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 맥주 공장 투어는 여기가 제일 낫다고들 한다.
체코에는 도수가 높은 증류주 중에
딱히 유명한 게 없다.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위스키,
프랑스의 코냑,
러시아의 보드카, 폴란드의 부드카,
발칸 국가들의 라키아에 해당하는
40도 넘는 증류주가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별로 발달하지 않은 것 같다.
대신 체코인들은
좀 더 도수가 낮은 발효주인
pivo(피보), 즉 맥주를
좀 더 자주 그리고
좀 더 많이 마시는 듯하다.
체코에서 신기했던 게
맥주집이 아닌 보통의 캐주얼한 레스토랑에
커다란 맥주 탱크가 벽면 가득 채우고 있는 게
매우 흔한 풍경이고,
다들 점심, 저녁 식사하면서
음료수처럼 맥주를 한 잔씩 한다.
체코인들의 2021년 일인당 맥주 소비량은
자그마치 세계 1위이고,
그 이전 통계에서도 꾸준히 1위였다는데,
그런 결과가 사실 별로 놀랍진 않다.
(지도 출처)
어디에서든 맛있는 맥주를 손쉽게 마실 수 있는
“맥주 인프라”가 좋아서
체코인들은 다른 모든 술보다,
그리고 다른 모든 나라 사람들보다
맥주를 자주 마시게 되었을 것이다.
맛있는 맥주를 더 맛있게 하는 도구인
맥주 탱크도
체코의 중요한 맥주 인프라인 것 같다.
체코 레스토랑이나 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탱크에서 나온 맥주는 체코어로
pivo z tanku (피보 즈 탄쿠) 또는
tankové pivo (탄코베 피보),
그런 탱크 맥주를 파는 레스토랑/펍은
tankovna(탄코브나)라고 하는데,
그렇게 레스토랑/펍에
인테리어처럼 거대한 맥주 탱크를 전시하고,
탱크에서 나온 맥주를 서빙하는 건
매우 체코적인 맥주 문화로,
1990년대 초반 체코에서
Pilsner Urquell 맥주 회사가
탱크에 담은 맥주를 공급하며 처음 도입한 후,
많은 체코 레스토랑과 펍으로 확산되었다.
그 유행이
지금은 유럽 여러 도시로 확산되고 있고,
체코 탱크 맥주가 유럽에서도 매우 인기란다.
나는 그런 맥주 탱크는
그 원조 국가인 체코에서만 봤다.
한국에서 난 술을 주로
맛보다 사교 수단으로 마시다 보니,
혼술은 안 하는 편이기 때문에,
거의 혼자 다녔던 체코 여행 중에,
맥주 탱크를 만날 때마다 맥주를 마신 건 아니지만
(그랬다면 아마
매일 한 두번씩 맥주를 마시게 되었을 거다.)
체코 탄코브나에서 내가 마셔본 탱크 맥주는
100% 확률로 맛있었다.
그래서
파블로프의 개처럼,
체코에서 맥주 탱크를 보면 자동적으로
‘이 집 맥주 맛있겠구나.’
생각하게 된다.
체코에서 맥주 탱크 인테리어는
적어도 나에게는 맥주 맛에 대한 공인인 셈이다.
그런 커다란 철제 탱크에 담긴 맥주가
그 집에서 만든 수제 맥주인 경우도 있고,
맥주 공장에서 만든 공장 맥주인 경우도 있는데,
내가 맛있게 먹고 마셨고, 또 평판도 좋은,
아래 사진의 프라하 Lokál이라는 레스토랑/펍의
맥주 탱크는 이 집에서 만든 수제 맥주이고,
(프라하 구시가의 펍 Lokal 지도상 위치)
한국인들에게 맛있는 맥주와 폭립으로 유명한,
그리고 직접 먹어보니, 약간 달긴 하지만,
음식이나 맥주나 한국인 입맛에 딱 맞았던,
아래 사진의 프라하 성 근처
스트라호프 수도원 브루어리(Klášterní pivovar Strahov, The Strahov Monastic Brewery)에 딸린
수도원 레스토랑/펍의 맥주 탱크도
이 수도원에서 만드는 수제 맥주다.
