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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cony Review Feb 04. 2021

와이프를 기억하며

오늘 와이프의 첫 기일이다. 나름 잘 지내왔는데 오늘은 좀 다르다. 와이프를 기억하며 와이프의 일기의 몇 문구를 기록한다. 글 참 잘쓴다.


2018년 1월

내가 무슨 성인이라서가 아니라,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 가족 중 아픈 사람이 나라서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얼마전 남편하고도 얘기해봤다. 오빠는 다른 사람 돌보기를 잘 하니까 보호자의 역할을 주셨고, 나는

참고 견디는 걸 잘 하니까 환자 역할을 주셨나보다고. 우리 아들은 사람들 웃기는 걸 잘하니까 온 가족의

비타민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사랑하는 우리 가족... 하나님 올 한해 저희 가족 꼭 붙들어 지켜주세요.


2018년 5월 21일

하늘이 두 번 눈앞에서 무너지고 이제 웬만한 일에는 담담해졌다. 담담해진다는 건 무슨 뜻일까? 죽

을 것같이 억울하다 외치던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다. 속도는 달라도 우리는 모두 한 방향으로 향하고 있음

을 깨닫고, 무섭게 피어나는 꽃과 새싹을 보며 분열하는 세포의 서늘함을 느낀다. 지난주 내내 내린 비를 맞

고 무시무시하게 자란 나뭇잎을 바라보며 커피 한 잔 하는 오늘이 소중하고, 볕좋은날 아들과 나뭇가지를

나눠들고 풀숲에서 숨바꼭질 삼매경에 빠지는 그 오후를 사무치게 사랑한다...

이렇게 한두 계절 더 살고 싶은 마음. 하지만 그만큼 가족들에게 드는 미안함. 통증이 오고 몸이 생각

처럼 움직여지지 않을때에 대한 두려움...

오늘, 지금 이 순간의 소중함. 이틀 전 마음먹고 한 눈썹문신의 앞머리가 조금 옅어져 자리를 잡아가

는 것 같아 좋다. 어제 저녁엔 변기에 앉아 혼자 큰일을 보던아들이 이렇게 외쳤다. “나두 털이 나고있어!

아빠가 되려나봐! 할아버지가 되려나봐!”


2018년 10월 10일

큰 일 없이 중년을 맞이하는 것이 너무나 큰 축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손가락 열개 갖추고 태어나 무

사히 청년이 되고, 또 부모가 되고, 어느새 중년과 노년을 거쳐 사그러져가는 과정 - 오랜 시간동안 세포 하

나하나가 묵묵히 제 할일을 잊지않고 해내는 일 - 이 모든 게 기적이 아니면 무엇일까.


2019년 1월 9일

지독한 짝사랑이 이런 느낌일까? 내려놓자, 포기하자, 싶다가도 눈부신 햇살, 파란 하늘, 그리고 사랑

하는 가족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 다짐이 단번에 무너져내린다. 삶이 보내주는 눈빛 한 번에, 미소 하나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져내리는 나.

스스로 삶을 놓아버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열심히 그려보곤 한다. 그러면 조금 더 쉽게 미련없이 죽음

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싶어서. 하지만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삶은 여전히 눈부시게 아름답다.


2019년 2월 4일

책장에 꽂힌 책을 하나하나 들여다보고 있으면 각 책마다 그 책을 읽던 장소와 온도, 습도, 그 때의 마

음상태가 떠오른다. 선항암 중 그래, 몇달만 나죽었네 하고 그동안 읽고싶었던 책과 보고싶던 TV를 마음껏

보자, 하며 보내던 시기에는 오직 두 사람, 비행운, 바깥은 여름 같은 국내 단편들을 많이 사서 읽었지. 책을

많이 사들여서 아직도 안읽은 책이 많이 남아있는데... 지금 내 마음상태는 그 책들을 고를때와는 많이 멀어

졌기에 다시 펼쳐볼지는 잘 모르겠다.


2019년 5월 13일

아들은 요즘 왜 네번째 손가락을 접으려고 하면 다른 손가락도 같이 접히려 하는지가 궁금하다. 네

번째 손가락은 가장 약한 손가락이고, 손가락 뼈들이 서로 모두 연결되어 있어서 라고 얼렁뚱땅 넘어간 게

벌써 세네번은 된 것 같은데, 나도 정답이 궁금하다.


