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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창우 Mar 26. 2019

사색 54. 간극의 편차

4월 15일(화)

실업급여를 신청한다. 이게 실직과 동시에 자동으로 나오는 게 아니라 ‘나 이렇고 저렇게 해서 짤렸소’하고 관할 고용노동센터에 직접 가서 신고해야 한다. 나는 지금 부산에 있어 주소 등록지인 서울 고용노동센터에 신고할 수 없다. 나중에 주소지가 있는 서울에 가서 신고해야 한다. 프랑스 영화에서나 보던 실업급여받으러 길게 줄 선 사람들 장면, 그 속에 있는 내 모습이 펼쳐질 것이다.     

 

어제 하루 종일 집에 있어 오늘은 해운대 가야겠다 마음먹었는데, 막상 오늘이 되니 나갈까 말까 귀차니즘, 나가면 뭐하나 무력감에 지배당한다. 오전을 지배당하다가, 창밖의 화창한 날씨가 밖으로 이끌어낸다. 화창한 햇빛이 눅눅한 수건을 말리 듯, 구깃구깃한 내 마음도 바짝 말리고 싶다. 해운대 시장으로 가서 손칼국수 한 그릇을 먹는다. 요즘 텔레비전에 나오는 해운대는 동백섬 쪽으로 들어선 고층 주상복합 아파트 단지도 근사하게 보인다. 동네 이름도 센텀시티, ‘센텀’이란 말이 무슨 의미인지, 정확한 영어인지 궁금하다. 내 기억의 해운대는 지금 해운대 시장 정도로 기억하는데. 텔레비전에 나오는 요즘 해운대 모습은 나도 저게 해운대 맞나 어색하다. 딱 해운대(센텀시티)에서만 놀다 온 서울 친구들은 부산 완전 좋다며 칭찬 일색이다. 과연 부산 사람들이 지금 해운대의 부동산을 실제 소유할 수 있는 부자가 몇 퍼센트나 있는지, 부산에서 제일 부자들이 모여서 한 블럭 부촌을 형성한 것인지 모르겠다. 옛 이미지에 고정돼 관념으로 대응하는 내가 바뀌어야 할 부분도 있다. 예전에 서울에서 놀러 온 친구들과 광안대교를 건너면서 바라본 광안리를 홍콩 같다 하더라. 재각각의 설계로 건축한 건축물들의 비일관성을 홍콩의 우후죽순 같은 빌딩촌 모습을 연상케 한단다. 어떤 기준에 의해 지역성을 대표할 것이며, 그것 역시 그 지역의 진짜 모습이라고 정의할 수도 없지 않나. 도시는 짧은 기간에 얼마나 많은 파괴와 재건축이 일어나나. 테세우스의 배와 같이, 배의 모든 부분이 교체되었더라도 그 배는 여전히 ‘바로 그 배’인가?처럼, 부산의 모든 건물이 하나씩 재건축돼 나중에 모든 건물이 다 재건축된 건물이면 그 부산을 이전의 부산과 같다고 할 수 있나.      


해운대 모래사장, 적당한 봄볕, 찬 기운이 사라진 온화한 바람을 맞는다. 백사장으로 밀려오는 파도 끝, 40×60cm 휴대용 의자를 펼쳐 앉는다. 애용하는 위치는 파라다이스 호텔 앞, 인명구조대 초소 9번과 10번 사이다. 몇몇 외국인은 벌써 비키니, 트렁크 수영복 차림으로 일광욕을 하고 있다. 지금 해가 좋긴 하지만 4월인데 춥지도 않나. 북유럽 같이 추운 곳에서 살아 이 정도는 비키니 입을 만하다는 건가. 멜번 호주에 잠시 있을 때 옆방에 사는 루스 Ruth라는 동갑내기 영국 여자는 해만 뜨면 딱 비키니 입고 마당에 누워 선탠을 했다. 공손하던 옆집 처녀가 훌렁 벗고 있는 모습에 깜짝 놀라다가, 이야기를 들어보니 루스는 호주에 선탠 하러 왔단다. 영국에선 좋은 햇살 보기 어렵다며 해 찾으러 호주 여행을 선택했단다. 나중에 나도 웃통을 까고 루스랑 같이 누워 햇살을 즐기게 됐다. 햇살을 맞으며 루스에게 배운 shithead 카드 게임은 아직도 기억하는데, 오늘 해운대 햇살을 보니 그때 루스가 그립다.       