스트라호프 수도원에는 오랜 전통의
자체 브루어리가 있는데,
여기 투어도 꽤 괜찮다고 한다.
(프라하 스트라호프 수도원 브루어리 지도상 위치)
이런 자체 생산 수제 맥주 말고
공장에서 나온 맥주 탱크에는
아래 사진들처럼 상표가 붙어 있는데,
탱크에 담긴 공장 맥주는
저온살균을 하지 않은 채로,
산소와 빛에 노출되지 않게 하고
특별한 온도를 유지하게 하는
구리빛 스테인리스 탱크에 담겨,
몇 시간 안에 펍/레스토랑으로 배달되는데,
보통의 공장 맥주 유통 기한이 몇 년이라면,
탱크 맥주는 유통 기한이 생산 후 1-2주라서,
공장 맥주도 탱크 맥주는 “신선하다”.
공장에서 막 생산된 맥주는
탱크 안에 폴리프로필렌 자루에 담기는데,
그 자루와 탱크 사이의 공기가
맥주가 담긴 자루에 압력을 가해서
맥주의 향과 맛을 더 좋게 한다고도 한다.
버드와이저의 고향, 체스케 부데요비체의
역사적 건물 안 레스토랑
마스네 크라미(Masné krámy)에는
눈에 잘 띄는 곳에 맥주 탱크가 진열되진 않았지만,
Budějovický Budvar(부데요비츠키 부드바르)
맥주 탱크가 4개나 된다고 한다.
체스케 부데요비체 포스트에서도 말한 것처럼
그 공장 탱크 맥주도 정말 맛있었다.
그렇게 체코는 맥주가 유명하고,
명성만큼 맛있기도 하고,
사람들이 많이 마시기도 한다.
그래서 체코 맥주는 한국에 수입도 많이 되는데,
한국에 수입된 체코 맥주로는
“숫염소”라는 의미의 흑맥주 코젤(Kozel),
크루쇼비체(Krušovice),
프리마토르(Primator),
리토벨(Litovel),
프라하 맥주 스타로프라멘(Staropramen),
지난 포스트에서 이야기한
체스케 부데요비체 맥주
부데요비츠키 부드바르 (Budejovicky Budvar),
이번 포스트에서 이야기할
플젠의 필스너 우르켈(Pilsner Urquell),
그리고 감브리누스(Gambrinus)
등이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체코에 간다면,
한국에서도 맛볼 수 있는 그런 병맥주, 캔맥주 말고,
체코 현지 레스토랑이나 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탱크에 담긴 신선한 공장 맥주나 수제 맥주를
맛보기를 추천한다.
입구에서 pivo z tanku(피보 즈 탄쿠),
tankovna(탄코브나)라는 글씨를 확인하면 된다.
(Beer from tanks 또는 tank beer
라고 쓰여 있는 데는 관광객이 타깃이라,
현지인의 분위기를 느끼며,
현지인의 가격을 지불하려면
체코어로 쓰인 데가 더 낫겠다.)
그리고 좀 더 여유가 된다면,
역시나 체코에서는 매우 흔한
맥주 브루어리 투어도 한 번 해보길 추천한다.
워낙 "맥주 선진국"이다 보니,
체코의 웬만한 도시에는
크고 작은 맥주 브루어리가 있고,
또 그 맥주 브루어리에서 하는 투어도 많이 있다.
(1)
버드와이저의 고향, 체스케 부데요비체의
Budějovický Budvar(부데요비츠키 부드바르)
맥주 투어는 매일 9시-5시,
60분 동안 진행되며,
일반 180코루나 (약 9천원), 할인 90코루나.
(부드바르 투어 정보)
(지도상 위치)
Find local businesses, view maps and get driving directions in Google Maps.
www.google.com
(2)
1869년 시작된
프라하의 브루어리
스타로프라멘(Staropramen)의 맥주 투어는
멀티미디어 자료를 많이 볼 수 있단다.
