 직관이 든다.      


외과의사가 수술할 때 환부를 절제하며 이 정도면 됐다는 것도 직관적일 텐데, 중요한 결정일수록 직관에 의존하려는 경향이 있지 않나. 가끔 어떤 중요한 결정을 하는데 본인 직관을 따른다고 하는데, 명백한 증거가 없는 상황일수록 더 직관에 의존하게 될 텐데. 예를 들어 큰 병에 걸렸는데 의사가 결정한 어떤 처방에 그 처방을 신뢰할 수 있는 증거가 무엇인지 물어본다. 의사가 ‘제 직관입니다’이라고 한다면 그 의사에게 진료를 맡길 수 있을까. 목제 접착제가 다 말랐다는 걸 결정하는 것과 외과의사의 환부 수술 절제 부위 및 양을 결정하는 것은 사람 생명이 달려있다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만. 또는 한 회사의 중역의 결정에 직관에 따른 결과로, 그 회사의 사업 손실로 직원들이 실직할 수 있고, 연간 매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데. 어떠한 결정이든 다양한 요소를 고려해야 하는 게 합리적일 텐데, 중요하면 중요한 결정적인 순간일수록 그동안 해왔던 직관에 더욱 의존하려는 경향이 있어 보인다.      


매끄럽게 다듬은 기타 몸통에 브릿지를 살짝 올려놓는다. 베란다 화단에 있던 애기 머리만 한 돌을 몸통에 붙인 브릿지 위에 올려놓는다. 오후까지 이렇게 둘 테다. 몸통과 잘 붙어야 다시 6현의 장력을 견딜 테니. 기타 줄은 저녁에 달아야겠다.     


몇몇 회사에서 다른 직종 공채가 있어 지원해 놨다. 오늘 서류 결과 발표가 있어 찾아본다. 모두 불합격이다. 지원서를 쓸 때만 해도 내 경력이면 적합한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구비 서류가 복잡해서 준비하느라, 특히 사무실에선 흔한 스캐너가 집에는 없으니 스마트폰 어플로 일일이 사진 찍어 서류 만든다고 고생한 걸 생각하니 불합격 소식에 더 화가 난다. 나이 때문인가. 크게 기대하지 않았지만, 막상 거절당할 줄 알면서도 거절은 당하면 불편하고, 섭섭하고, 힘이 빠진다. 거절당할 일 앞으로 한두 번이 아닐 텐데, 익숙해져야 할 일인데, 거절당하는데 대한 두려움을 이겨야 하는데 쉽지가 않다. 연애도 마찬가지, 어차피 NO 할 여자인지 알고 고백하지만, 막상 NO 소리 들으면 눈물로 밤거릴 걷는다. 나는 거절감이 주는 스트레스가 과하면 졸음이 밀려와 자야 한다. 통기타 사포질에 나무가루 먼지를 온통 뒤집어썼지만 씻지도 않고 침대로 들어가 잠을 잔다.      


힘없을 때 고기를 먹어야 한다며 퇴근한 어머니는 근사한 돼지고기 수육을 저녁식사로 식탁에 올린다. 올 겨울 베란다에서 길렀다는 겨울 초무침도 함께 주신다. 겨울 초무침은 신선한 맛을 낸다. 어머니는 어찌 됐든 니가 가까이 있어서 좋다, 니가 있으니 식사를 같이 해서, 본인이 잘 챙겨 먹어 덕분에 소화가 된다며 좋아하신다. 어머니든 자식이든 혼자 살면 끼니 건너뛰기 십상이다.       


접착제를 붙여 돌을 올려놓은 브릿지가 튼튼하게 몸통에 붙은 것 같다. 새로운 6현의 기타 줄을 맨다. E, A, D, G, B, E 각 줄마다 제 소리를 내게 튜닝하고, 좌앙 E코드를 쳐본다. 괜찮나 브릿지를 보니 새 줄의 팽팽한 장력 때문에 브릿지가 붙은 부분의 몸통이 불룩 솟았다. 큰 문제는 없어 보이는데, 없다고 생각하고 싶은데, 접착 부분이 기타 줄의 장력을 지속해서 견딜 수 있을까. 일단 브릿지와 몸통 사이 2mm 정도 벌어진 틈에 목제 접착제를 칫솔에 치약 짜 넣듯이 쑤셔 넣는다. 처음부터 전문가에게 수리를 맡겼어야 했나 후회하다가, 어차피 치지도 않던 골동품 기타인데 소리만 내면 충분하다고 자체 수리의 기대치를 낮춘다. 일단 내일까지 살펴보고 생각처럼 소리를 내지 못하면 수리는 실패한 것이니, 전문 악기 수리점에 들고 가야겠다. 마침 기타 주인 동생에게 전화가 온다. 모처럼 고향집에 가서 뭐하냐기에 우리 어릴 때 세고비아 기타 고치고 있다니, 나중에 얼마짜리가 될지 모르겠군 하더라. 20여 년 전에 산 기타가 아직 몸통에서 나오는 소리가 들어줄만하다. 이미 동생과 나에게는 각자 새로 산 훨씬 좋은 브랜드의 기타가 있지만, 첫 기타라는 추억, 어머니의 선물, 또 열심히 배울 때 치던 악기라 다른 의미가 있다. 그래서 직접 내 손으로 수리해놨는데, 잘한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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