근사한 햇빛을 조명삼아, 파도소리를 음악 삼아 책 읽을까 하다 만날 읽는 책, 오늘은 여기서 바다만 감상해야겠다. 출렁이는 파도를 한참 보고 있으니 내 인생에서 실직도 이 정도 파도가 아닐까. 출렁출렁, 해운대 바다에 파도가 없는 날 있나, 출렁출렁. 내 인생에 앞으로는 이런저런 파도가 없겠나, 출렁출렁. 바람 많은 날 치는 파도는 정말 겁나는데, 오늘 딱 이 정도, 딱 이 정도 파도는 충분히 견디고 넘고 갈 수 있지 않을까. 겨울 실직 한번 당한 것 가지고 인생 망한 듯 기죽어, 졸아 있을 필요 있나. 항해 중 태풍을 만나 높은 파도를 직면하면, 유능한 선장은 파고가 낮은 파도 끝을 찾지 않는다. 파도 정중앙으로 배를 몰아 파도 정중앙을 배 선두로, 정면으로 가로지르는 게 파도를 넘을, 견딜 수 있는 가장 높은 확률을 만들어낸다. 가장 위험하지만 가장 높은 확률, 높은 파도일수록 정중앙, 말은 쉬워도 유람선 타다 조금이라도 높은 파도 만나보면 덜덜 겁이 난다. 실직이라는 파도의 끝을 찾다가 정중앙으로 키를 틀어본다. 실직과 마주해보자.     


신세계백화점 센텀시티점으로 나선다. 버스를 기다린다. 스마트폰으로 기다림을 때운다. 조그만 화면에 한창 빠져있다 고개를 들어보니 눈앞에 타고 가야 할 버스가 지나간다. 드문드문 있는 버스라 이걸 놓치면 또 기다려야 한다. 후다닥 일어나 달린다. 아니, 달리지도 못하고 두 발자국 째 철퍼덕 넘어진다. 넘어졌는데도, 버스는 놓칠 수 없다고, 지금까지 기다려왔는데, 안 그래도 기다리는 인생인데, 기다리는 거 진절머리 쳐진다고, 기다리기 싫어하고 벌떡 일어나 달린다. 기사는 백미러로 꼬꾸라진 나를 봤는지, ‘괜찮아요?’하더라. 부끄러워서 대답도 못하고, 제일 뒷자리로 가서 앉는다. 자리에 앉아 추슬러보니, 양쪽 손바닥에 돌이 박혀 있고, 오른쪽 무릎도 깨진 것 같다. 청바지를 입어 바지를 걷어 올릴 수가 없지만 지끈 거리는 아픔과 동시에 액체가 스멀스멀 내 무릎에서 종아리로, 발목으로 흐르는 걸 느낀다. 그런데, 두둥, 스마트폰 전면 유리에 굵고 긴 스크래치가 났다. 몸 아픈 것보다 스마트폰 스크래치를 보니 더 화가 난다. 회사 짤린 것도 억울한데 버스 타려다 넘어지고, 왜 이런 일이 자꾸 생길까 억울한 생각이 착착 쌓였다가 화산처럼 폭발할 것 같은데, 지금이 그럴 땐데 사실은 내가 한눈팔다가 발을 헛디뎌 땅바닥에 넘어져, 본능적으로 손을 내밀어 다친 것이다. 마침 손에는 스마트폰이 있어서 액정에 아스팔트 길에 긁혀 스크래치 난 것이다. 이런 생각도 드니 분노가 일어나지 않고 넘어진 사간에 대해선 중립적으로 이해한다. 이젠 화를 내는 것도 귀찮아 포기한 건지. 아니면 분노를 다스릴 수 있는 내공이 특별히 생긴 건지. 무엇보다 화를 낼, 탓을 할 대상이 없었던 걸까? 내가 넘어진 것이니.     