시간은 매일 10:00 - 17:00,
50분이 소요되며,
요금은 좀 복잡해서,
2022년 7월 현재,
6종류의 맥주를 시음하는 일반 티켓 369코루나
(약 2만원),
1잔만 마시는 일반 티켓 249코루나
(약 13,000원)까지
시음 맥주잔 수에 따라 다양하고,
대학생은 약간의 할인이 있으며,
미성년자는 99코루나(약 5천원)
7세 미만은 무료입장이다.
(더 자세한 내용은 홈페이지에서)
스타로프라멘 맥주 브루어리는
프라하 남서부
안뎰(Anděl) 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체스키 크룸로프 갈 때 버스 타는 그 동네다.
(스타로프라멘 브루어리 지도 상 위치)
만약 프라하 말고
다른 체코 도시를 갈 계획이 없는데,
스타로프라멘 맥주를 평소에 좋아하고
체코 맥주 공장 투어를 꼭 해보고 싶다면
스타로프라멘 브루어리 투어도 나쁘지 않겠다.
하지만 꼭 맥주 공장 투어를 하지 않아도 된다면,
맥주 잔 수로 투어 요금 매겨서 웬지 빈정상하는
스타로프라멘 맥주 공장 투어 하지 말고,
그 시간에 그냥 프라하 현지인들이 마시는
질 좋고 맛있는 수제 맥주를 맛보는 것이
훨씬 더 가성비, 가심비가 높을 것 같다.
(프라하 수제 맥주와 브루어리 목록과 위치)
(3)
그 밖의 다른 체코 맥주 공장에도
다들 투어 프로그램이 있다.
내가 안 가본 도시들이라
맥주 공장 투어도 전혀 고려 안 했지만,
투어 정보는 인터넷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코젤 맥주
리토벨 맥주
프리마토르 맥주
크루쇼비체 맥주
(4)
마지막으로 내가 직접 해봤던
필스너 우르켈 맥주 브루어리 투어는
하절기(7-8월) 9:30 - 6:00,
나머지 10:00 - 6:00,
소요시간은 80분+30분
(마지막 30분은 시음하는 시간인 것 같다)
요금은 2022년 7월 현재
일반 300 코루나(약 15,000원),
할인 200 코루나.
2020년 2월 초에
체코 서부 플젠(Plzeň)에서 했었던
이 Pilsner Urquell 투어에 대해서는
좀 더 할 얘기가 많다.
2020년 1-2월 프라하에 체류하면서,
프라하 밖 여러 도시를 여행하러 다닐 때,
체코 맥주 브루어리도
“한 번”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투어 내용이
맥주 공장마다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고,
맥주는
백문(聞)이
그리고 백견(見)도 불여일음(飮)이라,
공장 견학을 여러 번 하기보다는
한 번 더 마시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어서,
체코의 "맥주 성지" 중에서
한 곳만 선택하기로 했다.
그래서 그 최종 후보로 생각한 곳이
(1) 버드와이저의 고향, 체스케 부데요비체
(2) 필스너 우르켈의 고향, 플젠
이었는데,
결국
플젠(Plzeň)에서 맥주 투어를 하기로 결정했다.
첫째,
버드와이저 병맥주에 대한 특별한 기억은 없는데,
필스너 병맥주는 맛있었던 기억이 확실히 있었고,
둘째,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체스케 부데요비체 보다는
플젠 맥주 공장 투어가 낫더라는,
체코 맥주 공장 투어 여러 번 해 본 듯한,
맥주 덕후의 비교 평가가 꽤 신뢰가 갔기 때문이다.
셋째,
이건 나중에 다녀와서 느낀 비교 우위인데,
플젠의 맥주 공장 투어는
역사적 건축 흔적을 그대로 남겨 두고 있고,
19세기에 했던 그 옛날식으로 만든
원조 필스너 맥주도 시음할 수 있어,
브루어리 자체의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더 크다.
