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문화유산 너머 다양하고 생기 있는 현재의 얼굴들
(이전 포스트에서 계속)
인터넷에 “베르겐(Bergen)”을 검색하면
무엇보다도 알록달록 예쁜
브뤼겐(Bryggen) 사진이 나온다.
그 모습이 사진발만은 아니어서,
비현실적으로 예쁜 브뤼겐 사진에 반해
막연히 언젠가 노르웨이 가봐야겠다 생각한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 근사한 실물이었지만,
그리고 유네스코가 보증하는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오래된 부두인 브뤼겐은
관광지로서 좀 평면적이다.
그냥 봐도 예쁘고,
예쁜 상점에서 예쁜 것도 많이 팔고,
중간에 미로 같은 숨은 통로도 있지만,
그저 그렇게 예쁜 걸 바라볼 뿐,
딱히 거기서 무언가 적극적으로 할 게 없고,
어제 완공되었다 해도 어색하지 않을
탈시간적인 친환경 건축의 느낌이 강해서
딱히 옛날 감성이나 역사도 느끼기 어렵다.
수도 오슬로는 사진발이 특별히 좋은 데는 없어도
바삐 바삐 넓게 넓게 도시 구석구석 다니면서,
다양한 풍경과
다양한 박물관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는데,
제2도시 베르겐은
브뤼겐으로 포토제닉한 한 방은 있지만,
브뤼겐에 관광의 포커스가 집중되어,
그 밖의 도시 구석구석을 다니게 하는 동력은 없다.
그래서 그런지 오슬로는 좀 더 크고 동적이고,
베르겐은 좀 더 작고 정적인 느낌이다.
인생샷 만드는 시각적 아름다움보다
개성 있고 다양한 색다른 풍경과
여러 감각으로 경험하는 여행에 더 끌리는 나는,
피오르드 접근 가능성이나 이런 거 제외하고,
그냥 여행지로서 도시 자체는
베르겐보다 오슬로가 좀 더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처음엔
오슬로에 좀 더 오래 머물 걸 그랬다 싶었다.
물론 이건 오슬로는 별 기대 없이,
베르겐은 큰 기대를 가지고 여행을 시작해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그건 어쩜 도시가 무엇을 가졌느냐
자체의 차이가 아니라,
그 도시가 자신을 어떻게 보여주는가,
즉, 여행 인프라의 차이인 것도 같다.
전인구의 1/5이 거주하는 수도와
그 수도 인구의 1/3도 안 되는 사람이 거주하는
제2도시는 예산과 인력에서 큰 차이가 날 테니,
오슬로가 베르겐보다 여행 인프라가 좋은 건
어쩜 너무 당연할지도 모른다.
난 사실 이틀 연속 피오르드 투어 하느라
베르겐을 구석구석 잘 보지 못하긴 했지만,
그래도 나중에 피오르드 투어 후
해가 자정 가까이 지는 6월의 백야를 이용해서
밤늦게까지 틈틈이 여기저기 돌아다녀보니,
사진 검색에는 잘 안 나오는,
브뤼겐 밖도 예쁘고 재밌는 것들이 많다.
브뤼겐 부두가 너무 강렬해서,
세워진 지 천년이나 된,
한 국가의 제2도시나 되는 거대 도시가 가진
다른 얼굴들은 너무 가려져 있는데,
베르겐 여기저기를 부지런히 돌아다니면
비로소 그 다양한 표정을 볼 수 있다.
알고 보니,
베르겐이 정적인 도시가 아니라,
내가 정적인 여행자였던 거다.
그걸 뒤늦게 경험하고 나서야,
이틀 연속 피오르드 투어를 하고 다니느라,
3박 4일간 머물렀으면서도
베르겐을 제대로 못 봤다는 아쉬움이 남았다.
오슬로도 오슬로지만
베르겐에 좀 더 오래 머무를 걸 그랬다.
다시 오슬로에 갈 기회가 쉽게 또 오지 않겠지만,
다시 베르겐 갈 가능성은
그나마 더 낮을 테니 말이다.
아무튼 이번 포스트에선
그때 그렇게 시간을 쪼개어 조금씩 구경한,
브뤼겐 밖 베르겐의 다양한 얼굴을 둘러보겠다.
아래 지도의 주황색 큰 번호가
이 포스트의 소제목 번호이다.
