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람브라 궁전과 김치찌개

by 수정

그라나다 여행에서 빠질 수 없는 곳, 바로 알람브라 궁전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드라마 덕분에 친숙하게 느껴지는 곳이지만 나는 안타깝게도 그 드라마를 보지 못해서 별다른 환상이나 부푼 기대감은 없었다. 그럼에도 워낙 유명한 곳이기도 하고 이슬람 궁전에 방문하는 것은 처음이다 보니 궁금함과 호기심이 일었다.
알람브라는 하루 입장 인원이 제한되어 있어 사전예약이 필수였다. 우리끼리 둘러보기에는 역사적인 면이나 건축 양식에 대한 지식도 부족하고, 서너 시간이 걸릴 정도로 규모가 크다고 해서 동생이 미리 가이드 투어를 예약해 두었다.

투어는 오후에 예정되어 있어서, 오전에는 누에바 광장 근처와 그라나다 대성당 주변을 둘러보기로 했다. 작은 골목 상가들을 구경하며 걷다 보면 또 다른 골목의 식당 테라스에 가득한 사람들을 만나고, 조금 더 걸으면 성당이, 광장이, 새로운 풍경들이 나타난다. 우연히 지난 작은 성당에서는 결혼식이 있는지 잘 차려입은 하객들과, 그들에게 포옹과 인사를 건네는 신랑 신부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우리 어릴 적에 시골 동네 잔칫날처럼 북적북적 정답고 행복한 분위기가 전해졌다. 지인 결혼식도 아닌데 우리도 괜히 흐뭇해져 잠시 구경하다가 다시 발길 닿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아직 커피를 먹지 못해 근처에 카페를 찾다가 대성당 근처에 ‘La Finca’라는 곳이 평이 좋아 찾아가 보았다. 맛집답게 사람이 많았다. 주문이 많아 바쁜데도 바리스타 분이 친절하게 응대해 주시고 라테를 주문하니 아트도 만들어 주신다. 우리 셋 다 커피에 조예가 깊은 것도 아니고, 에스프레소는 너무 써서 잘 못 먹는 촌스런 입맛이다 보니 스페인 여행 동안 라테를 주로 마셨다. 우리가 흔히 마시는 라테와 비슷한 것을 원한다면 ‘라테 콘 레체나’를, 그보다 조금 더 커피가 진하고 우유 양이 적은 것은 원한다면 ‘코르타도’를 주문하면 된다.

우리는 빵과 커피를 사들고 근처 성당 앞 계단에 앉았다. 우리 말고도 여러 사람들이 계단에 앉아 책도 읽고, 이야기도 나누고, 커피도 마시고 있었다. 따뜻한 햇빛을 쬐며 돌계단에 앉아 빵과 커피를 마시고 있자니, 내가 상상하던 유럽의 한 장면 속에 우리가 들어온 것만 같다. 커피 맛도 좋고, 빵도 너무 맛있었다. 한참을 앉아 수다도 떨고 사람 구경도 하다가 점점 관광객들이 몰려들기 시작해 우리는 자리를 비켜주었다.


골목 사이사이를 걷다 보면 복잡할 것 같지만 신기하게도 길은 이어지고, 골목마다 비슷비슷하지만 또 다른 아기자기함이 있었다. 우리 셋다 걷는 걸 좋아하지만 알람브라 궁전에서 많이 걸어야 한다길래 체력도 비축할 겸 식당에서 점심을 든든히 먹으며 잠시 쉬었다. 뽈뽀 요리와 타파스, 그리고 빠질 수 없는 띤또 데 베르노와 레몬 맥주로 배를 채운 뒤, 버스를 타고 알람브라 궁전으로 이동했다.


입구에서 가이드님과 투어를 함께 할 일행들을 만나 궁전 안으로 입장했다. 장소에 얽힌 이야기와 역사적인 배경, 건축 양식의 특징에 관한 것들 들으며 관람하니 더 유심히 보게 되고 새롭게 알게 되는 것들도 많았다. 포토존과 사진 찍는 팁까지 알려주셔서 구경하랴 사진 찍으랴 다들 바쁘게 돌아다녔다. 더운 날씨에 사람들은 북적이고, 그늘도 많지 않아 투어의 중반을 넘어가면서는 다들 조금씩 지치지 시작했는데, 결국 마지막 코스는 가이드님께 양해를 구하고 일행과 헤어져 자유롭게 돌아보다 나가기로 했다.

