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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roga Nov 11. 2017

발칸반도의 중심, 성 소피아의 치유 도시

"성장하되 늙지 않는", 불가리아 수도 소피아

불가리아에 가기 1-2년 전쯤

어떤 한국어 논문을 읽다

신용하 교수의 흥미로운 주장을 접한 적이 있다.


요약하자면,

불가리아고대 부여족이 세운 나라란 것인데,


그에 따르면


Bulgar

'부여'를 의미하는 '불'가(加)가 결합한 말이고,


Sofia라는 지명은

'서울'이라는 의미의 '사비', '소비'와 연관되어 있고,


Balkan

'밝안산'에서 나왔다고 한다.


찾아보니

신용하 교수가 2007년 동아일보에 쓴 글이 있다.



당시 그 주장의 일부를 인용한 논문을 읽었을 때,

물론 매우 흥미진진한 논리 전개고,

그게 사실이라면 매우 자랑스러운 역사가 되긴 하겠지만,

언어학적으로 봤을 때

어딘지 모르게 헐거운 그 논거의 타당성에

의구심을 품게 되면서


직관적으로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당시엔

불가리아와 소피아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는 상태라,

그 주장의 타당성에

의문을 제기할 만한,

적절한 반론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불가리아와 소피아를

좀 더 알게 되었으니,

몇 가지 언어적, 역사적 근거를 가지고

반박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뭐 대단한 연구 없이

그냥

소피아 역사를 찾아보기만 해도

자연스레

"소피아 한국어 기원설(?)"에 대한 반론의 근거가

하나둘씩 눈에 띈다.




우선 고대 부여에서 '서울'의 의미로

'사비' 또는 '소비'라는 단어를 사용했고,

그게 불가리아에 가서 "소피아"가 되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이 없는 이유 중 하나는,


소피아가 근세 이전

불가리아의 "수도"인 적이 거의 없었다는 데 있다.


혹시나 고대 불가르족이 부여족이라 하더라도

(불가르족은 동쪽에서 온 아시아계 민족이니

사실 전혀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다.)


이미 수세기동안 로마인들, 슬라브인에 동화되어

뚜렷한 불가르인만의 

민족적 특성도, 문화도, 언어도 남아 있지 않았을

(실제로 소피아의 고고학 박물관에서도

고대 한국인의 유물 같아 보이는 건 못 봤다)

1879년에서야

소피아는 불가리아의 수도가 되었다.


불가리아 북동부의

플리스카(Плиска), 

프레슬레프(Преслев),

벨리코 터르노보(Велико Търново)라는

한국인들에게는 낯선 지명의 도시들이


"불가리아"라는 이름으로 나라가 세워진 후

오스만제국의 지배를 받기 전까지

수백년간

불가리아의 수도였다.


그래서 500여년의 오스만제국의 식민 상태에서 벗어나

1879년 소피아를

"새로운" 불가리아의 수도로 정했을 때

사람들 사이에 많은 논쟁이 있었다고 한다.

 

조선과 대한민국의 수도가

수백년동안 서울이어서,

심지어 '서울'이라는 단어를

'수도'라는 의미로 사용하기도 하니까,

다른 나라의 수도 또한 다들

그렇게 수도가 된 지 오래되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


따라서

7세기에 발칸반도에 들어온 불가르족이

부여족이더라도,

당시 그들이 정한 그 땅의 수도가

소피아였을리 없고,

'소피아'라는 명칭이

'서울'이라는 뜻의 한국어 '사비', '소비'에서

파생되었을 가능성도

매우 매우 낮다.




둘째,

수도가 된 건 말할 것도 없고,

"소피야"라 불린지도 별로 오래되지 않았다.


불가르인과 슬라브인들이 오기 전에

소피아에 거주했던

트라키아인들은  Serdi라는 종족의 이름을 따서

그 도시를 '세르돈(Serdon)'이라 불렀고,


그 이후 로마인들을 이곳을 차지하면서부터는

'세르티카(Serdica)'라고 불렀고,


그 후에 자리잡은 슬라브인들은

그와 비슷한 발음인

'스레데츠(Срѣдецъ)'로 불렀는데,

슬라브어로 среда[스레다]는

'중심'이라는 의미다.


