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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현 Mar 31. 2024

그때, 학교밖청소년을 처음 만났다

조금 늦은, 나의 성장기


학교를 다니지 않는 청소년들


스물 세 살 대학생때, '학교를 그만둔-다니지 못하는' 청소년을 처음 보았다.

자원봉사활동을 하려고 찾아갔던 ○○야학에는, 가정형편 때문에 학교를 다니지 못해 뒤늦게 중학교 검정고시 공부를 하는 어르신들이 많았고, 그들 사이로 몇몇의 어린 학교밖청소년들이 있었다.


그 청소년들은 낮에는 구두를 닦거나 공장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야학에와서 함께 저녁을 먹고 짧은시간 공부를 했다.


부모나 가족이 없이, 혼자 힘으로 살아가는 청년들도 그곳에서 처음 만났다.


이후로 4~5년간 야학 자원교사 활동을 했다.

별다른 경제적 풍파없이 자랐던 나는, 그곳에서 빈곤과 차별과 고립에 대해 접했고, 세상에 대해 조금 배웠다. 교육이라는 분야에 대한 꿈도 그때 처음 싹텄다.



뒤늦은 취업, 대안학교 선생님 생활


이후로도 철모르는 20대를 보냈다. 세상으로 나가고 싶지 않았고 시인이나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에 머물려고 했다.

친구들이 차근차근 준비해 대부분 취업을 했지만 나는 여전히 진로방황중이었다.


18년전, 서른살 무렵. ○○ 대안학교에 취업해 조금 늦은 직업생활을 시작했다.

대안학교 선생님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대단한 신념이나 비전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다. 

그냥 빨리 선생님이 되고 싶었고 일반학교의 기간제교사 자리와 대안학교 이곳저곳에 원서를 내서 제일 먼저 뽑힌 곳에 갔을 뿐이었다.

어떤 일을 하며 살아야할까, 어떤 방식으로 살아야할까. 나에게 맞는 세계가 과연 있을까.

고민이라기보다는 불안과 두려움속에 하루하루를 견딜때였다. 


나는 결혼을 앞두고 있었고, 대안학교 교사는 워낙 급여가 적고 불안정하니까 1~2년만 해보다가 일반학교 자리를 찾으려고 했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걸까?
신념이 부족한 선생님


취업해 일을 시작했지만, 사실 취업준비생이나 직업인의 마인드는 갖고 있지 않았다. 나는 그냥 마음 나눌 친구를 찾고 있었고, 학교밖청소년과 친구가 되는 막연한 낭만을 그리고 있었다.


현실은 낭만일 수 없었다. 상상해보지 못한 고난속을 살아가는 아이들을 보면서, 뭐하나 제대로 할수없는 무력하고 무능한 스스로를 비난하며 고통과 불안 속을 살았다.


'친구되기'만으로는 그 청소년들의 삶이 회복되게 할 수 없었다.

때로는 유능한 선생님이어야했고, 때로는 모든것을 책임지는 부모여야했다. 하지만 나는, 어느 것 하나도 잘 해낼 수가 없었다.


그것들을 해내는 선배 선생님들이 대단하게만 보였다. 나는 그렇게 크고 강한 에너지와 자기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나에게는 이 길이 맞지 않다는 생각을 품고서, 1년만 해보자 1년만 더해보자 생각하며 그렇게 시간이 계속 흘러갔다.

그 사이 첫 아이가 태어났고, 점점 미래가 두려워졌다.


평생 사회운동을 하다가 고생하는 선배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었다.

사회운동에 투신해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헌신했다가 아무것도 손에 쥐지 못하고 힘들게 노년을 살아간다는 선배들 이야기가 무서웠다.


 나와 비슷한 20대를 보냈던 친구들은, 회사에서 승진하고 집을 사고 주식투자 이야기를 하는데, 오랜만에 친구들 만나도 회비를 얼마 내야할까 걱정해야하는 내 처지가 참 싫었다.

내 삶은 어디로 향하게 될지 알 수 없었다.


뭐라도 앞날을 준비하겠다고 한 동안 일을 그만두었다. 연구자가 되겠다고 학회에 참여하고 박사과정에 지원해보고, 학교 기간제교사 면접도 보았다.

하지만 오래 시도하지 못하고 포기했다. 나는 이미 이곳에 오래 발을 들여놓았고 다른 세계의 가치관은  너무 멀고 불편했다. 뭘해야할지 알 수 없는채로 하루하루가 흘러갔다.


