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내 딸 앵두(7세)가 엉엉 울고 있다. 친구들은 엄마 아빠랑 여기저기 놀러 다니느라 유치원에 빠지기도 하는데 본인만 유치원에 매일 간다는 것이다. 아내랑 내가 모두 직장에 다니다 보니 앵두가 평일에 유치원에 빠지는 것은 상상도 못 했다. 앵두를 봐줄 사람이 없으니까. 하지만 너무 서럽게 우는 앵두를 보니 아이의 관점에서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것 같아 미안하기도 했다. 아주 가끔, 적어도 몇 번은 평일에 아이와 멀리 놀러 가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스케줄을 살펴봤다. 9월에 임상실험 정기 검진이 있었다. 이거다 싶었다.
21년 서울의 대형 병원에서 항암 치료를 마친 후 면역항암제 임상실험에 참여했다. 면역항암제는 기존의 독성항암제와 달리 환자의 면역력을 증강시켜 암세포를 제거할 힘을 키워주는 항암제로, 효과가 좋아 많은 환자들이 사용하는 추세이다. 혹시 모를 재발의 두려움 때문에 면역항암제 임상실험에 참여했고 이를 위해 정기적으로 서울에 가고 있었다.
태어난 후로 줄곧 대전과 대구 사이의 작은 소도시에 살았던 앵두는 한 번도 서울에 가본 적이 없다. 이 기회에 앵두가 서울 구경을 하면 1석2조가 될 테니 앵두를 병원에 데려가기로 했다.
혼자 병원에 갈 때는 생각할 게 별로 없었는데 앵두를 데려가야 한다 생각하니 복잡해진다. 한 시간 반의 기차 여행(KTX 기준)을 지루해하지 않고 잘 버티어낼지,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며 내 손을 꼭 잡고는 다닐지(앵두는 툭하면 자기 가고 싶은 곳으로 뛰어가 내 시야에서 사라지곤 한다. 2~3초만 시선을 떼도 앵두를 놓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내가 화장실에 갔을 때 화장실 밖에서 잘 기다리고 있을지, 이동 중에 갑자기 화장실에 가고 싶을 때 잘 참을 수 있을지 등등 변수가 너무 많다.
자꾸 부정적인 생각이 밀려온다. 혹시 내 부주의로 앵두를 잃으면 어떡하지? 잠깐 어디 다녀온 사이에 앵두가 사라져 버리면 어떡하지? 앵두를 잃어버리고 과연 인간답게 살 수 있을까? 두려움에 미아 방지용 팔찌며, 휴대폰 번호가 적힌 목걸이를 알아본다. 이것도 모자라 걱정되는 마음을 아내에게 털어놓는다.
아내는 앵두가 내 눈에 띌 수 있도록 유치원 원복을 입히겠다고 한다. 유치원 가방도 멘다. 유치원 가방에는 유치원 번호가 적혀있어 찾아줄 마음만 있다면 누구든 전화를 할 것이다. 앵두 수첩에는 내 핸드폰 번호와 아내의 핸드폰 번호를 적어 놓았다.
진료 당일이 되자 앵두는 새벽 6시에 일어나 내 머리 곁을 지키고 있었다. 유치원 가는 날에는 8시가 되어도 안 일어나려는 아이가 새벽부터 일어나 나를 재촉한다. 처음 타보는 KTX, 서울 지하철, 서울 택시, 엄청 큰 병원에 신기해한다. 생경한 모습들을 하나라도 더 눈에 담으려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흥얼거린다.
진료실에 아이와 함께 들어서니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 선생님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환자는 옆에 두고 앵두와 한참을 대화하더니, 내게는 ‘별 이상 없으시죠? 검사 결과 좋습니다.’ 한 마디뿐이다.
생각보다 일찍 진료를 마쳤다. 이제는 본격적 서울 여행이 시작된다. 63 빌딩에 도착했다. 금빛 갑옷을 두른 채 눈부시게 햇살을 반사하는 모습이 아름답다. 하지만 그보다 더 아름다운 인어 공주를 떠올리며 앵두는 잽싸게 지하로 향한다.
