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와 나오키 책과 드라마를 보고
“당한 만큼 갚아준다!” 2013년 여름, 일본을 휩쓸었던 유행어다. 일본 방송 채널 tbs에서 방송되었던 한자와 나오키, 평균 시청률은 28.7%, 마지막 회 수도권 시청률은 42.2%를 찍었다.
사실 내가 한자와 나오키를 처음 접한 것은 책을 통해서였다. ‘이케이도 준’ 작가의 한자와 나오키 1,2권을 빌려 읽었는데 어찌나 이야기가 흥미롭게 전개되는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 자리에서 두 권을 뚝딱 해치웠다. 처음에 책을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고 그냥 눈에 띄어서 골랐는데, ‘한자’랑 ‘나오키’라는 두 인물이 셜록과 왓슨처럼 문제를 해결하는 이야기인가 싶었다. 그런데 일본의 보수적인 대형 은행에서 상사들의 부당함에 맞서는 통쾌한 복수극일 줄이야. 탄탄한 이야기의 책을 바탕으로 제작한 tbs 드라마는 그야말로 대박 나서, 일본 역대 드라마 시청률 순위 3위에 올랐다고 한다. 이 흥미로운 은행 내 복수극을 쓴 이케이도 준 작가도 은행원 출신이라고. 그래서인지 리얼리즘 요소도 꽤나 많이 반영되어있다.
한자와는 일본의 버블경제가 끝나갈 무렵 산업중앙은행이라는 대형 은행에 입사한다. 이후 산업중앙은행은 도쿄제일은행과 합병하여 도쿄중앙은행이라는 메가뱅크로 재탄생한다. 두 거대 은행이 합병된 만큼, 은행 내부에는 옛 산업은행 출신과 옛 도쿄은행 출신끼리 보이지 않는 세력싸움이 치열하다. 서로 다른 출신이면 승진에 훼방을 놓는다든지, 잘 쓴 품의서에도 딴지를 걸어 통과를 막는다든지 대놓고 배척하는 부조리가 판을 친다.
도쿄중앙은행 오사카 서부 지점의 융자 과장 한자와 나오키. 이야기는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우수지점 표창을 받아 임원 승진이라는 탄탄대로를 꿈꾸는 아사노 지점장은 개인의 사리사욕을 챙기기 위해 은행원으로서 넘어서는 안될 선을 넘게 되고, 그로 인한 문제는 부하 한자와에게 뒤집어 씌우고 ‘꼬리 자르기’하려 한다. 이에 굴복하지 않은 한자와가 지점장에게 맞서 승리하고 영업부 차장으로 승진까지 하는 것이 책 1권까지의 이야기다. 2권은 은행장 자리를 노리는 오오와다 상무의 음모 그리고 금융청의 도를 넘는 압박의 희생양이 될 뻔한 한자와가 반격을 가하는 이야기. 드라마는 2013년에 방영되었으나, 우리나라에 책 번역본이 출간된 것은 2019년으로 상당한 차이가 있다. 3권, 4권도 출간되었고 이번 달에 tbs 방영을 앞두고 있었으나 코로나 19 사태로 인해 제작 일정에 지장이 생겼다고 한다.
한자와 나오키를 읽고 보면 ‘아니, 일본 직장인이 이렇게까지 한다고? 이거 괜찮은 거야?’ 싶은 지점이 왕왕 나온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생각하는 일본인 개인, 특히 직장에서의 일본인은 상명하복이 심하고 특히 부하직원이 상사에게 대드는 것은 상상이 힘든 이미지였다. 우리나라 직장인들도 대부분 상사에게 하고픈 말 속시원하게 하지 못하는 분위기지만, 일본인은 그 정도가 더 심한 줄 알았다. 그러나 한자와는 부당한 지시를 내리는 상사에게는 ‘그건 아닌 것 같다!’라고 말하는 것은 물론이고, ‘공은 상사의 것, 실수는 부하직원의 책임이라는 것 아닙니까!’하는 사이다 발언을 속시원히 쏟아낸다. 적에겐 두렵고 영악하게 보이는 우리 편이 역경을 딛고 결국에 승리하는 모습은 카타르시스를 안겨주기에 충분하다.
특히 ‘당한 만큼 갚아준다.’라는 대사는 유행어가 될 정도로 일본 사회에 울림이 컸다고 했다. 부당함을 속으로 삭히는 게 아니라, 상사가 소리 지르면 같이 소리 지르고, 열 받으면 상사 이름 그냥 막 부르고, 멱살도 잡고, 무릎 꿇으라고 윽박지르기까지 하는 한자와의 모습에, 일본의 수많은 ‘을’로서 살아가는 직장인들이 카타르시스를 느낀 것이 틀림없다. 책으로만 봐도 서슬 퍼런 한자와의 사자후에 속에서 사이다가 팡팡 터지는데, 그걸 시각적으로 구현한 드라마에서는 한자와 배우가 너무 눈을 희번득 뜨고 소리를 질러서 무섭기까지 했다.
