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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들 Jul 14. 2021

셜록 홈스와 함께한 여름

내가 여름을 좋아하는 이유

 웅웅 거리며 낮게 울리는 에어컨 소리. 사락사락 책장 넘기는 소리, 선반에서 책을 꺼내 드는 소리, 드르륵 조심스레 의자를 끄는 소리. 시끌시끌한 차량 소음과 눅눅하게 달라붙는 여름 공기가 사라지고, 땀에 젖었던 몸이 보송하게 마르면서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내 여름의 피난처, 도서관이다.

 

 책에 집중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조용한 분위기에 눈과 귀가 편안해진다. 적당히 시원한 에어컨 바람과 마른나무 같은 책 냄새에 몸이 편안함을 느낀다. 널찍한 책상에 자리를 잡고 가방을 내려놓음과 동시에 오늘은 어떤 추리소설을 골라 읽을까 하는 생각에 조금은 흥분되기 시작한다. 그렇다, 나는 여름에 읽는 추리소설을 사랑한다.

 

 처음 추리소설에 빠진 것은 대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방학이지만 기숙사에 살면서 토익 학원을 등록해 놓고 학교의 취업특강을 들었다. 나는 ‘취업하려면 영어 점수, 자격증 지금 만들어 놔야 한다’는 선배들의 무서운 조언에 불안해하는 취업준비생으로, 딱히 열심히 하는 건 아니지만 안 하고 있자니 찝찝해서 영어 문제집만 붙잡고 앉아있는, 뜨뜻미지근한 사람이었다.

 

 그날도 대기업의 인적성검사 문제집을 빌려볼 요량으로 학교 도서관으로 향했다. 도서관에 자리를 맡아두고 꿉꿉한 여름 습기만큼이나 가라앉은 기분으로 열람실을 터덜터덜 걸어가는데, 책장에 셜록홈스 전집이 꽂혀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시험이 다가오면 시험공부를 제외한 모든 게 재미있어지는 법. 나는 묘하게 이끌려 셜록 홈스 시리즈 중 ‘바스커빌의 가의 개’라는 책을 집어 들고 내 자리로 돌아왔다. 허연 표지에 ‘xx 모의고사’ 따위가 적혀 있는 흐물거리는 인적성검사 문제집들 사이에서, 검은 양장본의 셜록 홈스는 남다르게 위엄 있어 보였다. '머리 식힐 겸 잠깐만 읽어보지 뭐' 하고 첫 장을 펼치고 정신을 차려보니 두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

 

 정말이지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세상이었다. 원래 책을 좋아하는 편이긴 했지만, 추리소설은 유치하다고 꺼려왔었던 과거의 내 머리를 한 대 쥐어박고 싶을 정도였다. 무섭도록 창의적인 범행 방식, 범죄자들의 뒤틀린 심리 묘사. 범인의 동기와 그 수법이 밝혀지는 순간 느껴지는 카타르시스. 내 예상을 보란 듯 뒤엎는 셜록과 왓슨의 활약은 그 어떤 블록버스터 영화보다 흥미진진한 전율을 안겨주었다. 결국 나는 인적성 문제집 대신에 ‘네 사람의 서명’, ‘주홍색 연구’ 같은 셜록 홈스 장편소설만 빌려 기숙사로 돌아왔다.

 

 열어둔 창문 사이로 불어오는 시원한 여름밤 바람을 맞으며 읽는 셜록 홈스는 최고였다. 나는 완전히 몰입해 셜록과 함께 의뢰인의 편지를 받고, 마차를 타고 달렸으며, 사건의 대저택에 머물렀다. 소설 속 묘사를 보면서 머릿속으로 장면을 상상해 나가는 것도, 사건의 범인을 내 나름대로 추리해보고 셜록과 비교해보는 것도 더없이 즐거웠다. 그저 그랬던 무채색의 여름 방학에 처음으로 알록달록한 색채가 입혀진, 그 어느 때보다 불타오르는 밤이 이어졌다. 사냥 모자를 쓰고 망토 달린 코트를 입고 파이프를 입에 문,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이 탐정에게 빠진 나는, 좋아하는 작품을 몇 번이고 반복해 읽으며 내 세상을 확장해 나갔다.

 

 9월, 2학기가 시작되었고 캠퍼스에는 방학 때보다 더 활기찬 분위기가 피어올랐지만, 왠지 가을에 펼친 셜록 홈스 소설은 여름밤 읽었던 것처럼 신나지 않았다. 여전히 재미있었지만, 무아지경이 되어 읽어 내려갔던 여름 방학 때만큼의 흥은 없었다. 아무래도 나무 이파리 냄새가 묻은, 무더위가 한 김 식은 바람이 부는 여름밤에 나와 셜록의 궁합이 가장 잘 맞나 보다. 심장을 서늘하게 만드는 추리소설의 트릭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찬 기운이 들이치는 가을이 되자, 나는 내 마음속 뜨거운 영웅을 잠시 보내주기로 했다.  

 

 이후 나는 여름이면 전 세계에서 미궁에 빠진 사건들을 해결하는 이들과 친구가 되었다. 셜록 홈스, 에르퀼 푸아로에서부터 가가 교이치로까지. 내 부실한 상상력의 틀을 깨부숴주는 이들 덕분에 나는 여름을 기다린다. 그들과 함께하는 복잡하고, 위험하며, 흥미로운 여름날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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