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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창우 Mar 26. 2019

사색53. 40일을 넘길 줄은

4월 14일(월)

40일, 성경의 예수는 한 달 하고 10일 동안 금식, 수련을 했다. 어떤 상관인지 모르겠지만, 갑작스러운 실직이 40일 정도 지나면 끝나고, 재취업을 할 수 있을 거라, 이 사색이라는 거창한 제목의 기록도 40회 즈음이면 끝날 것이라 예상했다. 이젠 40회보다 훌쩍 넘은 53회 차, 이걸 이렇게 오래 쓰게 될 줄, 설마 100회도 될 수 있다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다.      


실직자의 하루를 마냥 흘러 보내기보다 삶을 돌아보며 점검을 하는데 도움되지 않을까 해서 기록을 시작했다. 나를 살펴보는 기록, 그런데 실직이 당장 본인, 가구의 생계와 직결하는 사람에겐 이 시점을 굳이 기록하려는 행태가 사치스러워 보이지 않을까. 나야 당분간 홀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약간의 저축이, 휴식을 제공하는 고향집 어머니가, 은근히 든든한 실업급여가 있으니, 실직이란 소재를 가지고 깊은 의미를 곱씹을 수 있을까. 여하튼 충실한 기록, 실직에 대한 보편적 공감을 얻기보다 나의 사례에 집중하고, 나중의 내가 반추할 수 있도록 이 기록을 남겨야 하지 않을까. 실직이라는 하나의 표현으로 집합하지만, 과연 실직기간을 대응하는 각 실직자의 사례와 시간은 보편적일까? 다양할까?      


예전에 목사님이 아프리카 선교를 갔는데, 말라리아에 걸려 이틀을 심하게 앓았단다. 이틀 동안 아픈 경험으로 아프리카인들의 말라리아에 대한 공포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겠더란다. 한편,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던 그 공포를 자기는 몇 달러 주고 약 사 먹고 쉬면 나을 수 있는, 극복할 수 있는데, 아프리카 사람들의 삶에서 말라리아는, 몇 달러돈이 없어 자신의 동생, 가족을 순식간에 죽여 버리는 공포 자체란다. 결국, 그는 자기도 말라리아 걸려봐서 그 공포 안다고,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그 아픔을 나도 이해하고 있다고 말할 수가 없더란다. 오히려 자기는 약 먹고 이틀 쉬고 나은 게 미안해서. 


같은 처지가 되면 그 처지를 이해할 수 있다는데, 처지도 레벨이 다양하다. 실업, 실직도 여러 차원이다. 그렇다면 실직 중 사색이라는 내 사색도 한 부분만을 이야기하고, 보편적이지 못하다. 따라서 이 기록의 효용은, 나 이외에 타인의 공감을 기대한다면 한정적이다. 한 개인의 실직으로부터 보편을 이야기 하긴 어려우니 나의 한 사례로 실직기간의 시간을 메워야 한다. 노동조합 대표가 크레인 꼭대기에 올라가거나, 공장 탑에 올라가서 협상을 벌이는 게 보편적인 실직에 대응하는 모습인지. 얼마나 길어질 줄 모르는 시간, 이 기록의 시도를 유지하련다.      


구약 성경 창세기, 아브라함의 생, 마지막 일은 외아들 이삭의 배우자감을 찾는 것이다. 배우자를 찾는 것과 직업을 찾는 건 어떤 면에서 비슷한 점이 있다. 먼저 직업에도 소득, 돈벌이 이상의 목적이 있어야 하듯, 배우자를 선택하는 것도 인간적인 계산뿐만 아니라 인간관계 이상의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둘째, 하루에 많은 시간을 함께 한다. 장기적으로는 인생 대부분을 함께 한다. 셋째, 직장에선 자신의 성과를 만들어, 그걸 ‘이거 내 새끼인데’하며 자식 다루듯 한다. 부부간에는 말 그대로 자식을 낳는다. 넷째, 재취업은 직장과 나의 새로운 관계를 세워야 한다. 앞선 직장에서 해고된 이유가 다음 직장에서도 일어나선 안 되고, 설령 같은 사유로 실직이 반복한다면 그 직종과 내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러셀 크로우가 구약성경 창세기의 노아로 연기한 영화 <노아>에서 노아의 둘째 아들 함은 아버지에게 매일 “내 아내감은요?”, “제 여자는요?” 하며 결혼 자체에 대한 고민보다 자신의 아내감, 자기 여자를, 찾아달라는 모습만 보인다. 나도 이번 재취업에서 소득 추구 차원뿐만 아니라 소명을 찾아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취업이라는 성과를 대부분 ‘운이 좋았다’고 표현한다. 어떤 신적 작용, 누군가가 나에게만 이 기회를 주는 건가 할 정도로 우연의 요소가 있다. 직장을 찾는데 신적 요소를 인정한다면 꾸준한 믿음, 신앙생활 방식을 유지하고, 교회뿐만 아니라 직장, 회사 필드에서도 신성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그냥 이번에 보는 지원서로 다시 취업했으면 좋겠다. 슬슬 인내심에 한계가 온다.      


실업이 개인에게는 어떤 시련일까. 시련의 농도에 대해서는 구분할 수 있지만, 개인 차원에서는 그 개인이 시련이라고 느끼는 모든 게 시련이다. 앞서 실직이라는 시련으로 자기를 점검할 수 있는 차원이 있다면, 자기 자신을 점검하거나, 타인과 관계, 직종(직무)과 연관성을 점검할 수 있는 기회다. 따라서 점검의 기회를 얻는 것으로 감사해야 할 텐데, 사실은 그렇진 못하다. 결론적으로 실직 중에 일어나는 고민과 모색은 직장 혹 더 좋은 직장으로 갈 수 있다, 신께서 좋은 직장을 반드시 주실 것이다 는 반대급부를 기대하는 보상 심리로 채우기 바쁘다. 반대급부를 제외하고 ‘점검’ 자체에 집중해야겠지만 사람이 어찌 그렇기만 하겠나. 재취업을 기도할 때 ‘다시 직장에 가면 앞으로 이러이러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로 끝나야겠지만, 그러니까 이런 일자리를 다시 주세요 ‘라고 요구하는 게 훨씬 자연스럽다. 실직에서 재취업을 제외하고, 나 자체만을 점검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한편, 직업을 내가 찾는 것일까. 직업이 나를 찾는 것일까. 지원서를 수십, 수백 장 내지만 면접을 불러주는 곳은 몇 군데, 결국 출근하게 되는 곳은 한 군데. 그렇다면 한 군데 회사가, 그 직업이 나를 찾은 거지 내가 그 회사를, 그 직업을 찾았다 할 수 있나.      


'고기'가 먹고 싶다는 말에 어머니는 저녁 식사로 근사한 돼지고기 수육을 내놓으신다. 즐겁다. 뭘 먹고 싶다면 뚝딱 나오는 고향집, 어머니의 탁월한 요리 실력을 즐기는 건 행복하다. 어머니 역시 모처럼 집에 사람이 있어서 뭘 해줄 수 있는 게 즐겁단다. ‘실직’이라는 이슈만 제외하면 이보다 더 행복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그 이슈가 중력 같아 제외할 수 없다. 그래서 행복한데도 행복하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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