실제로 소피아는

발칸반도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


(불가리아 소피아 위치)

(사진출처)


이후

외지인들이 이 도시에 많이 모여들게 되었고,


중세 그리스도교 사회에서

중시되었던 종교 건축 중,

4-6세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성 소피야 성당(църква "Света София")의 이름을  

이 도시에 부여하면서

14세기에 처음

"소피야(София)"라고 불리었다는 기록이 있다.


[불가리아어로 "소피야"인데,

한국어에선 영어 Sofia를 그대로 음차하여

"소피아"라고 표기하는 것 같다.]


하지만

널리 사용되지 않고,

오랫동안 두 명칭,

"소피야"와 "스레데츠"가 혼용되었는데,


특히 오스만제국의 지배하에

"소피야"는 공식 명칭으로,

"스레데츠"는 일반인들이

흔히 쓰는 명칭으로 통용되었다고 한다.


불가리아인들은

외부인들이 사용하는, 

그리스어에 뿌리를 둔, 유럽 공통의 "소피야"보다

슬라브어에 기원을 둔 "스레데츠"에

더 애착을 가지고 있었고,


오스만제국의 공식명칭이 "소피야"였던 것에 대한

거부감도 있고해서

독립 후

"스레데츠"로 복원하려 시도하기도 했으나

결국 "소피야"가 공식명칭이 되었다.


하지만

지금도 소피아 곳곳에서

"스레데츠(Средец)"라는 표현을 만날 수 있다.


만약 7세기 불가리아땅에 도착한 부여인들이  

그 도시를 한국어 명칭 "소비"로 이름지었고,

"소피야"라는 이름이 그 연장선상에 있다면,


아마도 14세기보다 훨씬 전에

"소피야"라는 명칭이 역사에 등장하고

일반인들 사이에 널리 통용되었어야 했을거다.


그리고 불가리아인들이 이걸

그렇게 "외부적인 명칭"으로 간주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소피야"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역사는 매우 짧지만,

그리고 수도로서의 역사는 더욱 짧지만,


사람들이 거주했던 그 흔적으로부터

시작되는 소피아의 역사는 매우 길다.


즉 소피아는 비교적 새로운 도시면서

또 오래된 도시이기도 하다.


그래서 19세기 수도가 되고나서

도시의 문장에 새긴,

그리고 지금까지도 이어오는

소피아의 슬로건은 다음과 같다.


Расте, но не старее.
성장하되, 늙지 않는다.


(그림 출처: https://bulgarianhistory.org/sofiq/)


통시적 관점보다 공시적 관점에서

성장하는 도시가 되고자 하는 희망이 담겨 있는 것 같다.




셋째, "소피야"는

유럽에서 매우 흔하게 발견할 수 있는

지극히 유럽어적인 단어다.


다른 건 몰라도

적어도

'지혜에 대한 사랑'이라는 어원을 가진

고대그리스어 φιλοσοφία [필로소피아]

기원전부터 사용되고 있었고,


4-6세기에 건설된 것으로 추정되는

소피아의 그리스도교 성당의 이름도

"성 소피야 성당"인 걸 보면,


7세기 아시아계 불가르족이

발칸반도에 도착하기 전,

"불가리아"라는 이름이 통용되기 전부터

이미 불가리아 땅에서

"σοφία[소피아]"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리고

불가리아어 교재에 나오는,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전설에 보면,


도시 "소피야"여자 이름 "소피야"에서 기원한다.


전설에 따르면,

옛날 옛적 비잔틴 유스티아누스 황제에게

아픈 딸이 하나 있었는데,

(찾아보니 그는 6세기 사람이다)

깨끗한 공기, 아름다운 자연, 좋은 날씨와 쾌적한 기후, 광천수가 있는

이 땅에 와서 병이 낫게 되었다.


(다른 건 다른 불가리아 땅, 그리스 땅에도 있으니

여기서 가장 중요한 건 아마 광천수리라.)


이러한 기적적인 일에 대해

신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황제는 이 곳에 성당을 짓고,

자기 딸의 이름을 붙여

"성 소피야 성당"이라고 부르게 된다.


전설과 역사가 뒤섞인 이야기

그 이후 역사로 연결되어

14세기 그 성당의 이름을 따라

이 도시가 외부인들에게

"소피야"로 불리게 되는 것이다.