(하늘색은 지난 포스트의 소제목 번호다)
지난 포스트에서 언급한 것처럼
브뤼겐(Bryggen)은 “부두”라는 뜻이고,
보통은 유네스코 문화유산인 그 브뤼겐 말고,
그 근처 부두를
포괄적으로 브뤼겐으로 여기는 관광객이 많고,
사실 나도 그랬는데,
유네스코 문화유산 브뤼겐은 부두 북쪽의 일부이고,
부두 동쪽과 남쪽은
잘 보면 전혀 딴 세상이다.
우선 브뤼겐 밖 동쪽, 남쪽 부두 근처엔
현지인의 비중이 높고,
건물도 좀 더 현대적이고 현실적이고,
또 생활의 현장 냄새가,
진짜 사람이 사는 공간의 느낌이 강하게 난다,
아래 사진 왼쪽에 높이와 모양이 비슷한
갈색, 회색 건물이 북쪽 부두고,
오른쪽이 동쪽 부두인데,
브뤼겐 동쪽은 집 모양도 높이도 불규칙하고,
그래서 좀 더 풍경이 자연스럽다.
이건 플뢰엔 산에 올라가면서 찍은 사진인데,
사진 왼쪽이 동쪽 부두,
사진 위쪽이 남쪽 부두,
그 사이 낮은 붉은 천막 지붕은 어시장이다.
항구 동쪽에 좀 더 가까이 가보면,
이런 풍경이다.
서북쪽 브뤼겐처럼 한결 같이 지붕은 세모지만,
확실히 요즘 건축이다.
그 첫 골목으로 걸어 들어가면,
작고 알록달록 예쁜 집들이 나오는데,
그 입구에 비싼 가격으로 악명높은
“북유럽 맥도널드” 베르겐 지점이 보인다.
예전에 배낭여행 때는
그게 제일 실패 가능성이 적고 또 배도 불러서,
거의 매일이다시피 맥도널드를 애용했지만,
이제는 그냥 아주 간단한 음식이라도
맥도널드보다는 현지식을 사 먹기 때문에
그 유명한 “북유럽 맥도널드”에
나는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
적어도 밖에서 보기에는
이 동네랑 별로 안 어울리는 듯한,
빨강 바탕 위 커다란 노란색 М이
멀리서도 눈에 확 들어오고,
브뤼겐 구경하다 출출해진 관광객들이 들르기 좋은
매우 영리한 입지에 자리 잡은 것 같다.
나중에 다녀보니 맥도널드가
베르겐엔 여기 말고 시내 쪽에 하나가 더 있던데,
거기도 입지가 좋다.
가격은 찾아보니,
1인분에 약 90크로네(약 12,000원)란다.
그 정도면 베르겐에선 꽤 저렴한 한 끼다.
그 맥도널드 옆 건물의
커다란 물고기를 품에 안은 여자의
그래피티가 난 좋았다.
어딘가 모르게 촌스럽기도 하고,
어디서 많이 본, 좀 뻔한 구도 같기도 한,
복고적인 그 그래피티에서
삶의 생기와 일상의 숭고함이 느껴진다.
골목 쪽에서 보면,
이제 이 골목을 빠져나가면 만나게 될
동쪽 부두 위 어시장의 등장을 알리는,
예술로 형상화된 이정표 같기도 하다.
그 골목 안쪽으로 좀 더 걸어 들어가면,
부두 쪽에서 찍은 사진마다 위로 빼꼼히 나왔던
그 십자가 달린 초록 지붕의 성십자 교회
(Holy Cross Church, Korskirken)가 보인다.
여러 번 파손되었다가 다시 짓기를 반복했는데,
가장 오래된 부분은
무려 12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단다.
처음엔 가톨릭 성당으로 지어졌지만,
종교개혁 이후
노르웨이 루터교 복음 교회가 되었다.
내가 갔을 때는 문이 닫혀 있었고,
여기저기 공사를 해서 어수선해 보였는데,
그날 저녁, 교회 수리 비용 모금을 위한
콘서트를 한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부두 동쪽의 또 다른 끝의 골목에는 광장이 있고,
홀베르그(Ludvig Holberg) 동상이 서 있다.
그 동상이 바라보는 곳에 어시장이 있다.
홀베르그는 17세기 활동한 베르겐 출신 작가이다.
당시 덴마크와 노르웨이가 하나의 국가였기 때문에,
덴마크-노르웨이 작가로 불리는 그는
덴마크와 노르웨이 현대 문학의 창시자란다.
홀베르그 동상 남쪽에는 19세기 말이나
20세기 초의 신 고전주의가 가미된 것 같은,
고풍스러운 건물이 하나 있는데,
무슨 중요한 공공건물인가 했더니,
그냥 식당과 상점이 있는 상업적 건물이었다.