2019년 6월 24일

1년만에 온 강원도 여행... 아들은 많이 자랐고 나는 체력이 눈에띄게 약해졌고 오빠는 많이 지쳤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하늘과 공기, 바람과 풍경 앞에서 기도했다. 하나님 어쩜 이토록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시고 제 눈으로 알게 하시더니 이렇게 일찍 이별하게 하시는지요, 라고 속으로 외치고 숙소로 돌아왔다.


2019년 7월 17일

신은 진흙을 창조했습니다.

그러나 외로웠습니다.

그래서 신은 진흙 덩어리에게 말했습니다. “일어나라.”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언덕과 바다와 하늘과 별, 내가 빚은 모든 것을 보라.”

한때 진흙이었던 나는 이제 일어나 주위를 둘러봅니다.

운 좋은 나 그리고 운 좋은 진흙.

진흙인 나는 일어서서 신이 만든 멋진 풍경들을 바라봅니다.

위대한 신이시여!

오직 당신이기에 가능한 일. 결코 나는 할 수 없는 일.

당신 앞에서 나는 그저 초라한 존재일 뿐입니다.

그나마 조금이라도 내가 소중하게 느껴지는 유일한 순간은,

아직 일어나 주변을 둘러볼 기회를 갖지 못한 다른 모든 진흙들을 떠올릴 때.

나는 너무나 많은 것을 얻었지만, 진흙들 대부분 그러지 못했습니다.

이 영광에 감사드릴 뿐.

진흙은 이제 다시 누워 잠을 청합니다.

진흙에게 어떤 기억이 있을까요.

내가 만나봤던, 일어서 돌아다니던 다양한 진흙들은 얼마나 놀라운지.

나는 내가 만났던 그 모든 것들을 사랑합니다.

- Kurt Vonnegut


2019년 9월 5일

이번 항암은 2년전 빨간약과 같은 계열이라 역시 새벽에 갑자기 눈이 떠지며 정신이 말똥말똥해지곤

한다. 그저께 밤에는 캄캄한 새벽에 눈을 떴는데 창밖에선 귀뚜라미 소리가 들려오고, 오빠는 옆에서 가끔

뒤척이고 있는 모습을 보며 ‘삶’이라는 게 새삼스럽게 와닿았다. 친구는 이렇게 새벽에 깨는 것이 하나님

이 이야기하자고 부르시는 거라 말해주었다. 그래서 어젯밤 눈을 떴을때는 두손잡고 기도를 드렸다. 가족들

이 지치지 않게 도와주시고, 무거운 짐을 함께 지어 주십사 하는 기도.


2019년 11월 14일

일주일만에 몸을 일으켜 집밖으로 나오니 찬바람이 불고 하늘은 구름없이 파랗고 이미 반쯤 떨구어

낸 나뭇잎들이 햇빛에 반짝이고 있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커피빈을 향해 걷다가 밀려오는 기침에 지나던

건물 앞 화단에 앉아 숨을 고르고, 보다 가까운 커피숍에 들어와 밀크티를 시켰다. 그래도 여기까지 걸어온

게 장하다.


2019년 12월 26일

분수라는 개념을 처음 배울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엄마가 옆에서 가르쳐 주었던 것 같은데...

“10을 1이라고 생각해봐.” “10은 10인데 어떻게 1이라고 생각해?”의 무한루프에 빠져서는, 누가봐도 명

백히 다른 숫자를 어떻게 같다고 생각하라는건지... 초등학생의 머리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차원이었다.

분수도 소수점도 잘 알고있는 지금,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개념이 있다. 현실과 희망. 2019년 크리스

마스인 어제, 오빠는 나에게 현실과 희망을 분리해서 생각해보라고 했다. 현실적으로는 우리가 내년 크리스

마스를 함께 보내기 힘들겠지만 (현실), 그래도 보냈으면 좋겠다 (희망)! 라고. “오빠, 나는 도무지 그게 분리

가 안돼...”라고 내가 대답했다. 4기 진단을 받고 2년째 나를 가장 괴롭히는 생각이 바로 현실과 희망 사이

에서의 줄타기다.


와이프를 기억하며...


2021.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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