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오스트리아는 독일이 아니더라.
2018년 5월 말에 자그레브에서
크로아티아어 3-4달 어학코스가 끝나갈 때,
내가 중요한 걸 잊고 있었다는 게 떠올랐다.
‘아차, 빈필 가야 하는데’
20세기 사회주의 유고슬라비아의 일부였던
크로아티아는 흔히 “동유럽”으로 간주되지만,
크로아티아인은 스스로를
“중부유럽인”이라 여긴다.
(이건 폴란드, 슬로바키아, 체코인들도 그렇고,
특히 체코인은 “동유럽”으로 불리는 거 극혐한다)
“동유럽”이 단순히 “동쪽의 유럽”이란
지리적 개념이 아니라,
공산주의 이데올로기,
소련 및 러시아,
낙후된 유럽을 연상시켜서
“중부유럽”이란 표현으로
그걸 피하려는 것이기도 하고,
크로아티아는 진짜 “유럽 중간”에 있어서
동서남북 어디를 가도 유럽이 가득하기도 하다.
그래서 “중부유럽” 크로아티아에서 “가까운”
북쪽 슬로베니아, 오스트리아, 헝가리도 가보고,
서쪽 이탈리아도 가보고,
동쪽 세르비아, 보스니아도,
남쪽 몬테네그로도 가고 싶었는데,
그런 여행을 위한 공간적 조건은 완벽했지만,
시간적 조건이 안 좋았다.
대학수업처럼 학기제로 진행되는
크로아티아어 수업이 월화수목금 계속 있어서,
그 어학코스가 진행중이던 6월초까진
멀리 여행 갈 시간이 잘 안 났기 때문이다.
사실 오래 전 유럽 배낭여행하며 들렀어서,
오스트리아 여행엔 크게 갈증이 없었는데,
그때 “빈 필하모니”는 못 가 봐서,
가까운 크로아티아에 있는 동안
‘빈필에 한번 가면 좋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7월말까지 크로아티아에 있을 예정이었고,
비행기 날짜를 바꿀 수 있으면
8월 중순까지 있을까도 생각하던 중이라,
수업 끝난 이후엔 여행할 시간이 많았지만,
유럽에선 무대 공연이나 필하모니가
대체로 여름에는 쉬니까,
빈필에 가 볼 수 있는 기회가 얼마 안 남은,
5월말에 불현듯 빈필이 떠올랐다.
급하게 빈 필하모니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우려대로 시즌이 6월말에 끝나고,
그나마 남은 6월에 볼 수 있는 공연도
얼마 안 남았다.
(빈필 홈페이지)
https://www.wienerphilharmoniker.at/en
필하모니의 정기 공연은
이미 인터넷 티켓이 매진된 상태로
Verkauft[페어카우프트]라고 쓰여 있고,
“매표소에 직접 와서 확인하라”는
안내글이 덧붙여 있었다.
아마도 현장 판매용으로
티켓을 좀 남겨두는 게 아닌가 싶은데,
그것만 믿고 무작정 갈 순 없고,
그렇다고 안 가면 또 너무 후회가 될 것 같아서,
오케스트라 정기공연만큼 좋지는 않겠지만,
아직 매진 안 된 실내악 공연 티켓을
서둘러 인터넷으로 예매했다.
좌석은 자유석이고,
티켓 가격은 36유로로 동일했다.
그렇게 그 실내악 관람 티켓 예매하고,
2018년 6월 초, 꽉 찬 2박 3일 예정으로
오스트리아 수도 빈을 갔는데,
결론부터 얘기하면 너무 좋았다.
예전에 배낭여행 하다 들렀을 땐,
유럽에 처음 가서 그런지,
모든 유럽 도시가 다 비슷해 보여서,
빈의 특별함을 별로 못 느꼈는데,
이제는 그 비슷해 보이는 얼굴들 사이의 차이를
어느 정도 알 수 있는 데다가,
이번엔 "빈필"이라는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가서
초반에 그 목적을 달성하고 난 후,
뿌듯한 마음으로 여유 있게 둘러보면서,
마치 보너스처럼 하나씩 새롭게 알게 되는
그 도시의 넘치는 매력에 계속 감탄했다.
아니나 다를까 빈(Wien)은
여러 다른 기관에서 발표하는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1위로
여러 번 선정됐고,
2018년에도 1위로 뽑혔다.
그런데 생각보다 시스템이 합리적이지 않아서,
‘오스트리아는 독일이 아니구나’
라는 생각도 계속 했다.