그 상업적 건물의 길 건너에는
베르겐의 가장 중요한 관광지 중 하나인,
알록달록한 벽 밑에 투명 유리벽이 있는
실내 어시장(Fish market, Mathallen Food Hall) 건물이 자리 잡고 있다.
일 년 내내 문을 여는 실내 어시장은
2012년에 새로 생겼다는데,
안에 들어가면 식당도 있고,
올리브 오일, 캐비어 같은 가공식품도 판매한다.
요일에 따라 개폐장 시간이 다른데,
오전 9시-11시에 문을 열고,
밤 10-11시에 문을 닫는다.
그 현대적인 쾌적한 실내 어시장 북쪽에 있는
야외 어시장(Fisketorget, Outdoor Fish Market)이
좀 더 해산물에 특성화된 어시장이고,
외관도 우리에게 익숙한 어시장의 전형에 가깝다.
12-13세기부터 형성된 역사적인 장소라는데,
걸어보면 시장 특유의 활기가 넘친다.
단, 야외다 보니,
5월부터 9월까지만 문을 연단다.
영업시간은 아침 8시부터 밤 11시까지다.
노르웨이답게 어시장 물건 가격이 매우 비싸고,
딱히 혼자서 해산물 요리를 해먹기도 뭐해서,
나는 그냥 구경만 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어시장은 이미 관광명소라,
다른 상점에 비해 해산물 가격이 훨씬 비싸서,
현지인들은 여기서 쇼핑을 하지 않는단다.
나는 베르겐 있는 동안
그냥 평범한 식당에서 생선 수프를 먹었는데,
크림을 넣어 만든 생선 수프가 정말 맛있었다.
서늘한 날씨 때문에 약간 몸이 으슬으슬했는데,
그걸 먹고 나니 몸이 다시 따뜻해지고 기운이 났다.
생선 수프(Bergen Fish Soup, Bergensk fiskesuppe)는 베르겐 대표 음식이라,
아무 식당에서나 흔하게 먹을 수 있고,
가격도 대체로 만원 내외인 것 같다.
값싸고 맛있는 현지 해산물은 다른 곳에서 맛보고,
베르겐 어시장에서는
괜히 현지인들도 하지 않는 비싼 쇼핑을 하기보다
차가운 북유럽에 만나게 될지 몰랐던,
그 오래된 활기와 치열한 생활의 냄새만 느껴도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실내 어시장 서쪽으로 펼쳐지는 남쪽 부두는
이제 건물들 지붕도 20세기적 사각형이고,
전반적으로 매우 현대적인 모습이다.
공공시설이나 관광지는 거의 없고,
거의 상업시설인데,
그래도 알록달록한 색깔에
높이를 맞춘 듯한 안정적인 스카이라인에
오목조목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어
그 자체도 예쁘지만,
그보다 좀 더 예쁜 부두 건너편
브뤼겐을 한눈에 보기에,
그리고 사진에 담기에 최적의 장소이다.
그리고 그 남쪽,
즉 부두 뒤쪽은 베르겐 시내로도 연결된다.
아래 사진에 보이는 부두가
브뤼겐 사진 찍기 가장 좋은 장소인 것 같다.
그 사진 촬영 핫스팟 뒤에 있는 흰색 건물은
뷔어코르프스 박물관(Buekorps Museum,Buekorpsmuseet)이다.
뷔어코르프스는 7-20세의 청소년들이
군사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다양한 활동을 하는,
19세기 중반 결성된
베르겐 특유의 청소년 조직이라고 한다.
박물관 건물 자체도
16세기에 처음 지어진 역사적 건축이다.
https://buekorps.webs.com/english.htm
거기서 멀지 않은 곳에 보이는 교회는
"새 교회"라는 의미의 뉘키르켄(Nykirken)이다.
17세기에 처음 이 교회가 지어졌을 때,
이미 교회가 많이 있어서
"새 교회"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단다.
그러고 보니,
크로아티아 시베니크에도
새 성당(Nova crkva)이라는 이름의
15-16세기 성당이 있었다.
더 오래된 베르겐 교회들이
원래 가톨릭 성당이었다가
종교개혁 이후 노르웨이 복음 교회가 된 것에 비해
이 교회는 처음부터 개신교 교회로 건설되었으니,
"새 교회"가 맞는 것 같다.
1000년의 역사를 가진 베르겐은
사람들이 모여 살며 자연스럽게 생긴
좁고 굽은 골목이 많은데,
그 좁은 골목의 건물들이 작고 또 예쁘고,
서로 조화를 이루어
골목 구경하는 재미가 솔솔하다.