자책감을 벗으려고

2012년 봄여름은 갈림길이었다. 청년이 된 한 제자가 스스로 세상을 등졌는데, 일상은 너무 빠르게 제자리로 돌아갔다.


나도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떠났을까, 앞으로 또 이런 이별을 얼마나 계속 맞아야할까. 두려웠다.

모두가 나의 책임, 우리의 책임 같았다.


20대가 된 제자들의 연락을 받고 도움을 요청받는 일이 무서워져 피하게 되었다.

무섭지 않으려면, 뭔가를 해야만했다.


청년 자립학교를 만들자

어느날, □□ 선배님이 사회적기업 창업지원사업을 추천해주셨다. 몇몇 동료 선생님들과 함께 청년자립을 돕는 사회적기업 아이디어를 사업계획서로 만들었다. 1팀만 뽑는다고 해서 기대하지 않았는데, 최종선정이 되어 얼마간의 창업지원금을 받게 되었다.


점점 물러설 수 없이, 해야만 하는 일이 되어갔다.

1년여의 준비과정을 거쳐 일하는학교를 설립했다. 청년기가 되는 학교밖청소년들에게 직업교육과 직업현장 실습의 기회를 지원하는 비영리 교육단체였다.


개개인에 맞는 방식으로 장기간 밀착지원해서, 확실히 자립할 수 있게 하려다보니 많은 수를 지원할 수는 없었다.

양적 성과를 중요시하는 정부지원금보다는 다수의 소액후원자를 모아서 운영해야 했다.


그 일이 오래 지속 되리라는 기대나 믿음은 크게 없었다. 사업을 만들어 본적도 조직을 이끌어 본적도 없었으니, 무작정 눈앞에 닥치는 일들을 해나가는 것 뿐이었다.


다만, 제자들의 미래와 자립을 책임져오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감을 떨치고 싶었다. 뭐라도 해서 변명거리를 만들고 싶어 열심히 했다. 의미있는 실험 정도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렇게 12년이 흘러갔다.


버티고 견디며, 희망을


처음, 아무도 우리에 대해 알지 못했다.

우리에게는 돈도 명망도 없었다.

모든 것을 맨땅에서 만들어가야 했다.


매해가 고비였고 실패였지만, 암담해있을때마다 소소한 기적같은 일들이 생겨 버텼다.
기적이 필요한 상황들이 반가울리 없었다. 기적을 기대하는 시간들은 불안과 분노와 외로움의 시간들이었다. 그저 근거없고 막연한 책임감과 희망으로 버텨갔다. 

버티다 보면 언젠가 우리가 시도하는 일을 정부나 사회가 알아보고 지원을 해주지 않을까 막연한 기대도 했다. 하지만 세상은 기대하고 꿈꿨던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았다. 정부는 우리의 역할을 인정해주기보다, 새로운 공공시설을 만들어 우리가 하던 역할을 대체하려고 했다.


그렇게 좌절하고 실패하는 가운데에서도, 함께하는 사람들의 힘으로 버텼다.
동료들과 함께, 청년들의 일과 자립을 돕는데 온 힘을 쏟았다.



나에게 길을 보여준, 청년들


길이 보이지 않던 아이들이, 자기만의 진로를 발견했고.. 일주일 출근하는 것도 버거워하던 친구들이 몇년씩 함께 고생하다보면 어느새 직업인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직업이 생긴것 뿐만 아니었다. 집이 없던 친구들은 집이 생겼고, 가족이 없던 청년들은 가족을 꾸렸다.  

12년전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었던 것들을 믿을 수 있게 되었다.

좀처럼 앞이 보이지 않는 길위에서, 청년들의 성장과 자립이 우리 모두가 견딜 수 있는 빛이 되었다.



나의 뒤늦은 성장과 배움

이렇게 살아도 괜찮구나


직업적으로 학교밖청(소)년을 만난지 19년째가 되었다.

일하는학교는 여전히 위태롭고 불안정하다.

돈도 못 벌었고, 별다른 노후대책도 없는 미래가 나를 기다린다.


하지만, 위기를 극복하고 자립한 많은 제자들이 생겼다. 

몇몇 사람들의 노력이 누군가의 미래를 바꿀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희망이고 배움이었다.


내가 무엇을 해야할지, 무엇을 잘할 수 있을지, 무엇을 해야 의미있는지.

더는 걱정이 되지 않는다.


이렇게 살아도 괜찮구나.


미래를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며 20년 가까이를 달려오고나서야,

이제 그것 한가지를 깨닫는다.

홀로 위기를 극복하고, 자립을 해나간.

청년들, 제자들의 노력 덕분이다.


그들을 만나오며, 나도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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