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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vid Jun 29. 2023

서울대 병원만 75번째

 하지에 맞춰 찾아온 폭염이 대지를 달구며 사람들의 기운을 앗아가는가 싶더니, 비구름이 천둥과 번개를 동반하며 한껏 저항한다. 그리고 찾아온 잠시의 휴전 상태. 똑똑 떨어지는 빗방울과 잔뜩 흐린 하늘,  머리칼을 휘날리는 강한 바람이 부는 것을 보니 비구름이 쉽게 물러가지 않으려나 보다. 남부 지방에는 이미 많은 비가 내렸고, 수도권도 소나기가 내릴 확률이 있단다. 오전 진료를 위해서는 새벽 첫 버스를 타야 여유 있게 병원에 도착하지만 혹시나 생길지 모를 교통사고가 두려워 기차를 예매했다.


 기차는 버스보다 시간도 훨씬 많이 걸리고 비싸지만 난 기차 여행을 즐긴다. 그동안 버스를 탔던 것은 코로나 감염 확률을 줄이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 결코 자의가 아니었다. 이미 코로나에 두 번이나 걸렸고, 내 몸이 코로나를 이겨내기에 충분하다고 입증됐기에 그 후로는 되도록 기차를 타고 서울 병원에 갔다.


 지방 중소도시라 그런지 7시 이전에는 시내버스가 다니지 않기에 카카오 택시를 불러 기차역에 간다. 기차역에 가도 사람은 거의 없고, 그제야 출근한 듯 보이는 토스트 가게 사장님은 분주히 하루 장사를 준비한다. 기차 시간이 다 되어 토스트는 포기하고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주문한다. 6월에 따뜻한 아메리카노라니...


 컵 홀더의 온기를 느끼며 커피를 후후 불어가며 식기를 기다렸지만 플랫폼으로 기차가 먼저 들어온다. 경적을 울리며 속도를 줄이는 기차를 보자 초등학교 때 단골문제로 나왔던 산수 문제가 떠오른다.

 

 길이가 100미터인 기차가 시속 100m/s로 움직일 때 길이 100미터인 터널을 통과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난 이런 류의 문제를 정말 잘 풀었다. 때로는 우쭐하기도 했다. 하지만 삶을 사는 데 있어 내가 기차 문제를 얼마나 잘 푸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기차 운영하는 회사에서 특별히 우대해 주지도 않았다. 남들과 똑같이 코레일 앱으로 예매를 하고 똑같은 비용을 지불한다.


 억울한 마음에 기차서의 시간을 남들보다 더욱 오롯이 즐긴다. 차창 밖에서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과 이어폰에서 들려오는 음악은 글을 쓰든 책을 읽든 즐거운 맘으로 몰입할 수 있게 도와준다. 버스 여행보다 기차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이다.


 나는 요즘 계속 실패하고 있다. 작년 10월 공모전에 입상한 이후로 글을 쓰는 족족 '미채택'이나 '불합격' 통보를 받고 있다. 대체 어떤 주제로 글을 써야 재미도 있고 의미도 있는 글을 쓸 수 있나 고민하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하나 떠올렸다.


 '서울대병원만 99번째'

 첫 키스만 50번째라는 영화를 패러디한 것은 안 비밀.

 이제는 서울대병원 내부 구조가 10년 넘게 다닌 회사만큼이나 익숙해졌다. 병원 간 횟수를 세어 보니 얼추 100회가 다돼 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암 진단을 위해 3번, 방사신+항암 치료에 30번, 임상실험 30회, 이비인 후과 진료 2회, 방사선과 진료 2회, 갑상선내과 진료 6회, 그 외에도 검사를 위해 몇 번 병원에 갔으니 얼추 75회 정도는 된다.


 이제는 암에 걸렸을 때 느낌이 어땠는지, 치료를 어떻게 받았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술을 절대 마시지 않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시간을 줄였으며, 운동을 규칙적으로 하려 하고 흥분하거나 화내려 하지 않는다. 책을 많이 읽으려 하고 멋진 글을 쓰고 싶어 하며 예전처럼 늘 멋진 미래를 꿈꾼다.


 이제는 처음처럼 암 크기가 얼마나 작아졌는지, 암이 재발한 건지 불안해하지 않는다. 그냥 생각하지 않는다. 문제가 생기면 그때 대처하면 그만이라 생각하는 습관이 들어서일까? 아무튼 생각을, 정확히는 걱정을 안 하니 훨씬 더 삶이 편안하고 여유롭다.


 오늘은 임상 간호사 선생님과 잡담을 했다. 1년 넘게 보다 보니 편안한 면도 좀 있다. 간호사 선생님도 의사 선생님도 지난번 영상 결과에 문제가 없단다.


 그렇게 75번째 병원 방문도 무사히 마쳤다. 100번이 되기 전에 에세이를 써야겠다.  그때까지도 무탈하기를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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