일반주택이건 카페나 레스토랑이건
건물 밖 목재 디테일과 세모 지붕이 특징적이다.
브뤼겐만큼은 아니더라도,
지은 지 꽤 오래되어 보이는,
브뤼겐 동쪽 뒷골목과
브뤼겐 뒤 북쪽과 서쪽에 있는 뒷골목의 집들이
알록달록 붙어 있는 게 참 예쁘고,
그냥 베르겐 주변 7개의 산속에,
쿠키 속 초코칩처럼 박혀 있는 집들도 예쁘다.
중간에 좀 색다른 석조건축이 있어서 보니,
베르겐 시민 회관(Kulturhuset Gimle)이라는데,
뭐 하는 데인지는 모르지만,
다른 세모 지붕들과 잘 어울린다.
이건 성십자 교회 뒤에 있던 비석이다.
뭐라고 쓰여 있는지 무지 궁금한데,
노르웨이어라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베르겐에선 작고 아기자기한 목조 외벽 건축 사이
도시 여기저기에 그래피티가 많이 보인다.
그리고 그게 대체로 선명하고 예뻐서
베르겐 골목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벽에 그린 다양한 그래피티도 기분 좋게 감상했다.
오슬로에서는 그래피티를 한 번도 못 본 것 같은데,
오슬로뿐 아니라 다른 유럽 도시에 비해서도
베르겐엔 그래피티가 많다고 생각했는데,
2000년 그 유명한 실험적 아티스트
뱅크시(Banksy)가 다녀간 이후,
그에게서 영감을 받은 베르겐 현지 예술가들이
그래피티를 그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뱅크시는 보통 자기를 노출하지 않는데,
어떻게 그가 다녀간 걸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그가 직접 그렇게 이야기했거나,
나중에 그의 그림체를 보고 알지 않았을까 싶다)
2000년 지금처럼 유명해지기 전,
무명에 가까운 뱅크시가
베르겐 곳곳에 그린 그래피티는
그냥 다 지워져 버려
지금은 없다.
그걸 나중에 알고 나서 사람들이 각성한 건지,
시 차원에서도 막거나 지우지 않아서,
베르겐은
최근 노르웨이의 그래피티 중심지가 됐다.
그렇게 암묵적으로 육성되어서 그런지,
다른 도시의 그래피티보다
좀 더 깔끔하고 수준이 높고 좀 더 예술적이다
베르겐 시내의 중심은
이름 그대로인 센트룸(Sentrum) 지역으로,
여러 현대 도시에서 흔히 보는
문화적, 상업적 시설들이 이 곳에 있고,
그래서 센트룸은
현대 유럽 도시들과 비슷하게 생겼다.
어시장에서 남쪽으로 난 길을 따라 걸으면
"공공 광장"이라는 의미의
Torgallmenningen이라는
넓고 긴 광장이 나오는데,
여기가 센트룸 안에서도 또 중심부인 것 같다.
20세기초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었다는 건축들과
20세기 후반-21세기 초반의 현대적인 건축들이
어우러져 있다.
그 길에서 동쪽으로 가면
커다란 호수가 있는 공원이 나오고
그 북서쪽에 심상치 않은 외관의
음악 파빌리온(Musikkpaviljongen)이 보인다.
19세기 말 무어 양식 건축이라는데,
색깔이나 모양이 수수한 이 공원에 어울리지 않고,
너무 튄다 했더니,
이 파빌리온이 여기 설치될 때는
공원이 꾸밈이 많은 낭만주의 스타일의
프랑스식 정원이었다나보다.
이 파빌리온이 있는
도시공원(Byparken, City Park)은
이제 꾸밈이 많지 않은 자연스러운 작은 공원으로,
중심에는 큰 연못 (혹은 작은 호수)가 있고,
그 주위에 큰 나무들이 심어진 산책로가 있다.
너무 근사하지도 너무 초라하지도 않은,
그냥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기 딱 좋은 곳이다
그 공원 남쪽에는
19세기 말 신 르네상스 양식으로 건축했다는,
고전적이면서도 현대적인
서 노르웨이 장식 미술관(The West Norway Museum of Decorative Art, Vestlandske kunstindustrimuseum)이 있다.
그 동쪽으로는 좀 더 현대적인 건축물 안의
베르겐 미술관 KODE 건물이 계속 이어진다.
오슬로에서 미술관을 많이 가서,
그리고 낮에 피오르드 구경 갔다 돌아와서
주로 저녁에만 시내에 머무느라 시간도 없어서
베르겐에선 그냥 밖에서 미술관 건물만 구경했다.