예매한 빈 실내악 공연이 토요일 오전 11시라,
금요일 아침에 가서 일요일 밤에 돌아오는
꽉 찬 2박 3일 여정을 잡고 예약을 마쳤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금요일 낮에 자그레브에서
크로아티아 어학코스 “졸업식”도 하고,
그날 밤엔 오래 전 예매해두고 깜빡 잊고 있던
자그레브 국립극장 공연도 있었다.
친구들은 나중에 따로 봐도 되고,
원래 어색하고 딱딱한 “식”은 별로 안 좋아해서,
“졸업식”을 빠지는 건 아쉽지 않았는데,
나의 ”마지막 자그레브 국립극장 공연 관람”은
놓치기 싫어서,
금요일 자정께 출발하는 야간버스를 타고가서,
토, 일, 월까지 있다가 오는 걸로
일정을 하루씩 뒤로 미뤘다.
Flixbus에서 미리 예약한 왕복 교통편은 취소하고,
위약금(?) 6유로를 지불한 후,
다시 예매했다.
(인터넷엔 1유로를 냈다는 경험담이 나오던데,
아마 그 때 그 때 다른가 보다)
그리고 빈 숙소에 예약을 하루씩 미룰 수 있는지,
안 되면 마지막 하루만 더 연장할 수 있는지
이메일로 물었는데,
답장이 없다.
답장 기다리다 숙박마저 다 매진될까 두려워,
원래 예약은 그대로 둔 채로,
인터넷 예약 사이트에서
그냥 마지막 하룻밤을 추가로 결제했는데,
빈으로 떠나기 전날 뒤늦게 답장이 왔다.
마지막 밤은 방이 없어서 연장 안 된다고.
빈 같이 핫한 관광지에서
주말 숙소 예약이 쉽지 않으리란 건
충분히 예상 가능했지만,
이멜 보낸 지 며칠이 지난 후,
투숙일 전날 답장을 보내온 건 좀 충격이었다.
오스트리아가 그럴 줄은 몰랐다.
내가 보낸 이메일을
실수로 늦게 확인했나 보다 했는데,
나중에 보아 하니, 아니다.
오스트리아는 독일이 아니었다.
독일어로 Österreich[외스터라이히]
즉, “동쪽 왕국”이라 불리는 오스트리아는
이웃나라 체코, 슬로바키아, 헝가리, 스위스처럼
바다가 없는 내륙국가이고,
독일, 이탈리아, 슬로베니아까지
7개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
이 중 수도 빈(Wien)은
오스트리아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크로아티아 수도 자그레브에서 빈까지는
버스가 꽤 여러 대 다니는데,
시간은 5-7시간 정도 걸리고,
편도 18-23유로 정도의 비용이 든다.
난 자그레브에서 국립극장 공연 보고,
금요일 밤 23:55에 출발해서
토요일 새벽 6:10에 도착하는 버스를 탔다.
중간에 슬로베니아 북부도시
마리보르(Maribor)에 들렀다가
오스트리아로 가는데,
크로아티아 국경과 슬로베니아 국경에서
한번씩 출입국 검사를 하고,
그대로 빈까지 갔다.
둘 다 쉥겐국이어서 그런지,
아님 원래 세 나라 이상 거칠 때는 한번만 하는지,
슬로베니아와 오스트리아 사이에선
출입국 검사를 안 한다.
버스는 동남쪽 Erdberg 지역의
비엔나 국제 버스터미널
(Vienna International Busterminal)에 섰는데,
여름이라 벌써 날은 밝았는데,
새벽이라 사람도 없고 터미널은 좀 황량하다.
버스터미널이 빈 중심가와 조금 떨어져 있어서,
거기서 지하철을 타거나,
버스나 트램을 타거나,
혹은 40분 정도 걸어가야 한다.
난 너무 새벽에 도착해서 아직 체크인이 안 되고,
짐도 무겁지 않아서,
그냥 천천히 도시를 구경할 겸,
빈 중심까지 슬슬 걸어가 보기로 했다.
여기는 그냥 별 거 아닌 건물들도
다 고풍스럽고 우아하다.
아직 체크인 하긴 이른 시간이라
숙소에 큰 짐만 맡기고,
토요일 오전 11시 실내악 공연을 보러 갔다.