그리고 넷째,
이것도 나중에 알고 보니,
필스너 맥주 자체가 가진 중요한 의미가 있었는데
내 생각엔 이 4번째 이유가,
혹시나 다른 조건이 같다면
체코 맥주 공장 투어는 플젠에서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근거인 것 같다.
플젠의 맥주는
우리가 지금 마시는 현대 맥주 2/3의 조상으로,
Pilsner(필스너)는 상표일 뿐 아니라,
페일 라거(Pale Lager)의 한 종류를 통칭하는
맥주 하위종 이름이기도 하다.
호치키스, 햇반, 짜파게티, Xerox 등등처럼
고유명사가 보통명사가 된 거다.
그리고 필스너 우르켈(Pilsner Urquell)은
현재 체코 맥주 생산과 수출 전체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선두 맥주 회사이다.
즉, 맥주 역사에서도,
그리고 현대 맥주 산업에서도
필스너 우르켈(Pilsner Urquell)과
플젠이라는 도시는 매우 중요한 곳이다.
플젠(Plzeň)은 체코 서부에 위치한 도시로
독일어식으로는 필젠(Pilsen)이라 부른다.
(프라하-플젠 가는 방법은 다음 포스트에서)
플젠(Plzeň)에서는 13C부터 맥주를 생산했고,
14C 카렐 4세(Charles IV, Karl IV) 때
맥주 생산권을 국가로부터 부여받았다.
19C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 독일계의
강한 문화적, 정치적 영향권 하의 플젠에서는
'시민의 브루어리'라는 의미의
Bürgerbrauerei (뷔르거브라우어라이)라는
독일계 맥주 회사
(체코어로는 Měšťanský pivovar)가 세워졌고,
독일 남동부 바이에른 출신 맥주 양조업자
요제프 그롤(Josef Groll)이
당시 독일에서 막 유행하던 라거(Lager) 방식,
즉 동굴에서 저온 숙성시키는 방식을 도입해서,
플젠의 질 좋은 물과 맥아, 홉(hop)을 재료로
1842년 '필젠의 맥주'라는 뜻의
Pilsner Bier (필스너 비어)를 생산했다.
이 맥주가 당시 유럽에서 크게 히트를 쳐서
아류작들이 많이 등장하자,
'원조'라는 의미의 독일어 Urquell(우어크벨)을
상품명 뒤에 붙였다.
그렇게 "필젠의 원조", "필스너의 원조"
Pilsner Urquell(필스너 우어크벨)이 탄생했고,
한국에서는 "필스너 우르켈"이라고 읽는다.
독일어 접미사 Ur(우어)가 '조상',
Quell(크벨)이 ‘근원'이라는 의미여서,
체코어로도 '조상+근원'이라는 의미의
Pra와 zdroj를 붙여 단어를 만들고,
Plzeň이라는 지명을 그 앞에 붙여
Plzeňský prazdroj(플젠스키 프라즈드로이)
라고 하고,
이건 이 맥주 회사의 체코 이름이기도 하다.
"원조"라는 표현이 등장해야 할 정도로,
많은 다른 맥주들이
너도나도 Pilsner(필스너) 임을 자칭하는 와중에,
필스너는
플젠이라는 체코 지명과 상관없이,
페일 라거(pale lager), 즉
밝은 색의 저온 숙성 효모로 만든 맥주를
통칭하게 되었다.
1945년 필스너 우르켈 회사는
공산 체코슬로바키아의 국영기업이 되었고,
1989년 공산정권 붕괴로 민영화되었다.
이후
1999년 라데스트 맥주회사(Pivovar Radegast),
코젤 맥주회사(Velkopopovický Kozel)를
합병하며 성장했는데,
2017년 “플젠의 원조”
Plzeňský prazdroj(플젠스키 프라즈드로이)는
일본 아사히 맥주에 인수됐다고 한다.
플젠의 필스너 우르켈 브루어리는
아래 지도의 21번,
즉 플젠 구시가 동쪽,
플젠 기차역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플젠 구시가에서
걸어서 10-15분 정도 걸렸던 것 같은데,
구시가 쪽에서 강을 건너가야 한다.