다른 유럽어에서와 마찬가지로

불가리아에서도 "소피야"는 여자이름이 되는데,

사람 "소피야"와 도시 "소피야"는

강세가 다르다.


사람 София[소야]는 и[이]에,

도시 София[피야]는 о[오]에 강세가 온다.




전설 속의 비잔틴 황제의 딸 "소피아"가

요양을 하며 병을 치유했다는

물 좋은 도시 "소피야"에는

아직도

온천이 있다.


있기만 한 게 아니라

많기까지 하다.


소피아는 1C 경부터 

울피아 세르디카(Ulpia Serdica)라는 이름의,

발칸지역의 거점이 되는

중요한 로마제국의 도시였는데,


당시 로마황제가 소피아를 지역거점으로 삼은 것도,

발칸반도의 중심이라는 그 지리적 중요성과 더불어

온천이 나오는 곳이었기 때문이란다.



한국에는 거의 안 알려져 있지만,

불가리아어 교재 속 텍스트에 따르면

불가리아 온천은 외국에서도 유명하단다.


소피아 뿐 아니라 불가리아 전체에

500여개의 온천이 있다고 한다.


아래 지도에서 붉은 색 점이 온천인데,

붉은 점이 밀집된 5번 지역이 소피아이고,

소피아엔

총 49개의 온천 및 광천이 있다.


(지도출처 :http://www.eco-energy-bg.eu/SPEE/Files/Read1EnergyPBG.php?id=13&language=2&typeenergy=6)


소피아에 있을 때 검색했던

불가리아 유학생의 블로그에 보면,

소피아 남부 어딘가

어느 버스 종점 쯤에

한국 대중목욕탕이랑 비슷한 분위기의

온천도 있다고 한다.


그거 보고 재밌겠다 싶어서

한번 가볼까 생각도 했었는데,

나중에 가야지 하면서

미루고 미루다가 결국 못 갔다.


한국에서도 온천을 즐겨찾는 편이 아니라  

소피아에 있는 동안에도

"온천 가보기"가 우선 순위에서 밀린거다.


그리고 아마 갔었어도,

다른 온천이 어떤지 모르기 때문에,

소피아 온천이 어떻게 다른지

별 차이 못 느끼고 왔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지금 찾아보니,

버스 종점까지 힘들게 찾아가야 하는

그런 소피아 외곽의

한국 목욕탕 느낌의 공중 온천탕 말고도

시내에 스파가 많다.


Google 지도만 검색해도

대충 이런 그림이 나온다.


온천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괜찮은 스파를 하나 찾아서

비잔틴 황제 딸의 병을 낫게 한

그 영험한 온천을 직접 느껴보는 것도,

평소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동시에

현지인의 오래된 전설도 되짚어보는,

더 할 나위 없이 좋은 소피아 체험이 될 것 같다.



만약 나처럼 별로 온천을 즐기지 않거나,

좋아하긴 하나 시간이 없어서

갈 수 없는 사람은


아쉬운 대로

소피아 시내 한복판에서

옷 다 입고, 신발 다 신고,

야외에서

무료로


소피아 온천물이 어떤지

짧게 나마 그리고 얕게나마

체험해 볼 수 있다.


아래 지도에서 붉은 색 동그라미 표시가 된 곳이

바로 온천수가 나오는 곳인데,


하늘색 네모 속 М 으로 표시된

지하철 Сердика[Serdika, 세르디카] 역에 가까운

소피아의 가장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다.



불가리아어로 минерален извор (광천)라 불리는

이 곳에는

여러개의 상하수도가 설치되어 있는데,


따로

물을 틀지 않아도

계속 따뜻한 온천수가 콸콸 흘러나온다.


그리고

사람들은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집에서 빈 병을 들고와서

거기에 온천수를 담아간다.


마치 뭔가 "확장된 약수터", "대형화된 약수터" 같은 느낌이다.


사진엔 안 나타나는데,

가까이 가면 정말 연기 같은 게 나기도 하고,

만져보면 물은 따뜻하다.


진짜 그런지

기분만 그런지

이 근처는 왠지 공기도 더 따뜻한 것 같았다.


이 노천 공공 온천수는 마셔도 된다고 한다.


