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창우 Jan 31. 2019

사색44. 테니스

4월 5일(토)

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테니스를 가르쳐 주셨다. 본인도 부산시장배 대항전 동배 3위 입상의 수준급이셨다. 적극적으로 전문 레슨도 받게 하셨다. 좋은 취미로부터 좋은 인간관계가 이뤄진다며 테니스를 장려하셨다. 나이가 들어 머리 커진 자식은 아버지와 의견을 함께 하기 어렵다. 조선일보 논설 같은 아버지와 뉴욕타임스 칼럼 같은 아들은 점점 소원해지기 마련이다. 서로 생각이 소원해질 부자 사이에 테니스가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복식 조를 이뤄 게임을 하거나, 매년 1월이면 텔레비전 앞에서 호주오픈 결승전을 함께 보면서 혈연 외 공통분모가 있다는 게 참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지금은 테니스는 있는데 아버지가 없다. 아버지 돌아가신 뒤 2년 동안 테니스 코트를 갈 용기가 나지 않더라. 아버지가 대학원 입학을 축하한다며 사주신 헤드 라켓을 잡을 수 없더라. 그와 호흡을 맞추던 동네 클레이 코트에 들어서기만 해도 펑펑 울어버릴 것 같다.      


“형님, 테니스 치러 가자”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부산 집에서 테니스란 단어를 입 밖으로 꺼낸 지 오래됐다. 합의하지 않았지만 어머니와 나의 금기어가 됐다. 그와 연관된 무엇이 나오면 슬퍼질 것 같아서, 특히 테니스는 아버지의 대명사 같아서. 근데 동생은, 아니 동생스럽게 테니스를 치자고, 도저히 발걸음을 뗄 수 없던 아버지 가시던 클럽 코트로 가잔다. 동생은 국민학교에서 표창장을 받아와선 다음날 아침 학교 가려고 가방 정리하면서 상장받은 게 생각났다고 부모님께 꺼내 주던 소새끼 같다는 소릴 듣던 놈이다. 둔감해서 그런가, 의아하다. 어찌 거길 갈 수가 있니, 너 둔감해서 그러니, 조심스러운 나의 질문에, 동생은 아버지를 더 추억하고 그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으로 가서 더 아버지를 누리자며, 창고 깊숙이 넣어뒀던 아버지 테니스 가방을 꺼낸다. 내겐 없는 용기, 동생의 시각으로 하지 못할 선택을 이행한다. 아버지 쓰시던 라켓을 붕붕 휘둘러보며 오늘은 이걸로 치겠단다. 그리움에 겁나 아버지 라켓 그립을 만지지도 못했는데, 붕붕 서브 궤적을 그리며 어깨를 푼다. 아버지가 그리던 궤적과 무차별하다. 나가려는 데 집에 새 테니스공이 없다. 공 사러 가야겠다고 하니, 어머니는 집에 새 테니스공이 없다니 아버지 안 계신 게 맞구나 하신다.       


아버지 가시던 코트에선 우리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다. 함께 공치던 아버지와 우리를 기억하고, 반갑다며 오랜만이라고 인사가 건너온다. 몇몇은 아버지 소식을 들었다며 정중하게 인사한다. 2년이나 흘러 이제야 늦은 조문을 받는다. 아버지의 부재가 당시 클럽에서 화제가 됐지만 우리를 마주해서야 처음으로 슬픔을 얼굴에 머금고 조문을 한다. 2년이 흘렀지만 우리도 처음인 것처럼 그들의 표정에 슬픈 표정으로 응대해야 한다. 애써 슬픔을 극복해왔는데 다시 슬픈 처세를 해야 하니, 그래서 내가 여기를 오지 않으려 했다. 이어지는 조문에 지쳐, 짜증 나기 시작하는데, 한편 정중한 태도로 건네는 위로가 계속되니 감사로 승화되기도 한다. 늦은 조문을 다 마치고, 아버지와 함께 테니스를 치던 분들과 게임을 한다. 다들 노년이지만 구력이 오래된 분들이라 만만찮다. 동생과 내가 복식조를 이뤄 어른 두 분에 상대로 게임을 시작한다. 그분들도 아버지의 공이 그리운지, 한 볼 한 볼 정성을 다해 네트를 넘긴다. 테니스, 동생과 나에겐 유산 같은 거다. 나는 그 유산을 잠시 미뤄뒀는데 동생 덕분에 다시 찾았다.      


저녁에는 어머니와 온천천 길을 걷는다. 하류로 흘러가는 강 따라 불어오는 찬바람을 맞으며 걷는 게 힘이 부친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함께 노후 계획을 해놨단다. 3년 전 내가 대학원을 졸업하고 취직하면 이제 두 분이서 노후를 어떻게 보낼지 상의했다고. 막상 아버지가 갑자기 암 진단을 받고 항암 중에 돌아가실 줄은 서로 몰랐다며, 인간 생사에 비해 사람의 계획이 얼마나 무용한 가 싶더란다. 그게 허무함까지 이어져 어머니는 이제 미래에 대해 아무런 기대하지 않고 하루를 허무하게 보내고 있단다. 인생이 허무하다시니, 나도 이번에 짤린 직종에서 사명을 갖고 일했는데 해고라는 말도 안 되는 실직 상황이 일어났다고, 실직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고, 지금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사실 잘 모르겠다고 허무하다고 대답한다. 어머니는 이럴 때 네 아빠 같으면 “그냥, 애가 스스로 해답을 얻도록 좀 내버려둬”라고 했을 거란다. 어머니는 지금 구직이 아니라 장가를 가야 하는데, 다시 구직하는 처지가 돼 안타깝단다. 결혼, 구직, 이런 게 굉장히 인간 사적인 영역이다. 말 그대로 인사(人事)인데, 이런 인사에 신의 간섭, 계획이 있을까. 신앙인으로선 인사에 신사(神事)를 기대하고, 그러도록 모색해야 할 텐데. 아니, 그냥 그렇고 그런 일에 나만 유별나게 하나님이 내 인생을 이끈다고 호들갑 떨 필요 없는, 남들 다 겪는 그렇고 그런 일인지도 모르겠다.      


내일은 아버지의 두 번째 추도예배를 드린다. 슬픈가? 아버지의 부재가 익숙하기도, 슬프기도 하다. 무엇보다 그의 역할이 그립다. 세월이 흐르면 이미지는 기억해내도 목소리는 잘 기억나지 않게 된다. 아버지 목소리가 듣고 싶다. 내일 다 같이 아버지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생전에 녹화해둔 영상을 틀어봐야겠다. 고향집 컴퓨터 어딘가 폴더에 있을 게다. 

매거진의 이전글 사색43. 역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