나는 빈필 홈페이지에서 예매를 했기 때문에,
당연히 공연이 빈필에서 하는 거라 생각했고,
그 유명한 빈 필하모니 건물이
당연히 오페른링(Opernring) 거리 같은 대로에
있으리라 예상했는데,
둘 다 아니었다.
지도를 참고하며,
사람들한테 또 물어도 보면서,
구시가 바깥쪽에 자리잡은 빈필에 갔는데,
그 건물을 빙 돌고서 겨우 발견한,
북쪽의, 매표소 같이 생긴 사무실에 들어가,
그 실내악 입장권 인터넷 예매한 걸 보여주니,
그건 오페라하우스에 가서 봐야 한단다.
그러고보니,
내가 인터넷에서 예매한 티켓이라고 생각한,
내 이름과 공연 날짜가 적힌 pdf파일에
Vienna State Opera라는 글자가 써 있다.
오페라나 발레가 아닌,
클래식 음악 공연인데다,
빈필 홈페이지에서 티켓을 예매했으니,
난 당연히 빈필을 갔는데,
그건 특이하게도
오페라하우스에서 하는 클래식 음악 공연이었다.
티켓을 그렇게 같은 데서 판매하기도 하고,
오페라하우스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어느 정도 경력을 쌓은 우수한 단원을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고용하는 등
필하모니와 오페라하우스가
조직이나 사업적으로는 연관되어 있더라도,
빈 필하모니와 빈 오페라하우스 건물은
걸어서 5분
(만약 횡단보도에서 오래 기다리면 몇 분 더)
걸리는 거리에 떨어져 있었고,
빈 오페라하우스는 구시가 입구의 대로에
눈에 띄는 곳에,
매우 크고 화려한 건축물 속에,
빈 필하모니는 좀 덜 번잡한 길에,
관광객들이 많이 가는 구시가 쪽에서 걸어가면
대로에서는 안 보이는 골목 안에,
덜 화려한 작은 건물에 자리잡고 있었다.
난 빈 필하모니와 오페라하우스를
처음 가보는 거라 그렇다치고,
내가 "빈필 가는 길" 물어보면서,
경찰관을 비롯한
두세 명에게 그 티켓을 보여주고,
Gustav Mahler Hall에서 하는
콘서트 보러 가는 거라고 말했는데,
어떻게 빈 시민들은 그 티켓을 보면서도
내가 필하모니가 아니라
오페라하우스에 가야 한다는 것,
그리고 Gustav Mahler Hall이
빈 오페라하우스에 있다는 걸 몰랐던 걸까?
오페라하우스나 필하모니 같은데
잘 안 갈 뿐 아니라,
관심조차 없는 게 분명하다.
일반인들이 평균적으로 모두 클래식에 조예가 깊고,
음악적 교양이 넘치리라 예상했던
"클래식 음악의 도시" 빈의 이미지가 와장창 깨졌다.
그리고 보통의 서유럽국가처럼
모두가 쉽게 예상할 수 있게
시스템이 체계적이고 단순하지 못하고,
뭔가 아는 사람만 아는,
약간 좀 폐쇄적이고 복잡한 느낌이다.
아님 내가 밤버스에서 잠을 많이 못 자서
뇌의 컨디션이 안 좋아 어렵다고 느끼거나,
혹은 그냥 운이 안 좋은 지도 모른다.
다행히 내가 예매한 실내악이
빈 오페라하우스에서 하는 공연임을 알았을 때,
아직 시간이 10분 정도 남아 있어서
그래도 공연장에 늦지 않게 도착했다.
빈 오페라하우스(Vienna State Opera, Wiener Staatsoper)는
150년 전인 1869년 체코 건축가에 의해
신르네상스 양식으로 건설됐다.
규모도 거대하고,
자세히 보면 크고 작은 장식 디테일이 섬세한,
특별한 건축이다.
그 앞엔 오페라하우스 건물에 어울리는
고전적인 분수도 있고,
좀 너무 튀는 듯한
꽃분홍 토끼(Pink Rabbit)도 있다.
비엔나 박물관에 소장된
16세기초 회화 작품을 모티브로
독일 건축가가 만든 현대 조각 작품이다.
그런 맥락적 배경을 모르고 보면,
너무 쌩뚱맞고,
또 오페라하우스나 그 주변 건물과
너무 안 어울리기도 하다.
오페라, 발레 공연이 없는 낮에
빈 오페라하우스는 "박물관"이 되어,
9유로를 내고 1시간짜리 투어를 할 수 있다.