아래 사진의 벽돌색 굴뚝이 거기다
브루어리 입구에는
개선문을 닮은 고풍스러운 문이 달려 있는데,
이 맥주 공장 50주년 되는 해
기념으로 만든 정문이란다.
그래서 위에 1842-1892라고 적혀 있다.
특별한 이름은 없이 체코어로 그냥
“정문(Hlavní brána)”이라 불리는데,
병뚜껑에 새겨진 로고에 나오는 바로 그 문으로,
필스너 우르켈의 상징이다.
그 중요하고 특별한 정문에서 걸어 들어가면
이런 풍경이 펼쳐지는데,
벽돌색 굴뚝이 달린 건물이 바로
투어를 시작하는 옛날 공장이다.
사진에는 안 나오는데,
그 왼쪽에는 필스너 우르켈 현대식 공장이 있다.
위 사진에서 멀리 보이는
검은 뚜껑의 아이보리-주황색 탑은
수탑(Vodárenská věž, Water tower)인데,
20세기 초반 늘어나는 주문에
물 사용량도 늘어나자,
더 많은 물을 조달하기 위해 1905년에 세워졌고,
옛 공장이 작동하던
2005년까지 100년 간 계속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 탑 앞에 있는
기차역을 닮은 둥근 지붕 아래
왼쪽 열린 공간에는 철로와
예전 필스너 우르켈 운송 열차 웨건이
전시되어 있고,
오른쪽 닫힌 공간엔 기념품 샵이라고 쓰여 있다.
아래 보이는
그 철로 왼쪽의 노란 건물 쪽으로 가서
티켓을 구매하면 투어에 참여할 수 있다.
투어는 체코어뿐 아니라,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러시아어로 진행되는데,
체코어 투어가 가장 선택지가 많았고,
나는 이때 프라하에서 일주일에 두 번씩
중고급 수준의 체코어 수업을 듣고 있었지만
기술적 단어를 거의 못 알아들을 것 같은 데다가
체코인들 다 아는 이야기는 건너뛸 거라
어차피 나 같은 외부인에게는 안 맞을 것 같았다.
전날 홈페이지에 보니
13:00, 14:45, 16:30 영어 투어가 있길래,
필젠 구시가를 둘러보다가
2시 45 분 시작하는 투어 시간에 맞춰
필스너 우르켈 공장에 서둘러 왔다.
(필스너 우르켈 투어 시간)
매표소에는 투어별로 자리가 몇 개나 남았는지
쓰여 있었는데,
내가 갔을 때는
독일어, 영어 투어 티켓을 판매중이었고,
다행히 영어 투어 자리가 꽤 남아 있었다.
표를 구매한 사람들은
로비에 서서 투어 시작을 기다리고 있었다.
원래 100분짜리 투어였는데,
(2022년 현재는 80+30분, 즉 110분 투어)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70분으로 줄었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하지만 입장료는 그대로였다.
뭔가 좀 합리적이지 않은 거 같지만,
그런 갑작스런 조치가 이해가 안 되는건 아니었다.
체코는 코비드 19 첫 확진자가,
내가 한국으로 돌아오고 난 다음,
이탈리아 스키 타러 갔다 온 사람들 사이에서
2월 말에 처음 나왔기 때문에,
내가 필스너 우르켈 투어를 갔던
2월 초에는 아직 확진자가 한 명도 없었지만,
해외 뉴스로
중국 우한과 한국 소식을 전해 들으면서
다들 어렴풋이 걱정을 시작하던 때였다.
역시나 그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인지,
아니면 원래 좀 그런지,
투어는 예정보다 5분 정도 늦게 시작했고,
투어 참가 인원이 많아서인지,
아님 기존의 투어 시간을
갑자기 줄이기가 실제적으로 어려워선지,
결국 투어는 4시 20분쯤에 끝났다.
1시간 30-35분 정도,
즉, 100분 가까이한 거다.