특히 아사노 지점장 역으로 눈동자가 크고 맑은 미중년 배우가 나오는데 그를 앞에 두고 멱살을 잡고 흔들며 도끼눈을 뜨면서 ‘용서 못해!!!! 아사노, 네 가족까지 다 부숴버리겠어!!!’하는 모습을 보면서는 지점장이 가엾게 느껴질 정도였달까. 오오와다 상무에게 무릎 꿇고 사죄하라며 눈에 눈물을 그렁거리면서 절규하는 한자와를 보면서는 ‘그만하면 됐잖아, 그만해 한자와 ‘하면서 말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만큼 배우가 한자와에 몰입해서 임했다는 뜻이겠지만. 책과 드라마 내용의 큰 줄기는 비슷하지만, 드라마에서는 두 권에 해당하는 책 내용을 10부작으로 만들면서 갈등이 더욱 부각되도록 약간 각색했다.
나도 책을 읽고 드라마를 보면서 직장생활을 하며 느꼈던 울분들이 스쳐 지나갔다. 내 의견을 묵살하며 본인이 다 책임지겠다 밀어붙여 놓고 일이 틀어지자 나에게 떠넘겼던 상사, 자기 기분 안 좋다고 나에게 화풀이했던 상사, 낮에 일 주고 오늘 저녁까지 보자고 한 상사, a를 시켜놓고 본인이 언제 a 시켰냐고 b였다고 발뺌하는 상사. 나는 크고 작은 분노를 속으로 삭힐 뿐, 부당함에 대들지 못했다. 다른 직장인들도 대부분 비슷한 애환을 겪었을 것이다. 한 번이라도 그런 억울한 일을 겪었던 사람이라면 한자와에 본인의 모습을 투영시켜 볼 수 있다. 나는 강하게 저항하지 못하고 당했지만, 한자와는 거품 물고 대놓고 칼을 갈며 복수를 해준다. 속이 시원하다.
한자와의 복수는 가볍지 않다. 상사에게 대들 때 그는 항상 자신의 목을 내놓고 진심으로 대든다. 그가 처하는 함정도 최소 좌천당하거나 은행에서 잘릴 정도로 깊어서, 허술한 반격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한자와는 무겁게 분노하고 철저히 계획을 세운다. (이는 한자와 어릴 적 아버지 일로 은행에 증오를 품을 만한 사연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에게는 원칙이 있고, 계획을 실행시킬만한 행동력도 있다. 도산 위기의 중소기업을 컨설팅해주고 어떻게든 대출을 지원해주며 살리려 하는, 인간적인 은행가의 마음을 가진 한자와는 그 의리로 주변에 자기 사람들을 만들어 간다. 상사가 일으킨 부정의 증거를 잡기 위해서 며칠을 잠복하고, 수없이 많은 서류를 뒤지며 발로 뛰면서 고군분투한다. 때로는 눈물을 머금고 분하게 무릎 꿇게 되더라도, 큰 그림의 복수를 위해 참을 줄 안다. 진정 통쾌한 복수를 위해 칼을 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여주는 인물이다.
훌륭한 조력자들도 있다. 한자와의 동기인 ‘도마리’는 똑똑하고 눈치 빠른 사내 정보통이고, ‘곤도’는 병으로 은행을 휴직하며 파견 형태로 좌천당했지만 한자와의 복수를 지원해주는 인물이다. 한자와의 아내 ‘하나’ 또한 때때로 매섭게 한자와를 몰아붙이지만, 사택 내 은행원 아내들 모임을 불편해하면서도 기꺼이 참여하며 그를 위한 정보를 모아주는 야무진 면모가 있다. 단단하고 똑똑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한자와에 걸맞은 사람이다.
나도 언젠가 내 목을 졸라 오는 부당함에 마주한다면 한자와처럼 제대로 복수하고 싶다. 한자와처럼 부지런하게 발로 뛰고, 촘촘하게 자료를 뒤져가면서 모으고, 신뢰할 수 있는 나의 사람들과 함께 연합해서. 복수란 이를 갈며 준비한 자들에게만 허락되는 것. 그때를 생각하니 당해보지도 않은 거대 부조리에 맞서 싸우는 내 모습이 상상되며 벌써 속이 시원하다. 아, 그런 걸 애초에 안 겪는 게 더 행복한 삶일 거 같긴 하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