부활절 전 사순시기 전 마지막 목요일엔
5000명 가량 참여하는 무도회도 개최한다고 한다.
Gustav Mahler Hall은
오페라 하우스 동쪽 끝에 자리잡고 있는데,
콘서트 관객들이
오페라하우스의 나머지 공간에는 접근 못하게,
무거운 철창으로 엄격하게 분리하고 있다.
우선 인터넷 예약 티켓을
매표소에서 종이 티켓으로 바꾸고,
2층으로 올라가려는데,
내가 매고 있던 에코백을 가지고 입장할 수 없다고,
옷 보관하는 Garderobe에 맡기란다.
맡길 때 보니
에코백보다 더 작은 가방들도 다 걸려있다.
보관료는 무료고,
아래 사진 같은 종이 쪽지를 준다.
보통은 금속이나 플라스틱으로 된 번호표를 주는데,
오스트리아도 크로아티아만큼이나
종이, 서류를 좋아하는 것 같다.
난 공연 시작 바로 전에 도착해서
비어 있는 자리 중 가장 앞에 있는 자리에 앉았다.
11시에서 1시 정도까지
3곡을 연주했고,
중간에 한번 휴식시간(entreact)이 있다.
실내악 공연 장소인 Gustav Mahler Hall은
생각보다 아담했고,
좁고 긴 방에
접이식 의자가 양쪽으로
방을 따라 길게 놓여 있었다.
샹들리에는 화려하고,
작은 무대 쪽에는
방 이름에 걸맞게 말러 그림이,
양쪽 벽에는 뭔가 글씨가 많이 써 있어서,
별로 읽고 싶지 않는 거대한 판넬이 쭉 붙어 있었고,
긴 방 중간엔 바(bar)도 있었다.
공연장 안에 바가 있다니,
순간적으로
클래식 음악을 정말 사랑하고 잘 아는
진지한 관람객을 위한 공연이 아니라,
나같이
그냥 허영심이나 호기심으로
'빈에 왔으니(혹은 빈에 가서)
한번 클래식 음악이나 "구경"할까'
하고 찾아온
속물 관광객들을 위한 공연임을 간파했다.
그리고 나 자신
뭐 대단한 클래식 애호가도 아니면서도,
공연 수준이 너무 별루거나,
관객 수준이 너무 별루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연주도 섬세하고,
소리도 아름답고 조화로워서,
실내악이어도 “빈필답게” 훌륭하고,
관객들도 전반적으로 괜찮았다.
미리 예약한 오페라하우스 실내악 공연은
정말 만족스러웠는데,
공연이 너무 일찍 끝났고,
밤버스를 타고 오느라,
잠을 잘 못 자서,
공연 중 잠깐 졸기도 해서,
아쉬운 마음에,
그리고 인터넷에서
매표소에 문의하란 안내문을 본 기억도 나고 해서,
필하모니에도 한번 가봤다.
구시가에서 벨베데르(Belvedere) 궁 가는 길에,
이제는 어디 있는지 너무 잘 아는 빈필에 갔는데,
토욜 오후라 근무가 일찍 끝났는지,
아님 아직 공연이 없어서 그런지
아까 그 매표소는 잠겨 있다.
30-40대 정도 되어 보이는
젊은 경비분에게 물어보니,
공연이 오전 11시, 낮 3시 30분, 밤 7시
이렇게 하루 3번 있고,
내일 11시꺼는 매진되었고,
7시꺼는 모르겠는데,
3시 30분 공연은 아직 매진 안 된 것 같으니,
다음 날 2시쯤 와서 확인하라고 한다.
11시 시작이면 그거 보고 움직이기 딱 좋겠는데,
3시 30분 공연은 너무 시간이 애매하다.
그 직원 말대로 2시에 가서 표를 사면,
2시부터 공연 끝나는 6시까지는
그 근방에서 시간을 보내야 하니,
그럼 그 날은 박물관도 못가고,
필하모니 말고 다른 건 아무것도 못하겠다.
저녁에 숙소에서 빈필 홈페이지 가보니,
거기서 입석표를 예매할 수 있다.
'입석표(Standing ticket)가 있었네!'
라고 놀라며 검색해보니,
빈필 입석 관람에 대한 평이 나쁘지 않다.
다음날 필하모니 가서 표를 살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으니,
입석표라도 살까 싶어 시도했는데,
컴퓨터가 자꾸 셧다운되서 실패했다.