아니

어쩜 마셔도 될 뿐 아니라

그래야 몸에 더 좋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소피아에서 머물던 숙소가

시내 근처가 아니라서

난 이 사람들처럼

큰 병에 담아가진 못했고,


가방에 있던 500밀리리터 작은 병에

조금 담아 가서

조심스레 마셔봤는데,

나는 둔감해서 그런지

좋은지 잘 모르겠다.


그래도 뭐 적어도 나쁘진 않았다.


사람들이 이렇게 빈 병을 가지고 와서

온천수를 담아가는

약수터를 닮은 풍경이

어딘지 모르게 낯익으면서,


다른 한편으로

우리 같으면

시내에 이렇게

넓은 지역을 차지한 온천이 있으면,


나라나 시나 사기업이

무언가 공공 또는 사설 시설을 짓고

사업을 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는 좀 낯설기도 했다.


이 귀한 걸

이렇게 공짜로 막 나눠주나 싶어서 말이다.


수십년간 공산정권을 겪어서

아직 자본주의 마인드가 강하지 않나 싶었다.


(2014년 1-2월, 노천 광천수, Sofia, Bulgaria)
(2014년 1-2월, 노천 광천수, Sofia, Bulgaria)
(2014년 1-2월, 노천 광천수, Sofia, Bulgaria)


불가리아와 소피아 사람들이 온천수를 사용한 건

기원전 4000년경 트라키아인

이 곳에 거주할 때부터라고 한다.


그러고보면

그렇게 수천년간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해오던 곳에

갑자기 담을 치고

입장료를 받고

물 값을 받는 게 더 이상하긴 하다.


여기 이 공공 노천 온천수 급수대 뿐 아니라

인근 건물들도포함하는 넓은 지역 전체가

로마시대 때는

커다란 공중목욕탕이었다고 한다.


그 남쪽에 자리잡은

반스키 광장(Площад Бански, Banski square)

의 이름도

"목욕탕/사우나 광장"이라는 의미다.


광장에 이런 이름이 붙은 직접적인 이유는

아마도

바로 위 사진에서 멀리 보이는,

그리고 아래 사진에 뒷모습이 보이는,

현재 소피아 역사 박물관(Sofia History Museum, Музей за история на София)

으로 사용되는 건물이


오스만제국으로 부터 독립한 이후

세운 공중목욕탕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19세기에 터키식 목욕탕으로 건설한 건물이라

다른 유럽에서 만나기 쉽지 않은

이국적이지만 독특한 멋이 있는 외관을 뽐낸다.


(2014년 1-2월, 역사박물관, Sofia, Bulgaria)


소피아 역사 박물관 서쪽의

반스키 광장 끝에는

현재 소피아에 남아 있는 유일한 이슬람 사원

바냐 바쉬 모스크(Джамия Баня Баши, Banya Bashi Mosque)

가 있는데,


1566 - 1567년에 건설되어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이슬람 사원 중 하나인

이 건물도 원래  

노천 온천이 있던 자리에 건설되었다.


러시아 위키피디어에 따르면

바냐 바쉬는 "많은 목욕탕"이란 의미라고 한다.


현대 불가리아어엔 bashi라는 단어가 없는데

터키어로 '많다'는 뜻인지

아님 고대 불가리아어로 그렇다는 건지 모르겠으나,


현대 불가리아어에서도

banya는 여전히 "목욕탕"이라는 의미어서

이 이슬람 사원 이름이

"목욕탕"과 관련된 건 확실하다.


나는 지나다니면서

한번도 그런 건 못봤지만,

이 건물에서 수증기가 올라오는게

보이기도 한단다.


오스만터키가 온천 위에 일부러

이슬람 사원을 건설한 것 같지는 않고,

소피아 도심에 짓다보니

어쩌다 그리 된 것 같다.


위 지도 위에 표시한 것처럼

이 근처에는

이슬람사원 말고

유대교, 동방정교의 다른 종교건축도 많이 있다.


(2014년 1-2월, 이슬람사원, Sofia, Bulgaria)
(2014년 1-2월, 이슬람사원, Sofia, Bulgaria)
(2014년 1-2월, 이슬람사원, Sofia, Bulgaria)


내부의 장식이 매우 멋지다고 하는데,

들어가보지는 않았다.