베르겐 미술관 남쪽에는
베르겐 출신 작곡가
그리그(Edvard Grieg)의 이름을 딴
그리그 홀(Grieg Hall, Grieghallen)이 있다.
베르겐 필하모니가 정기 공연을 하는 곳이다.
크로아티아 자그레브 음악홀에서
베르겐 필하모니 연주를 보러 간 적이 있어서
이걸 보자마자 괜히 반가웠다.
하지만 시즌이 아니라,
여기도 음악은 못 듣고 그냥 건물만 구경했다.
1970년에 지어졌다는데,
최근에 지어진 오슬로 오페라하우스에 비해서
여러모로 아쉬운 현대 건축이다.
하지만 크로아티아에서 들은
베르겐 필하모니 연주는 아주 근사했고,
이 건축에 대한 아쉬움은
그 음악에 대한 좋은 기억으로 상쇄되고도 남았다.
시민 공원에서 서쪽으로 가면
또 다른 중요한 문화 시설인
베르겐 국립극장(Den Nationale Scene, National Theater)이 나온다.
1850년에 시작된,
노르웨이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이란다.
극장 앞엔 어김없이
역시나 세계적인 노르웨이 극작가
입센(Ibsen)의 동상이 서 있다.
베르겐이나 오슬로나 노르웨이 극장에선
입센으로부터 벗어날 길이 없는 것 같다.
국립극장 서쪽에는 성 요한 교회(St. John's Church, Johanneskirken)가 있다.
노르웨이 복음주의 교회로
19세기 말에 건설된 꽤 젊은 교회다.
성 요한 교회는
멀리서도 눈에 띄는 매우 높은 건축이라,
계단 위로 올라가면,
전망이 꽤 좋았다.
하지만 베르겐의 전망은
뭐니 뭐니 해도 플뢰엔 산이다.
베르겐 체류 마지막 저녁,
플뢰엔(Fløyen)산에 올라갔다.
플뢰엔 산은 베르겐을 둘러싸고 있다는
7개의 산 중의 하나로
브뤼겐과 시내에서 가장 가까운 산이라,
베르겐 전경과 브뤼겐을 한눈에 볼 수 있다.
그리고 아래 사진에서 보이는 것처럼,
브뤼겐의 훌륭한 뒷배경이 되기도 한다.
플뢰엔 산은 해발 400미터로,
높이는 두브로브니크의 스르지 산과 비슷하다.
정상에 오르는 방법도 스르지 산과 비슷하다.
무언가를 타거나, 걸어 올라가거나.
플뢰이바넨(Fløibanen) 푸니쿨라라는
레일 달린 케이블카를 타면
5-8분 만에 정상이 오른다.
플뢰이바넨은 브뤼겐 뒷길 동쪽에 있다.
스타벅스 바로 뒤쪽이다.
2019년 현재 일반 편도가
비수기 50크로네(약 6,500원),
성수기 65크로네(약 8,000원),
왕복이 각각 95크로네, 125크로네다.
평일은 아침 7:30 - 밤 11:00,
주말은 아침 8:00 - 밤 11:00 운행한다.
나는 한 번에 빨리 올라가 버리는 것보다는
천천히 풍경을 음미하는 걸 선호해서,
플뢰엔 뒤로 난 길로 걸어 올라갔다.
대체로 40분 정도 걸린다고 하던데,
나는 1시간 정도 걸린 것 같다.
비가 오다 그치다 해서 날씨는 좀 이상했지만,
그래도 걸어 올라가기 나쁘진 않았다.
올라가는 길도 복잡하지 않아,
그냥 지그재그 산책로를 따라 걸어 올라가면 된다.
처음에는 아래 사진 같은 길을 걸어 올라가다가,
교회 같이 생긴 삼각 지붕의 흰색 건물에 다다르면,
Skansen이라는 큰 길이 나오면서,
산으로 올라가는 길은 좀 더 좁아지고,
나무는 더 무성해진다.
교회처럼 생긴 이 흰 건물은
옛날 소방서(old fire station, Brandstasjon)다.
주로 목조건물이었던 베르겐은
여러 번 대화재로 재가 되었고,
그런 베르겐에서 가장 중요한 관공서 중 하나였을
이 소방서는 19세기 말에 건설되었다고 한다.
그 옛날 소방서까지가 10-15분 거리였던 것 같다.
그 아래도 그렇고 그 위도 그렇고
플뢰엔으로 오르는 길은 예상대로 전망이 근사해서,
걸어 올라가길 잘했다는 생각을 계속했다.
비가 왔는데도 이 정도면,
시야가 좋은 맑은 날은 전망이 정말 좋을 것 같다.