그래도 필하모니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다음 날 일요일 아침 미사 갔다가
10시 10분쯤부터
어제 그 필하모니 매표소 가서 줄을 섰다.
인터넷 홈페이지엔
매표소가 좀 더 일찍 문을 여는 걸로
나와 있는데다가,
11시에는 오케스트라 정기공연이 시작하니,
공연 시간까지 30분이 채 안 남았는데,
매표소를 안 연다.
영어와 어떤 다른 게르만어를 섞어 하던,
내 뒤에 줄 서있던 남녀 중 여자가 영어로
"왜 이렇게 문을 안 열지?”
라고 말하니, 남자가
"오스트리아인은 독일인이 아니니까."
라고 말했는데,
나도 빈에서 계속 느끼던 거라,
혼자 괜히 피식 웃었다.
그리고 같이 줄 서던 사람들이
갑자기 막 어디 다른 데를 간다.
내 뒤에 있던 남녀도 어딘가로 갔다.
그리고 한 50-60대 되어 보이는,
제복 입은 남자 직원분이
내 앞에 서 있던 60-70대 되는 여자분들에게
천천히 독일어로 뭐라고 하면서,
손으로 방향을 가리키는데,
독일어는 예전에 한달 배운 게 다라,
잘은 모르지만,
"5분(Fünf Minuten)",
"콘서트(Konzert),
"티켓(Tickets)",
"매표소(Kasse)"
같은 게 들리는 걸로 봐서,
표 끊는 곳이 다른 곳이고,
5분 정도 가면 된다고 설명하는 듯하다.
유심히 그 얘기를 듣던 내가
정확하게 주소가 어떻게 되냐고 영어로 물었더니,
영어로 그냥 코너만 돌면 바로 보인다고,
어르신들은 5분 걸리지만,
당신은 2분이면 갈 거라고 농담한다.
아니 근데
사람들이 그렇게 줄 서 있는 걸 뻔히 보면서도
왜 그걸 영어로 일찍 알려주거나,
혹은 그 매표소처럼 보이는 장소에
써 붙여 놓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 Kasse(티켓)이라고 써 있는,
그 전날 Mahler Concert Hall 물어봤을 때,
누군가는 표를 받아가던
그 매표소처럼 보이는 장소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아, 정말 여기는 생각보다 시스템이 이상하다.
그 직원분이 알려준 대로,
코너를 돌아 오페른링(Opernringer) 대로로
나오니 정말 빈필 매표소가 가까이 있다.
그 전날 그 옆을 지났는데,
거기가 매표소인지 몰랐었다.
여기가 오페른링(Opernringer) 대로의 중앙산책로.
여기가 빈필 매표소다.
빈필 매표소 앞 바닥에는
유명 클래식 작곡가와 지휘자의
별 모양 명패가 붙어 있다.
그 중엔 "빈 필하모니"도 있다.
하긴 빈필 자체가 스타이긴 하다.
이제 더 이상 오스트리아 시스템의
합리성이나 개방성을 기대하지 않게 된 나는
혹시나 낮 3시 30분 공연을 보려면,
전날 빈필 경비의 말대로,
2시에 다시 와서
이 부조리극을 또 해야 되는 게 아닌가 싶어서,
그리고 오후에 박물관도 가보고 싶어서,
그냥 11시 공연 입석 티켓을 사기로 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과정에 비하면
믿을 수 없이 쉽고 빠르게
빈필 입석 티켓을 5유로에 구매했고,
20분 후 시작하는 콘서트를 보러 빈필에 갔다.
1870년 오페라 하우스보다 1년 늦게,
덴마크 건축가에 의해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건설된 빈필 건물은
비너 뮤직버라인(Wiener Musikverein),
즉 "빈 음악협회"로 불린다.
빈필 Garderobe에선
가방 맡기는데 85센트를 내야 한다.
전날 오페라하우스에서
작은 짐도 맡겨야 했던 걸 떠올리고,
난 그냥 자발적으로 짐을 맡겼는데,
여기는 좀 큰 가방을 들고 들어가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빈 오페라하우스보다 좀 더 직원이 많고,
좀 더 방문객들에게 엄격하게 대하고,
그들이 규정과 지시를 잘 지키는지
좀 더 감시를 열심히 하는 분위기다.
빈필은 겉모습은 규모도 작고,
많이 화려하지 않은데,
정기공연 장소 “Great Hall" (Großer Saal)"은
홀 자체는 아담해도,
그 장식이 무척 화려해서 입이 떡 벌어진다.
