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부터 시작한 가우디 투어로 이미 2만 보를 넘게 걸은 우리는 오후 시간 동안 숙소에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한국을 떠나 가우디 투어까지 너무 바쁘게 돌아다녔다. 동생이 챙겨 온 필름으로 된 홍삼과 영양제도 먹어주고, 낮잠도 조금 자면서 시차에도 적응하고 체력도 충전했다.
바르셀로나에서 3일간 묵었던 숙소는 ‘호스텔 지로나’라는 곳이었는데 방 한 칸에 침대 3개, 욕실 하나가 딸려있는 아담한 공간이었다. 작지만 귀여운 테라스도 있고, 침구류나 방 상태도 청결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이 건물이 지어진지 100년이 넘었음에도, 여전히 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며 많은 사람들을 제 안에 품고 있다는 점이었다.
육중한 나무문을 열고 들어가면 중정과 좌우로 대리석 돌계단이 보이고, 안쪽 끝에는 어디 영화에서나 보던 옛날식 엘리베이터가 있다. 숙소에 도착한 첫날, 호기심에 한번 타보았는데 조금 무섭기도 하고 속도가 아주 느려서 빨리빨리 민족인 우리는 그냥 계단으로 다녔다. 100년 전에도 그 누군가가 우리처럼 이 계단을 오르고, 복도를 걷고, 이 공간에서 생활했을 것을 생각하니 다른 시간 속에 같은 공간을 공유했을 그들과의 시간을 초월한 연대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곳곳에 스민 세월의 흔적과 고풍스러운 분위기 덕분에 일반적인 호텔들보다 더 기억에 남는 숙소였다.
쉬면서 개인정비를 마친 우리는 저녁식사를 위해 길을 나섰다. 동생은 여행지에서의 특별한 경험을 위해 현지의 파인다이닝 식당을 미리 예약해 두었다고 했다. 평소 6시쯤이면 저녁을 먹는 우리와는 달리 스페인 사람들은 저녁식사를 늦게 하는 편이라 8시가 식당 오픈 시간이었다. 시차를 고려하면 한국시간으로는 새벽이고, 따지고 보면 저녁밥이 아니라 새벽밥을 먹으러 가는 셈이지만. 구글지도를 따라 걷다 보니 저 앞에 식당 간판이 보였다.
Imprevisto Restaurant.
‘Imprevisto’는 ‘예상치 않은’이라는 뜻의 스페인어다. 이름처럼 예상치 않는 요리들을 코스로 제공할 테니 기대감과 반가움으로 음식을 즐기기를 바란다고 적힌 글을 본 것 같다(아마도 메뉴판 어느 페이지에서). 너무 빨리 왔는지 문도 닫혀있고, 거리도 휑하다. 줄 서서 기다리는 손님도 없다. 정말 유명한 식당 맞는지 조금 의심스러웠지만 오픈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테이블마다 예약 손님들로 가득 찼다.
한국에서도 한 번도 가보지 못한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에 오게 되다니. 예전의 나라면 분명 다른 식당들과 가격을 비교하며 계산기를 두드리고, 가성비를 따져보느라 마음이 편치 않았을 것이다. 사치라고, 낭비라고 여겨 감히 문을 열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만큼은 그런 생각을 내려놓고 싶었다. 엄마의 칠순을 특별하게 기념하고 싶었고, 나와 동생이 그동안 착실히 저축하며 준비해 온 만큼만큼은 돈 걱정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그 순간을 온전히 즐기고 싶었다.
과거에도, 지금도 경제적으로 넉넉한 편은 아니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마음만큼은 조금 여유로워진 것 같다. 살다 보니 인생은 내 계획대로만 흘러가지 않는다는 걸, 돈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것이라는 걸,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이 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물론 아끼고 절약하는 건 여전히 중요하고 꼭 필요한 태도다. 하지만 때로는 꽁꽁 싸맨 주머니를 풀어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안내를 받고 들어간 식당은 깔끔하고 아담했다. 우리는 장장 두 시간 동안 저녁식사를 이어갔다. 그도 그럴 것이 10가지의 코스요리에 와인까지 곁들였고, 음식이 빠르게 나오는 것이 아니다 보니 시간이 상당히 소요됐다.
새로운 요리를 나올 때마다 직원분께서 음식의 재료와 소스, 먹는 법에 대해 유쾌하고 친절하게 설명해 주셨다. 빵과 올리브, 생선, 굴, 고기 등 다채로운 재료와 모양의 음식이 그에 어울리는 예쁜 그릇에 담겨 나와 우리의 눈과 입을 즐겁게 해 주었다. 각각의 음식과 어울리는 와인을 함께 곁들여 마시며 우리는 셋이서 "언제 또 이런 곳에 와보겠나"며 그릇을 싹싹 비웠다.
비록 계산서를 받고 나서 ‘헉’ 소리가 나기는 했지만 신기하고 잊지 못할 경험이었다. 하루 종일 부지런히 움직이고 난 후에 맛있는 음식까지 배부르게 먹고 나니 단순한 나는 금세 행복해졌다. 포만감 때문인지 너무 많이 마신 와인 탓인지 나른해진 상태로, 우리는 마트에서 아이스크림 하나씩을 사서 물고 숙소로 다시 걸어가며 오늘 밤은 푹 잘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정말로 그날 밤 우리는 누구 하나 없어져도 모를 정도로, 서로 경쟁하듯 코를 드르렁 골며 푹 잤다. 아침 일찍 일어나 식사를 준비할 필요도, 누군가를 챙겨줘야 할 필요도, 출근도, 빨래도, 청소도 없는 내일이 꿈같이 느껴졌다. 며칠 동안이지만 세상 시름걱정 잊고 꿈처럼 살아 보기로, 마음껏 즐기며 행복해져 보기로 우리는 작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