옛 소방서가 있는 Skansen을 지나면,
이제 아래 사진 같은 지그재그 숲길을 걷게 된다.
그렇게 정상에 도달하면,
트롤(troll)들의 세상이 눈앞에 펼쳐진다.
옛날 베르겐 사람들은
주변 산에 트롤이 산다고 여겼단다.
그래서 이렇게 플뢰엔 산속에
"트롤 나라"를 만들어 놓은 것 같다.
그 트롤 나라 옆에 프뢰이바넨 승강장이
가장 전망이 좋다.
거기에 서면,
눈에 익은 인공 호수와 작고 예쁜 집들도 보이고,
미처 가보지 못한 좀 더 외곽의 베르겐도 보인다.
서쪽의 항구도 더 멀리, 더 넓게 보인다.
비가 와서 시야가 맑지 않고,
사진도 흐릿하게 나와서 좀 안타까웠는데,
갑자기 서쪽 하늘에서
구름 사이로 빛이 쏟아진다.
사진엔 잘 담기지 않았는데,
그 풍경이 또 너무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워서
한참을 넋 놓고 쳐다봤다.
브뤼겐과 그 동쪽, 남쪽의 항구도 한눈에 들어온다.
올라갔던 길을 따라서 플뢰엔에서 내려오다가
서쪽으로 난 길로 꺾어졌다.
베르겐 오면 가이드해주겠다던 아드리안에게
내가 베르겐 간다고 연락했을 때,
이제 자기는 오슬로에 산다면서,
"브뤼겐(Bryggen)은 아마 알 거고,
거기 말고 나는 노르네스(Nordnes)랑
산비켄(Sandviken)도 좋아해."
뭐 이런 식으로 베르겐의 두 지역을 언급해서,
내가 따로 그걸 적어뒀었다.
그 두루뭉술하게 알려준 현지인의 추천 장소를
결국 들르지 못하고 베르겐을 떠나겠구나
싶은 생각이
베르겐 마지막 저녁에 플뢰엔을 오르면서
문득 머릿속에 떠올랐다.
순간적으로 베르겐 마지막이자,
노르웨이 마지막 날이니까,
그냥 미친 척하고 밤새 노르네스랑 산비켄을
걸어볼까 싶기도 하고,
아님 지금 당장 숙소로 가서 3-4시간만 자고,
새벽 일찍 돌아볼까 싶기도 했다.
그런데 다음 순간,
뭐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어 졌다.
사실 이름만 알 뿐,
거기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는데,
그렇게까지 무리해서 가서 뭐하나 싶었다.
그리고 오슬로랑,
송네 피오르드, 하르당에르 피오르드랑,
베르겐의 브뤼겐이랑 플뢰엔 산,
그리고 그냥 “보통의” 골목들도 만족스러워서,
현지인의 추천 장소 안 가도
그냥 가본 데만으로도 좋아서,
마음이 배부르니,
큰 욕심이 안 나기도 했다.
그런데 플뢰엔 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서쪽 산비켄(Sandviken) 방향으로 난 길이 있길래,
구글 지도 보면서 그쪽으로 걸어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은 올라갈 때와 반대로
처음엔 숲길이고,
나중엔 주택가다.
중간에 돌을 쌓아둔 걸 보고 괜히 웃었다.
한국에서 보던 익숙한 거라,
한국인들이 여기까지 와서 쌓아뒀나 싶기도 하고,
노르웨이인도 소원 빌며 이런 거 쌓아두나 싶어서,
아님 다른 이유인데
한국적 사고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돌이 소원 비는 걸거라 쉽게 생각했나 싶어서,
그냥 괜히 웃음이 나왔다.
아님 그냥 그 길을 그렇게 걷는 게
기분 좋아서 웃었는지도 모른다.
조금 걷다 보니,
멀리 산비켄으로 추정되는,
눈에 띄게 예쁜 건물들이 보인다.
그리고 나중에 구글 검색해보니
거기가 산비켄 맞는 것 같다.
하지만 벌써 밤 10시가 넘었는데,
거기까지 갔다 오는데 2-3시간은 걸릴 것 같아,
그 예쁜 집들이 보이는 서쪽으로 내려가지는 않고,
그냥 시내 쪽으로 걸어내려 갔다.
그런데 그 시내 쪽으로 내려가는 골목도 좋았다.
아드리안이 알려준 또 다른 추천 장소
노르네스(Nordnes)는
아래 사진에서 왼쪽 상단에 있는 동네다.
센트룸 서쪽, 브뤼겐 남서쪽에 자리 잡고 있다.