마치 수수하고 소박한 친구가
알고 보니 엄청난 부자였던 것 같은,
말 없이 조용하던 친구가
알고 보니 엄청난 글솜씨의 소유자였던 것 같은,
눈에 빛도 없고 좀 어벙해 보이던 친구가
알고 보니 대단한 천재였던 것 같은 그런 느낌으로,
밖에는 좀 더 소박하지만,
내부는 내가 지금까지 가 본
극장과 필하모니 통틀어서 가장 아름다운 것 같다.
19세기 이전 건설된 유럽의 오페라-발레 극장은
고풍스러운 구조에
아름다운 그림과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는 게
일반적이지만,
오케스트라 연주를 하는 필하모니 콘서트홀은
내부 장식이 대체로 소박하기 때문에,
빈필 콘서트홀의 그 화려한 인테리어가
더 경이롭게 다가왔던 것 같기도 하다.
안에서 사진 찍는 게 금지되어 있어서,
내부 사진은 안 찍었는데,
(물론 그 와중에도 기어이 찍는 사람도 있긴 하다)
대충 아래 사진 분위기에,
실제로 보면 입체감이 더해져서
몇 배는 더 아름답다.
물론 연주자들의 실력이
세계 최고급이어서 또 그렇겠지만,
이런 작은 장식이 많아서
소리가 부딪혔을 때 반향이 커서 그런지,
음향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건축가가 만들었다는
이 음악홀의 연주소리는
정말 귀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깨끗하고 울림이 좋다.
단 하나의 아쉬움은
내가 "입석표"였다는 거다.
공연 시작 15분 정도 전에 홀에 들어갔는데,
입석 관람객이 이미 많아서
나는 홀 제일 뒤 가벽에 등을 좀 기대고 섰다.
빈필의 입석은 1층 가장 뒷자리인데,
빈필의 입석과 일반석이
들어가는 입구도 완전 분리되어 있고,
시위할 때 치는 바리케이드 같은 걸로
물리적 공간도 분리되어 있다.
그리고 직원 한 분이 입석 쪽으로 뒤돌아서서
무표정의 매서운 눈으로 관객들을 감시하며,
그 바리케이드 안으로 아무도 못 들어오게,
시끄럽게 하지 못하게,
그리고 사진 찍지 못하게 제재한다.
빈필은 일반 좌석과 입석이
완벽하게 구분된 서로 다른 세계, 다른 계급이다.
내가 이 이야기를 했더니,
아는 불문과 선생님이
"프랑스 극장 입석은 서 있다가 빈 자리 있거나
중간에 자리 나면 가서 앉을 수 있는데."
라고 반응했다.
아, 그러고 보니 러시아도 프랑스랑 비슷했다.
나도 예전에 러시아 볼쇼이 극장에서,
은퇴한 연금생활자임과 학생임을 증명하는
신분증을 가져가면,
하루 몇 십 명씩 제한적으로 배부해주는
입석표로 공연을 본 적이 있는데,
러시아 입석도 지정좌석이 없다 뿐
입장 후에는 빈 자리가 있으면 앉을 수 있다.
그래서 내가 "입석"에 대한 거부감 없이,
빈필 입석도 괜찮겠다 생각했나 보다.
빈필이 처음 연주한 곡은
헝가리 작곡가 바르톡이었는데,
내가 바르톡은 들은 적이 거의 없어
음악은 매우 낯선데도 연주가 정말 좋다.
무대 끝에서 끝까지 꽉 차게 자리잡은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부드러우면서 세련됐고,
소리가 크고, 울림이 좋고,
콘서트홀을 꽉 채운다.
아직 베를린 필이나
미국 보스턴과 네덜란드의 유명한 콘서트홀은
가보지 못한 나는
이렇게 콘서트 홀을 꽉 채우는
탱탱한 오케스트라 연주를 들어본 적이 없다.
'이래서 빈필, 빈필 하는구나'
감동했다.
쉬는 시간인 Entreact에 사람들이 좀 빠지길래,
앞쪽으로 가서
바리케이드 바로 뒤에 자리를 잡았다.
Entreact 끝나고 입석의 사람들이 많이 줄었다.
아마도 두 시간 이상 서 있기에는
몸이 너무 약한 사람들,
클래식 음악에 큰 관심 없이
'빈필이나 한 번 구경가보자'
하고 온 관광객이 빠졌지 싶다.