동아시아에서 제일 크다는 백화점 으리으리한 화장실에서 다친 손을 씻고, 바지를 벗고 무릎을 살핀다. 만인에게 공개된 백화점 화장실이 5성급 호텔 수준이다. 중산층은 평소 누리도 못하는 소비를 차곡차곡 쌓아서 일 년에 한두 번 백화점이나 공항 면세점에서 소비하며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카타르시스가 배설한다는 데 어원이라는 데, 정말 백화점에 가면 으리으리한 화장실에서 배설할 수 있다. 무릎의 핏기를 닦아내고, 백화점 구경을 시작한다. 사려는 소비 의욕이 없으니 백화점 구경만큼 무료한 게 없다. 돈 벌 땐 월급날 맞춘 쇼핑이 익사이팅하더니, 소득이 없는데, 만약 쇼핑하고 싶다면 무소득과 지출의 간극은 신용카드로 메울 수 있다. 그런데 카드 값은 간극을 두고 날아온다.      


3층인가, 또 책 보러, 교보문고로 향한다. 집에서도 책, 백화점에서도 책 구경한다. 한심하다. 장하성 <온도계의 철학>을 뒤적거린다. 아마 과학적 표준화 과정에 기준에 대한 여러 논의를 담은 서적인데 모처럼 철학 책을 읽고 싶어 염두에 뒀던 이 책 한 권 사려 왔는데, 견물생심이라 구경하다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개입한 정황을 묘사한, 당시 의사결정을 회의적인 시각으로 바라본 데이비드 헬버스템의 <최고의 인재들>이라는 비싸고 두꺼운 책도 산다. 지금 소득도 없는 데 책을 산다는 게, 빌려 읽으면 되지, 멍청하고 비합리적인 지출이다. 소비 행태란 게 늘 충동적이지만, 내 경우는 서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지출하는 것은 가치를 둔다는 결정이지만 책을 여러 권 사놓고 사실 전부 읽은 적도 없다. 한 20만 원 치 사서 10만 원 정도 읽으면 좋은 기록이다. 산다는 게 과연 어떤 기쁨이 있을까 책 같은 경우 소비 그 자체의 행위로 만족하는 듯하다. 다른데도 아니고  책 사는 데 꽤 돈 쓰는 사람이야 라는 지적 자위 같은. 신문에서 어떤 영화배우가 정신에도 투자해야 한다며 1년에 책값이 500만 원 넘게 지출한다고 인터뷰했다. 책 한 권이 1만 원이라 한다면 1년에 500권, 한 달에 41권, 매일 하루 1.4권의 책을 읽는다는 건데 이건 말이 안 된다. 다시 말하면, 책에 쓸 돈이 많다는, 소득이 높아 책 사는데 예산 제약이 없는 사치스러운 행태를 말하는 것이다.      


피곤했나, 집으로 돌아와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아, 새로 산 <최고의 인재들>을 읽으며 반신욕을 한다. 아버지께선 여름철 베란다에 앉아 어머니께서 해주신 시원한 열무 국수를 저녁으로 드시며 "행복이 별거냐, 이런 게 행복이지"하며 소박한 행복론을 펼치셨다. 당시 나는 광야를 달려야 할 말이 마구간에서 만족하는 듯한 소리라 실망했지만, 지금 고향집에서 반신욕 하며 좋아하는 책을 읽고 있는 게 가장 행복하다는 걸, 이제사 아버지의 행복론에 공감한다.      


슬슬 지원서를 넣은 곳에서 심사 발표가 난다. 몇 군데는 이미 채용이 완료했다. 특히 한 곳의 채용 완료 소식은 굉장히 아쉽다. 내 경력과 딱 어울리고, 경력 포트폴리오 및 사업계획서도 굉장히 애를 써서 작성해 부쳤는데, 면접 한번 못 보고 채용이 마감했다. 지원서를 작성하면서 여기에서 일하게 되려고 짤렸나, 작위적인 우연을 상상했는데. 여하튼 취업에 대한 내 생각과 인생의 소명을 지침 하는 신의 생각, 이 둘의 차이가 많이 나나보다. 취직이라는 우연을 관장하는 신의 생각에 절대로 복종해야겠지만, 내가 그리고 있는 재취업의 기대와 이를 구현해줄 신의 계획, 이 간극을 어떻게 줄일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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