플뢰엔 산 내려오는 길에
카메라로 당겨봤는데,
이 동네도 예쁜 것 같다.
중요한 문화시설로는
아쿠아리움(Bergen Aquarium)이 있단다.
산비켄은 그래도 그 근처까지는 갔는데,
노르네스는 "새 교회" 너머로는 가보지 못했다.
"새 교회" 갔을 때
좀 더 서쪽으로 걸어가 볼 걸,
괜히 거기서 돌아나왔나 싶다.
베르겐 첫날만 해도
브뤼겐이 아담해서
노르네스랑 산비켄 둘러볼 시간이 있을 줄 알았다.
그러게 한번 미뤄둔 “나중에”는
웬만해선 잘 돌아오지 않는다.
베르겐 마지막 날 아침,
이제 헝가리 저가항공 비행기를 타고
헝가리 부다페스트로 돌아가야 한다.
베르겐 시내에서 공항까지 가는
가장 편하고 저렴한 방법은 트램을 타는 거다.
베르겐 센트룸이나 기차역 앞에서
트램을 타면 공항까지 44분 걸리고,
트램 1회 요금은 38크로네(약 4800원)다.
2018년 6월에는 37크로네를 낸 것 같은데,
아마 그새 올랐는지, 38크로네로 검색된다.
관광객의 행동반경 안에서는
센트룸,
기차역,
그리고 그 일요일에 문 열었던 구멍가게 비슷한
슈퍼마켓 근처 높은 빌딩들 사이 정거장,
이렇게 3 정거장 정도가
트램을 탈 수 있는 곳인 것 같은데,
아래 사진처럼 생긴 정거장의 자판기에서
티켓을 구매한 후 트램에 오르면 된다.
트램 대신
시내에서 공항버스를 타면 20분 정도 걸리고,
비용은 210크로네(약 27,000원)이다.
지난 포스트에 쓴 것처럼
베르겐 첫날, 일요일이라서
문을 다 닫았던 한적한 버스터미널 쇼핑몰에서,
가까운 슈퍼마켓이 어디냐는 나의 질문에,
뭔가 세상에 불만이 많아 보이는 베르겐 현지인이
하나뿐인 트램 타고 한 정거장 떨어진 곳에 있다며,
트램이 하나밖에 없는 걸
매우 불만스럽게 말했는데,
그 하나밖에 없는 트램이
센트룸과 공항 사이를 운행해서,
트램으로 공항까지 갈 수 있어서 난 정말 좋았다.
노선 하나뿐인 베르겐 트램은
공항버스보다 저렴하고, 이용이 편리하고,
내부는 쾌적하고, 승차감이 안정적이다.
하나밖에 없어도 제대로다.
승객은 많지 않고
트램은 천천히 움직여서
좌석에 평화로이 앉아서 창밖으로
미처 가보지 못한 베르겐 외곽 지역도 볼 수 있다.
그렇게 또다른 여행을 하는 기분으로 창밖을 보며
트램을 타고 공항에 무사히 도착했다.
커다란 피오르드 영상이
공항 로비 벽 하나를 길게 뒤덮고 있다.
(동영상)
헝가리 저가항공 wizzair 타려고 체크인하는데,
주변이 다들 슬라브인이다.
대부분 폴란드어를 하고,
내 바로 앞사람들은 불가리아어를 한다.
폴란드인들이 노르웨이로 취업 이주를 많이 해서,
오슬로랑 베르겐에 폴란드인이 많이 산다는 걸,
예전에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고,
폴란드에서 뉴스로도 본 적 있다.
그리고
정말 노르웨이에 폴란드인이 많구나 실감했던 게
오슬로 트램 위에 폴란드어로 적힌
통신사 광고를 봤을 때였다.
폴란드어로 “집으로 전화하는 가장 저렴한 방법”
뭐 그렇게 적혀 있었다.
그리고 베르겐 공항에서
사방에서 들리는 폴란드어에
두번째로 그걸 실감했다.
그런데 다른 유럽에서 잘 만나기 어려운
불가리아어를 들으니,
노르웨이에 다른 슬라브인도 꽤 많나보다 싶다.
아무튼 그렇게 슬라브인들 사이에서
무사히 체크인을 하고 비행기에 올랐다.
날씨가 흐려서 시야가 깨끗하진 않지만,
베르겐 상공에서 본 풍경은
오슬로 상공이랑 또 다르다.
해안선이 매우 굴곡져있고,
섬도 많고,
초록 자연도 더 많은 것 같다.