Entreact 끝나고
두 번째 곡은 차이코프스키다.
차이코프스키는 그래도 귀에 익숙했는데,
입석도 앞쪽에서 들으니,
소리의 울림이 훨씬 좋다.
저 앞쪽에서 들으면 소리가 얼마나 좋을까?
그런 부러운 시선으로 내 앞 일반석을 둘러보니,
대부분 60-70대로 연세가 지긋하시다.
한국의 클래식 공연은 그 정도는 아닌데,
러시아, 체코, 불가리아, 크로아티아도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내가 오전 11시 연주에 가서 그런지,
빈필은 관객 평균 연령이 매우 높다.
고상한 옷을 차려 입고 우아하게 앉아있는
그분들을 보니,
너무 캐주얼한 옷차림에
먼지 묻은 운동화를 신고 있는 내가
그 화려한 금빛 콘서트홀뿐 아니라,
그분들과도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괜히 물 흐리지 않고,
입석으로 보기 잘한 것 같다.
그렇게 바리케이트 뒤에서 열심히 듣고 있는데,
3악장 끝나고 입석에 있던 어떤 사람들이
열렬히 크게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몇몇은 끝난 줄 알고 나가려고 한다.
보통 교향악은 4악장까지 있는데,
이건 3악장짜리였나 의아하게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모처럼 클래식 "구경"하러 온
어떤 용감한 무식쟁이가
잘 모르면서 박수를 친 거다.
같은 입석 자리라 부끄럽기도 하고,
빈필 "구경"온 속물이 나 하나만은 아니구나 싶어
한편으로 좀 안심도 된다.
하지만 가장 지배적인 감정은 짜증이었다.
그 박수소리가 사라지고 난 후
한참이 지나고 나서도
4악장은 시작이 되지 않다가
결국 다시 시작되었고,
그 박수 사건은 짜증나는 옥의 티였지만,
그래도 빈필의 연주는 정말 정말 정말 좋았다.
공연이 끝나고 나서
다들 감격해서
그리고 이번엔 마음놓고 크게 박수를 쳤고,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다 퇴장하고 나서도
사람들은 계속 박수를 쳤다.
나도 철제 바리케이드 뒤에 서서,
마치 엔딩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영화관을 못 떠나는 관객처럼,
그렇게 사람들이 거의 다 나갈 때까지
그 음악홀의 디테일을 찬찬히 눈에 담고,
그 아름다운 음악의 여운을 마음에 담고 있었다.
"음악의 도시" 빈에서는
음악가들과 관련한
동상이나 기념비도 적잖이 만나는데,
이건 빈필 남쪽 길 건너편 Karlsplatz의
공원에 있는 브람스(Johannes Brahms) 동상.
브람스는 독일 출신이지만
빈에서 오랜 세월을 보냈고,
이 동상은 20세기 초에 세워진 거다.
이건 Burggarten에 있는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동상.
잘츠부르크 출신인 모차르트는
"음악 도시" 빈에서 말년을 보냈고,
이 동상은
빈에서 가장 인기 있는 포토존 중 하나다.
이건 구시가 다니다가 발견한
폴란드 작곡가 쇼팽(Fryderyk Chopin) 기념비다.
쇼팽도 1930-1931년 빈에 머물렀다.
2박 3일의 빈 체류를 마치고
자그레브행 버스를 타러 터미널에 갔는데,
인터넷으로 티켓을 예매했는데도
터미널 안의 작은 방에 들어가
그 인터넷 티켓과 여권을 보여주며,
체크인(Check-in)을 따로 해야 한다.
그리고 그 체크인을 마치면
작은 종이 번호표를 준다.
그 번호표를 버스 차장에게 주니,
버스에 오르라고 했다.
다른 도시에선 그거 그냥 차장이 직접 하는데,
그냥 다른 데처럼
차장이 인터넷 티켓 스캔하고
여권 확인해도 되지 않았을까?
도대체 왜 그런 복잡한 과정이
필요한지 잘 모르겠다.
크로아티아에 있으면서,
이상하게도 사람들이 종이와 서류를 좋아한다고,
이해할 수 없게 절차가 복잡하고,
관료주의가 심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마 그것도
합스부르그, 오스트리아 제국의 잔재였나 보다.
나중에 여행해보니,
다른 구 유고슬라비아 국가들도 그랬었다.
예전에 프라하에서 체코어 연수할 때,
어떤 어휘 연습문제에서
여러 나라에 대한 설명하면서,
Rakušané jsou jako Češi,
ale nechtějí to vědět.