전부 합쳐서 30명이 좀 넘어 보이는
투어 참가자들 중에서
아시아인은 단 2명이었는데,
내가 투어 시작을 기다리며
스마트폰에 뭔가 메모를 하고 있는 사이,
그 나머지 한 아시아인이 내 뒤로 와서
내가 뭘 쓰는지
어깨 넘어 슬쩍 훔쳐보는 게 느껴졌다.
그분도 한국인이었고,
내가 한국인인지 확인하고 싶어 그랬던 것 같은데,
난 거기서 굳이
낯선 한국인과 친교를 맺고 싶지 않았던 데다가,
내 것을 누군가가 훔쳐봤다는 게 기분이 나빠서,
당시엔 괜히 좀 까칠하고 차가운 눈빛과 말투로
방어적으로 대응했던 것 같다.
그리고 잠시 후 투어가 시작되었고,
우리는 가이드를 따라 엘리베이터를 타고
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이건 투어 시작할 때 로비에서 봤던
맥주 숙성 탱크.
이건 엘리베이터에서 본 바깥 풍경이다.
(동영상: 엘리베이터에서 바라본 바깥 풍경)
난 맥주 만드는 과정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어서,
설명을 잘 들으려고,
가이드 앞에 자리를 잡고 열심히 들었다.
처음엔 투어 참가자들이 다들 열심이라,
그 앞자리 잡기가 힘들더니,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이 설명을 등한시(?)해서
나중에는 별 경쟁 없이 앞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때는 필스너 맥주에 대해서
논문이라도 하나 쓸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지금은 투어 끝나고 대충 적어 둔 메모도 낯설다.
그때 휴대폰에 적어 놓은 메모를 보니,
필스너 맥주의 구성성분 중 물이 92퍼센트인데,
(생각보다 비중이 낮다고 생각했다.)
그 물은 공장 아래 100미터 깊이에서 끌어올린단다.
그 물에다가 질 좋은 이 지방 보리와 홉,
그리고 단맛을 내는 설탕과 이스트를 넣어
필스너 맥주를 만든다.
전 세계 맥주의 70퍼센트가 필스너 맥주인데,
그 방법을 처음 개발한 곳이
바로 플젠이라는
가장 중요한 설명도 빼먹지 않았다.
독일 바이에른에서 시작되었지만,
같은 방식으로 만든 플젠 맥주가 더 유명하고,
이제는 필스너식 방법이 보편화되었지만,
필스너 우르켈이 아직도 특별한 건,
그 재료 때문일 텐데,
그래서인지 투어에서는 홉과 보리도 보여준다.
아래 사진들이 그 보리와 홉인데,
어떤 것들은
손으로 만져보고 냄새 맡거나 맛볼 수 있었다.
물론 그래도 뭐가 그렇게 다른 건지
난 잘 안 느껴진다.
그렇게 우리가 처음 둘러본 건
현대화된 새 공장의 공정이었다.
2004년인가까지 옛 공장을 썼고,
지금은 새 공장을 쓰는데
모든 걸 자동화로 진행한다.
필스너 맥주는 자동화된 방식으로
3번 발효시킨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거대한 맥주 탱크가 있는 곳을
3단계 모두 보여줬다.
그 밖에 다른 필스너 우르켈 공장 자료도
전시되어 있었는데,
아마도 1937년에 찍은 기념사진인 것 같은
아래 사진에 쓰인 체코어는
너는 우리 모두의 가슴속에 살 것이다.
라는 뜻이다.
그 “너(ty)”가 누군지는 혹은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사람들 표정이 여유 있고 편안하고,
서로 친해 보여서인지,
뭔가 가슴이 따뜻하다.
아래 사진은 옛날에
맥주를 발효할 때 썼던 통인 것 같다.
그렇게 투어가 막바지로 접어들면
마지막에 필스너 우르켈 맥주를 시음하는데,
옛 공장에 만든 것을 시음한다.
판매용은 대체로 자동화된 새 공장에서 만들지만,
투어를 위해
일정 정도는 옛 공장에서 아직도 만든다고 한다.
아래 사진이
그 옛 필스너 브루어리로 가는 통로다.