아쿠아리움을 향하던 중 갑자기 멈춰 서더니 손가락을 두 번 찍찍 가리킨다. 식당이다. 어느새 점심시간이었던 것이다. 그래, 아침도 부실하게 먹었는데 배고플 만도 하지. 짜장면 한 그릇과 구슬 아이스크림을 뚝딱 해치우더니 용감하게 앞장선다.
아쿠아리움은 생각보다 어둡고 좁아 조금 답답한 느낌이 있었지만 앵두에게 그것은 중요치 않았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보니 두 명의 인어 공주가 물속을 헤엄치고 있다. 옆의 스크린에서는 악당으로 보이는 게 한 마리가 대사를 읊고 있다. 두 명의 인어 공주가 힘을 합쳐 악당 게를 몰아내며 끝났다. 인어 공주는 관객들을 향해 하트를 날리고 앵두는 자신도 꼭 인어 공주가 될 거라 다짐한다.
인어 공주를 다 보고도 앵두는 그 좁은 아쿠아리움 내부를 계속 왔다 갔다 하며 저만의 놀이를 한다. 이제 그만 한자리에서 좀 쉬었으면 하는 40대 아빠의 간절한 눈빛은 안중에도 없다. 앵두가 지쳐갈 때쯤 시계를 보니 3시다. 집으로 돌아가기엔 조금 아쉽다. 앵두 할머니나 앵두 엄마는 비도 많이 오는데 빨리 집에 오라 했지만 이왕 서울에 온 거 뽕을 뽑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서울역 근처에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장소를 찾아본다.
지방에는 없을 법한 키즈카페를 찾아냈다. 타요, 라바 등등 많은 캐릭터 모형이 있고, 안에서 만화도 볼 수 있으며 아동용 범퍼카도 운전해 볼 수 있는 곳. 어차피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야 하니 조금 더 수고해서 그곳을 방문한다. 이곳도 앵두의 맘에 쏙 들었다. 2시간 반을 쉬지도 않고 논다. 다행히 휴대용 의자가 있어 그곳에서 편히 쉴 수 있었다. 앵두에게 집에 가자고 졸라도 앵두는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문을 닫는다는 안내 방송이 나온 후에야, 다른 친구들과 사람들이 밖으로 나가기 위해 짐을 주섬주섬 챙기는 것을 본 후에야, 앵두도 나를 따른다.
집으로 가는 길. 앵두의 에너지가 급 하락한다. 심지어 걷는 중에 업어달라 한다. 아니나 다를까 업히자마자 잠든다. 앵두가 잠에 빠지자 앵두의 무게가 두 배로 느껴진다. 앵두를 업고 걷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계단을 오르기는 너무 힘들어 다시 앵두를 깨웠다. 다행히 일어난 앵두. 배고프다며 저녁을 사달라고 조른다. 점심은 짜장면을 먹었으니 저녁은 탕수육을 먹어야겠다고 한다. 전생에 중국인이었나 싶다. 서울역에 중국집이 없어 적당히 저녁을 사 먹힌 후 기차에 올랐다.
비가 세차게 내리기 시작한다. 빗방울이 차창에 부딪히는 소리가 묵직하게 들려온다. 앵두는 유튜브에 온 정신을 뺏겨있다. 어둠과 빗속을 뚫고 달린 기차는 어느덧 목적지에 도착했다. 차에 앵두를 태우자마자 앵두는 잠든다.
비가 너무 온다. 앞의 차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빨리 올 걸 그랬다. 앵두는 잠에 빠져 내가 부르는 소리에 꿈쩍도 않는다. 겨우겨우 아파트 주차장에 도착했다. 집에 가기 위해 앵두를 깨운다.
잠에서 깨 기분이 나쁜 앵두는 목욕하고 얼른 자자는 엄마의 말에 심통을 부린다. 그 심통은 한동안 이어진다. 겨우 어르고 달래 앵두를 씻기고 잠자리에 뉘었다. 힘든 하루였다. 그래도 앵두가 즐거웠다면 나도 즐겁다. 좋은 아빠가 되기는 정말 힘들다. 힘든 하루였다.
-----다음 날-----
아내가 앵두에게 묻는다.
"앵두야, 서울 재밌었어? 또 갈 거야?"
"하나도 재미없었어. 서울 안 갈래. 힘들기만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