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걸린 아재의 육아 일기(4)
스트레스
암 발생의 주요 원인 중 하나이다. 적당한 스트레스야 삶의 활력소이지만 예민한 사람들이 느끼는 과도한 스트레스는 면역력을 떨어뜨려 건강을 해치고 삶의 만족도를 낮춘다. 어떻게 하면 안 받을 수 있을까?
‘그래! 결심했어. 오늘부터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거야.’라고 다짐하면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답은 ‘아니요’이다. 의지, 이성을 관장하는 뇌의 부위와 감정을 다루는 부위가 서로 다르다고 한다. 대뇌피질이 어쩌고 편도체가 어쩌고 설명을 들었던 것 같은데 중요한 것은 의지만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것!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스트레스를 덜 받을 수 있을까요?
암 전문의의 답은 의외였다. 음악을 들으란다. 실제 클래식 음악을 들은 환자들의 생존율이 더 높게 나타난 실험도 있다고 한다. 꼭 클래식 음악일 필요는 없다. 좋아하는 음악을 편안히 즐기면 된다.
앵두가 3살 때쯤 우리 집 바로 앞 주차장에서 작은 음악회가 열렸다. 온 주민이 모여들었고, 나름 유명한 가수도 한 명 왔다. 아직 말도 잘하지 못하고 동요도 접해보지 못한 상태였는데도 앵두는 흥이 났는지 연신 엉덩이를 씰룩대며 음악에 맞춰 춤을 췄다. 앵두는 집에 들어갈 생각이 없었다. 해 질 녘 시작되었던 음악회는 하늘이 새카매질 때까지 이어졌지만 앵두는 지칠 줄 몰랐다.
몇 년이 지나 앵두는 진주의 한 행사에 갔다. 해사 생도가 된 사촌 오빠를 보러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한 것이다. 진주항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새로운 체험을 하던 앵두. 저녁이 되어 지쳤을 법도 한데 마지막 행사인 음악회에 또 영혼을 빼앗겨버리고 말았단다. 사방이 어둑해진 후에 출발했다간 너무 위험하고 늦게 집에 도착할 것 같아 앵두를 달래 그곳을 떠나려 했지만 앵두는 완고했다고 한다. 그 고집을 꺽지 못한 앵두의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음악회가 끝나고 나서야 앵두를 차에 태울 수 있었다.
그리고 지난주. 지루하게 집에 있는 것을 가장 싫어하는 앵두를 위해 매주 새로운 활동을 찾는 내 눈에 작은 지역 행사가 걸려들었다. 여러 종류의 프로그램이 있지만 몇 개의 프로그램은 신청을 해야만 참가가 가능했다. 나름 생각해서 결정한 것이 에코백 만들기였다. 대체 에코백을 어떻게 만들겠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뭐 어려운 걸 시킬까 싶어 신청했는데 아뿔싸! 너무 어려웠다.
선생님의 첫 설명부터 내 선택이 옳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한 시간짜리 프로그램이었는데 시간이 부족할 수도 있다고 하셨다. 아니 대체 무슨 작업을 하길래 한 시간이 더 걸린단 말인가?
우선 종이에 사인펜으로 형태를 그려보고 물감으로 미리 준비된 가방에 그림을 그리라는 것이다. 종이에 그림을 그리는 것은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물감을 물에 개어 붓에 묻히고 에코백 위에 붓을 대었을 때 우리가 생각한 것처럼 물감이 천을 적시지 못했고 그림은 엉망이 되었다. 그림을 못 그렸다는 생각에 앵두는 울기 시작했고, 에코백 만들기를 그만하고 싶어 했다. 주변을 보니 아이 엄마 아빠들이 그림을 그려주고 있었다. 그런데 나 역시 그림에 젬병. 선생님께 자초지종을 빠르게 설명하고 우리는 에코백 만들기 교실을 10분 만에 나왔다.
딸과 함께 매주 재밌게 놀아주는 아빠. 내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아빠의 모습이다. 이번 주에는 아무도(앵두와 앵두 엄마) 모르는 행사 참석을 예약하며 나름 자신감을 가졌는데 그 당당함이 10분 만에 깨져버렸다. 교실 밖으로 나온 나는 가족사진 찍기라든가 다른 프로그램을 보며 앵두의 마음을 달래려 했는데 앵두는 이미 기분이 상해버렸다. 그 어떤 것에도 흥미를 보이지 않는다. 건물을 몇 바퀴 배회하다 봉사 아주머니의 제안으로 꽃 만들기(?, 정확한 명칭은 기억나지 않는다) 교실에 들어갔다. 빈자리가 있는지 확인한 후 뒤늦게 꽃 만들기를 시작했다. 잘 만들 생각은 없었다. 내 손은 전형적인 똥 손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이번에는 뭔가 만들어진다는 느낌이 들었는지 아니면 귀여운 소품이 마음에 들었는지 앵두는 울지 않고 잘 따라 했다. 대충 형태만 만들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한결 기분이 좋아진 앵두. 엄마에게 엽서도 쓰고 강의도 듣는다. 그러다 지루해졌는지 또 나가자고 한다. 이제 남은 프로그램은 음악회. 한 시간 반이나 걸린다고 했다. 너무 길지 않을까 걱정은 됐지만 중간에 가면 되니 부담 없이 자리에 앉았다.
경쾌한 전자 기타의 반주로 시작하는가 싶더니 한 시간 반이 순식간에 지났다. 노래 중간 행운권 추첨 때 샤프한 모양의 자동차 연필깎이를 선물로 받은 앵두의 기분은 더욱 좋아졌다. 그리고 그날 일정의 피날레를 장식한 밴드의 마지막 노래는 ‘문어의 꿈’이라는 동요였다. 문어의 꿈은 앵두가 너무 좋아해서 내 핸드폰과 앵두 엄마의 핸드폰 벨소리로 설정해 놓은 노래이다. 우리는 가사가 외워질 때까지 그 노래를 불렀고 때로는 단어를 바꿔 부르며 놀기도 했다. 그렇게 친숙했던 노래가 무대에 있는 가수에 의해 시작될 때 앵두의 기분 역시 최고조로 폭발했다. 우리는 목이 터져나갈 것처럼, 마치 우리가 그 무대의 주인공인 것처럼 함께 불렀다. 에코백을 만들지 못해 느꼈던 짜증도 쿠키 만들기 교실에 참석하지 못해 느낀 아쉬움도 문어의 꿈을 부르며 모두 날려버렸다. 모든 불쾌한 기억은 사라졌고 마지막 앙코르송의 유쾌함만을 간직한 채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 확실히 알았다. 무대 위 가수가 부르는 흥겨울 멜로디에 따라 허밍을 하고 몸을 움직이는 것을 앵두가 얼마나 좋아하는지, 그 시간을 앵두가 얼마나 몰두하며 보내는지 말이다. 앵두가 좋아하는 것을 하나 더 알게 됐으니 주말 놀이 계획을 짜는데 크게 도움이 될 것 같다. 앵두덕에 스트레스 안 받는 삶에 한 발자국 더 가까이 가는 것 같으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