필스너 우르켈의 시작은 1942년이지만,
이 공장의 시작은 1839년이라
통로 위에 1839라는 숫자가 적혀 있다.
Lager(라거)가 독일어로 '동굴, 창고’라는 뜻이라,
페일 라거인 필스너 맥주는
원래 이런 지하 동굴에서 숙성시켰었다.
그 동굴을 한참 걷다가 나무 맥주통이 나오면,
우리는 200-300ml 유리잔을 들고 줄을 서고,
인상 좋은 중년의 체코 아저씨가
적절한 기간이 지난 맥주통에서 따라주는
잘 숙성한 맥주를 한 잔씩 받아서
정해진 장소에 가서 마신다.
통마다 날짜와 온도 같은 게 적혀 있다.
즉 아래 가장 크게 보이는 통은
2020년 1월 28일에 만든,
8-9일 정도 된 맥주다.
이 시음이 끝나면 투어가 끝나는 거다.
계속 가이드 앞에 서 있던 나는 맥주도 일찍 받고
일찍 자리를 맡아 사진을 찍고 있었는데,
아까 그 한국인이 그리로 들어오는 걸 보고,
내 쪽으로 오라고 반갑게 손짓해서,
그분 휴대폰으로 인증사진도 찍어 주고,
얘기도 좀 나눴다.
나는 대학에서 러시아어 가르치는 시간강사로,
방학 동안 프라하에서 체코어 배우면서
체코 여행 중이라고 말했는데,
그런 경우의 수는 생각 못했는지,
내 간략한 소개에 생각보다 놀라는 표정이었다.
그 한국분은 학생인 것 같았는데,
오스트리아에 있다가,
체코 여행하고,
이제 곧 한국에 돌아간다고 했다.
그 밖에 또 무슨 얘기를 했는지
지금은 기억이 안 나는데,
그런 별거 아닌 대화가 곁들여진 덕분인지,
동굴에서 숙성한 그 페일 라거는 진짜 맛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동굴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렇게 밖으로 나와서
나는 브루어리 건물 바깥을 좀 더 걸으면서
여기저기 기웃기웃 구경하면서 사진도 좀 찍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 한국분을 또 만났다.
어디로 가냐고 물었더니,
기차역으로 간단다.
플젠에는 다른 거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필스너 우르켈 공장 투어만 하러 왔는지,
플젠 구시가는 구경 안 했다고 했다.
플젠 구시가도 예쁜 데 못 봤다니 아쉽다며,
내가 관광안내소에서 받은
플젠(Plzeň) 안내 영어 브로셔를
기념으로 가지라고 건네 주었다.
처음에 좀 까칠하게 반응한 게 아무래도 미안해서
뭔가 잘해주고 싶었는데,
그 상황에서 달리 해 줄 게 없었다.
1892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절 세워져
그 시절 건축 느낌을 물씬 풍기는,
"클래식" 맥주 필스너 공장에 매우 어울리는
그 고풍스러운 정문 앞에서
알코올 때문인지 추위 때문이지
살짝 상기된 하지만 행복한 얼굴로
기념 셀카를 찍고
플젠 구시가로 돌아갔다.
소문대로 플젠의
필스너 우르켈 맥주 브루어리 투어는
매우 만족스러웠다.
다른 브루어리 투어는
체코뿐 아니라 어떤 다른 나라에서도 안 해봤지만,
맥주 강국 체코의 맥주 공장 투어는
아마도 플젠이 최고일 것 같다.
현대식 공장 맥주 만드는 공정을 보여주는 건
아마 다른 데도 하겠지만,
100년이 넘은 역사적인 정문과 수탑을 구경하고,
100년도 넘은 정통 라거 지하 저장고에서
그 옛날 방식으로 만든 맥주를 시음하는 경험은
여기 아닌 다른 브루어리에서
체험하기 힘들 것 같다.
하지만 필스너 우르켈 공장만 보고
플젠을 떠나는 건 너무 아까운 일이다.
이 도시의 오랜 역사를 차곡차곡 쟁여 담은
매력적인 플젠 구시가를 구경하는 즐거움이
또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