즉, “오스트리아인은 체코인 같은데, 그걸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라고 표현해서,
그 체코식 유머를 보고, 웃었던 기억이 있다.
그 전에 난
‘오스트리아인이 오스트리아 사는 독일인’
’Österreich[외스터라이히]라는 표현대로
오스트리아는 “동쪽의 독일”’
이라 생각했어서,
“이게 정말이냐(Je to pravda)?”
라고 물었었다.
그때 체코 선생님이
“오스트리아인은 자기가 독일인이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었다.
그런 얘기를 들어서 그런지,
아님 이제 유럽을 좀 더 알게 되어 그런지,
오스트리아에서 독일어를 사용하긴 해도,
여러모로 오스트리아가 독일은 아니라는 느낌이다.
그런 독일스럽지 않음이
항상 짜증이 나는 것만은 아니고,
피식 웃음을 자아내는 에피소드도 있었다.
빈 구시가의 그냥 보통 카페에서 난
빈식 돈카스인 비너 슈니첼(Wiener Schnitzel)과
우리가 흔히 "비엔나 커피"라고 하지만,
사실 그것과는 조금 다른 빈식 카푸치노,
비너 멜랑지(Wiener Melange)를 마셨는데,
자기네 가게에선
총액이 15유로인가 20유로인가 넘으면
Stamperl이란 술을 한잔 준다며,
마시겠냐고 묻는다.
그게 어떤 술인지도 모르고,
원래 혼자서는 술 안 마시지만,
나 혼자는 해 볼 생각하지 않았을,
뭐 그런 나 답지 않으면서,
또 "뭔가 오스트리아적"인 걸
경험할 기회는 놓치고 싶지 않아서,
한번 마셔보겠다고 하고,
좀 도수가 높은 그 술을 받아
천천히 음미하며 마셨는데,
나중에 계산서 받아보니,
총액이 그 Stamperl 서비스 기준인
15유로인가 20유로에 좀 못 미친다.
뭔가 대강 계산했거나,
아님 팁까지 먼저 계산했거나,
아님 한국인들처럼 그냥 좀 인심을 썼거나
뭐 그랬나보다.
그럼 그런 기준 얘기하지 말고 그냥 주던지 하지,
여기는 이런 것까지 뭔가 좀 허술하다.
하지만 그런 독일인처럼 정확하지 않은,
어딘지 모를 허술함에서 나온 인심이
물론 기분 나쁘진 않았다.
약간의 취기 때문에 기분이 좀 업되어서,
그날 매우 기분 좋게 빈 시내를 돌아다녔었다.
사실 독일 또한 오래 전 유럽배낭여행 갈 때
잠시 들른 게 전부라서,
그리고는 러시아에서 본,
똑부러지는 독일인들에게서 받은 인상이 전부라서,
어쩜 내가 독일인의 합리성에 대해서
과장된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건지도 모르지만,
여러모로 오스트리아는 좀 허술하고,
시스템은 덜 체계적이고,
시간관념도 정확하지 않은 것이,
오스트리아인은 독일인이 아니라,
그 체코어 연습문제에 나온 문장 말마따나,
독일어를 하는 슬라브인에 더 가까운 것 같다.
구글에 검색해보니,
오스트리아에 대해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오스트리아가 18-19세기
주변 슬라브 국가들을 지배한 탓에,
슬라브 국가들에 오스트리아적 건축의 유산이
많이 남아 있어서,
사실 빈의 겉모습 자체가
근처 중부유럽에 자리잡은
슬라브 국가 및 다른 주변도시들과
많이 비슷하기도 하다.
물론 그런 슬라브 도시들의 건축들이
원조를 따라가지 못해서,
오스트리아 빈의 건축들이
훨씬 더 화려하고, 거대하고, 감탄을 자아낸다.
예전 배낭여행 때는 시계 방향으로 유럽을 돌며,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먼저 들러서,
오스트리아 빈의 건물들이
부다페스트하고 비슷한
흔한 유럽 건축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건축 양식과 건축 시기가 비슷하니,
여전히 비슷해 보이는 건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오히려 빈의 건축들이
더 아름답고 다채로운 게
이제는 보인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건물들 안에 자리잡은
박물관들의 전시물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그래서 다음 포스트에서는
그 안팎으로 아름다운
빈의 박물관들을 두어 곳 둘러볼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