이건 이 이슬람사원의 내부의

가상 투어를 할 수 있는 사이트고

http://www.bgpanorama.com/index.php?option=com_content&task=view&id=33&Itemid=53


이건 유튜브에서 찾은 동영상이다.


아마도 예전에 오스만제국의 지배를 받을 시기엔

많았겠지만

지금은 소피아 시내에 이슬람교도가 많지 않아,

여기는 불가리아인들보다

외국인들이 더 많이 이용하는 것 같다.


그래서

이 이슬람사원 근처에선

유독

다른 나라에서 온 이주민들이 많이 보인다.


나는 소피아 간 첫날

저녁에 7시쯤

혼자 시내 구경 나갔는데,

여기가 무슨 건물인지도 모르고

이 건물 밑을 지나다가,

어둠 속에서 불쑥 나타나

내게 인사를 했던

어떤 흑인남자를 보고

등 뒤가 서늘해지며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강한 공포를 경험했다.


마침 그 때

지나다니는 다른 행인이 별로 없긴 했지만

한밤중도 아니고 저녁인데다가,

사실 그는 나한테 인사말고

어떤 위협적인 행동도 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그 때의 충격이 너무 커서

그 다음부터는 

해지고는 이 근처에는 잘 가지 않고,


날이 밝아도

이 근처를 지날 때

몇몇씩 모여 있는 피부색이 어두운 사람들이 보이면

눈을 마주치지 않으면서

긴장하면서 지나다녔다.


그 이후에 아무도

내게 인사를 건네지 않았고,

이 근처에서 공포를 경험한 적도 없었다.


혹시 모를 위험을 예방하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게 현명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근처에서 어떤 영국식 억양의 백인남자가

어둑어둑한 저녁에

가로등 불빛 아래서 나에게 길을 물었을 때는

좀 경계를 하긴 했어도

그렇게까지 공포를 느끼지 않았는데,


분절된 말로 표현하거나

구체적인 생각으로 품어본 적이 없는

그런 특정 인종이나 지역 사람에 대한 편견을

내 몸이 반사적으로 드러내는 걸 보고,

나 자신에게 좀 놀랐었다.


소피아는 시내도

어디가나 별로 북적북적하지 않고

가로등이나 상점의 네온사인도

한국처럼 밝지 않아

밤거리가 좀 더 어둡고 고요하긴하다.


비록

한낮 소피아 시내에서

어설프게 소매치기를 시도하려다

실패한 집시를 만난 적은 있지만,


알고보니 거긴 원래 소매치기 출몰지역이었고

거기 말고 다른 곳에선

특별히 치안이 불안하다는 느낌을 받은 적은 없다.


그게 그냥 내 개인적인 인상인지

원래 그런지

궁금해서 찾아보니

소매치기나 좀도둑은 가끔 만날 수 있지만,

전반적으로 소피아는

범죄율이 높은 도시는 아니라고 한다.


아마 앞으로 가끔 이야기하겠지만,


오히려

대부분의 불가리아인들은

다른 데서 경험한 적 없는

목적 없고, 사심 없는

친근함을 드러내거나

친절이나 호의를 베푸는 경우가 더 많았다.


길 물었는데 자기도 모르면

인터넷 검색해서 알아봐주고,

뭐 사러 가면

덤으로 뭘 얹어주거나,

같은 식당이나 카페 두어번 가면

알아보고 먼저 반갑게 인사하기도 하고,

"이럴 때 이렇게 말해야한다"며

불가리아어 표현을 가르쳐주기도 한다.


외국인이니까 등쳐먹으려고 하기보다는

더 잘 해주고 도와주려고 했다.


그렇게 계속 사람들이

정서적으로 보듬어주니,

6주 불가리아에 있는 동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고

따뜻해지며

각박함이나 조급함을 버리게 되고

여유가 생기고

정신적으로 치유받는 느낌이었다.


그 때 찍은 사진을 보면

처음과 나중에 표정이 달라져있다.


비록 생각만 품다가

온천에 못 가는 바람에

몸은 비잔틴 공주가 경험한

제대로된 소피아식 치료를 받지 못했지만,


마음은 알게 모르게 치유가 되었고,


마음이 편안하니,

몸도 편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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