궁전 구석구석까지 연결된 수로와 하늘 높이 솟아있는 사이프러스 나무, 다양한 꽃과 나무로 꾸며진 아름다운 정원과 분수대, 이슬람 특유의 타일 문양과 천장 장식, 좌우로 완벽한 대칭을 이루는 건물들이 물론 감탄할 만큼 인상 깊고 아름다웠지만….
엄마도 우리도 너무 많이 걸어서 다리도 아프고, 계속 보다 보니 비슷한 건축물들 사이에서 살짝 지루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어느새 여행 5일 차, 여행의 흥분과 들뜬 마음에 가려져 우리가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몸의 피로와 고단함이 슬슬 드러나고 있어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많이 힘드셨는지 한국 음식이 먹고 싶다고 했다.

“그럽시다! 오늘 저녁은 한식 먹으러 갑시다!”

알람브라 궁전에서 나온 우리는 택시를 타고 ‘Coco 텃밭’이라는 이름의 한식당으로 이동했다.
분명히 ‘영업 중’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왔는데 아뿔싸 문이 잠겨있다. 한식을 먹을 생각에 한껏 들떠있던 우리는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당황했다. 다른 곳을 찾아 다시 이동하기에는 모두가 지치고 힘든 상태였다. 가게 안을 기웃거리며 둘러보다가 잠시 기다려보기로 했다.
다행히도 저쪽에서 사장님으로 보이는 분이 장을 본 물건들을 들고 오시는 게 보였다. 식재료가 조금 부족할까 싶어 잠시 마트에 다녀오시는 길이라고 했다.
“휴~ 다행이다.” 우리는 안도하며 식당에 들어가자마자 김치찌개, 잡채, 비빔밥, 제육볶음, 공깃밥에 소주까지 빠르게 주문했다.

말이 통하고, 늘 우리가 먹던 반가운 음식들을 만나니 그동안의 피로와 고단함이 싹 풀어지고 영혼까지 노곤노곤 해지는 것만 같았다. 김치찌개 국물 한 숟갈은 소주 한잔을 부르고,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짜르르한 소주는 또다시 김치찌개국물을 불렀다. 그동안 스페인 식당에서 주문하기 위해 직원들과 끊임없이 눈 맞춤을 해야 했던 것과는 달리, 여기서는 요리하시느라 바쁜 사장님을 대신해 “사장님~ 소주 한 병 가져갈게요~” 외치며 직접 꺼내다 먹었다. 우리는 “너무 맛있다.”를 연발하며 소주잔을 ‘짠!’ 경쾌하게 부딪혔다.

오랜만에 - 그래봤자 일주일도 안되었지만 - 우리 세 모녀는 한식을 즐겼다. 한국보다 비쌌지만 소주도 네 병이나 해치우고, 밑반찬인 김치와 오이무침, 사장님이 서비스로 주신 꿀떡까지 하나도 남김없이 흡입했다. 친절하신 사장님과 이런저런 인생 이야기도 나누고 정신없이 먹고 마시다 보니 시간이 금방 흘렀다. 어둠이 깊어져 아쉽지만 사장님과 인사를 나누고 가게를 나왔다.
역시 한국 사람은 밥심인가 보다. 한국 음식으로 에너지를 충전한 우리는 기분 좋은 취기와 함께 숙소로 향했다. 스페인의 선선한 밤공기와 주황빛 불빛 아래서 늦은 식사를 즐기는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거리를 걷던 그때의 감각이 여전히 남아있는 듯하다.

아침에 숙소를 나설 때만 해도 오늘의 메인은 알람브라 궁전이 될 줄 알았는데, 늦은 밤 숙소로 돌아와 꼽은 오늘의 메인은 김치찌개와 소주가 되어버렸다. 알람브라 궁전에게는 미안하지만 이 날의 저녁식사는 그 이후로도 우리에게 여러 번 회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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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