사실 노르웨이를 가야 할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폴란드어 같이 배우던 노르웨이 친구의
“그리운 자연” 타령에
노르웨이 자연과 그 유명한 피오르드가 궁금하고,
그가 자기 고향이라고 알려준 베르겐이
사진 속에서 너무 예쁘길래
그냥 나중에 기회 되면 한번 가보고 싶다고
막연히 생각만 했었다가
유럽 간 김에 눈 딱 감고 간 거다.
“유럽 간 김에”가 이유라면 이유였다.
비정규직 주제에 특별한 이유 없이
자체 안식학기 갖겠다고 선언하고,
크로아티아어 배우러,
6개월간 크로아티아를 간 것 자체가 사실
반드시 할 필요 없고,
특별한 이유, 목적, 효용도 없는,
지나치게 용감하거나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슬라브어 비교 연구를 좀 더 잘하고 싶어서가
대외적 이유였지만,
사실 그동안 크로아티아어 모른 채,
러시아어, 폴란드어, 체코어, 불가리아어만으로도
실컷 비교 잘했었고,
아니 오히려 그것만으로도 비교 언어 수가 많아
항상 논문은 길이가 지나치게 길었고,
다른 슬라브어는커녕
러시아어 하나도 제대로 말하지 못하면서
러시아에 대해 말하는 사람이 부지기수인 학계에서
그런 잉여적 “스펙” 따윈 아무짝에도 필요 없다.
그냥 잠깐 멈추고 싶어서
대충 어설픈 핑계를 대고
출구 없는 내 인생에서 도망간 거다.
그렇게 우선 저질러놓고,
그 뒤 방학까지 합쳐 8개월간
수입 없이 계속 줄어만 드는 통장 잔고를 보며,
경제적으로 불안한 와중에
설상가상 또 앞뒤 안 재고
살인 물가 노르웨이에 여행까지 갔다.
하지만 할까 말까 싶은 선택 사항이 있으면,
해야 나중에 후회를 안 하더라는,
그걸 접고 “나중에 언젠가 해야지”했던
그 일의 “나중”이 온 적은 한 번도 없더라는,
내 인생의 작지만 가차 없는 그 규칙을 따라
“나중에”와 “언젠가”를 버리고 행동한 거다.
그렇게 간 노르웨이 여행 내내
시각을 비롯한 모든 감각이 계속 환호하고,
좋은 공기를 계속 마시니 몸은 너무 좋은데,
마음은 가끔씩 좀 불안하고,
머릿속으로는 계속 돈 계산을 하며,
가능하면 비용을 줄여볼 궁리를 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고정적으로 들어가는 피할 수 없는 비용,
즉, 교통비, 숙박, 박물관 입장료 뭐 이런 것들 빼면,
크게 지출할 일도 없었는데,
그리고 그건 이미 노르웨이로 떠나기 전에
온라인으로 미리 다 지불하고 간 건데,
왜 그렇게 여행 내내
마음이 잔뜩 쫄아있었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그렇게 몸과 마음이
가끔씩 부조화를 이루며,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몸과 마음이 모두 다 만족해하며,
“잘 왔다”고 “잘 했다”고 계속 감탄하고
스스로의 무모한 선택을 칭찬하는,
그런 오슬로, 베르겐 체류 5박 6일
노르웨이 여행을 마쳤다.
나의 무리수 크로아티아 생활에서,
가장 큰 무리수가 바로 이 노르웨이 여행이었는데,.
고용 불안 와중에 크로아티아에 괜히 갔던 것도,
거기서 쪼들리는 살림에 노르웨이에 갔던 것도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후회하지 않는다.
선택할 때마다 끊임 없이 잔소리를 해대는
이성의 목소리에 귀를 막고,
그냥 마음이 이끄는 대로 가길 잘한 것 같다.
도망쳐봐도 달리 갈 데가 없던 나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6개월 후 다시 예전 그 일을 계속하게 되었고,
내 인생의 출구는 여전히 열릴 기미가 없지만,
그래도 그런 “사치스런” 휴식의 기억이 있는 삶은
그게 없던 이전 삶과 정서적으로 다른 거 같다.
그리고
이제 다시 갈 기회가 없을 거라 생각해서 그런지,
기억은 점점 더 미화되어,
그 선택은 날이 가면 갈수록 고평가되고 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이 있다면,
미래에 대한 불안에 괜히 마음이 쫄아서 잡은
5박 6일이라는 기간이 심하게 짧더라는 것 정도?
이제는
어차피 한번 하기로 결정했으면
하면서 쫄지 말 것
이라는
새로운 인생의 새로운 규칙을 세워야 할까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