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을 무서워하는 진도 믹스의 목욕이야기
드디어 때가 왔다! 우리를 반기며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는 뿌꾸를 쓰다듬어줄 때 손에 느껴지던 꾸질함, 그 찜찜함을 없앨 시간이!
뿌꾸는 밖에서 크고 있어서, 자주 목욕을 시키지 않았다. 처음 왔을 때 한 번, 작년 여름에 너무 더워하는 것 같아 수영을 가장해서 또 한 번. 부끄럽지만 견생 18개월 중 목욕 한 횟수는 한 손에 꼽을 정도다. 비가 오면 들어가라고 뿌꾸 집안으로 밀어 넣어도 밖에 고집 있게 꼿꼿이 서서 주룩주룩 내리는 비를 바라보다 밖에서 잠들어 버리니까, 얘는 이렇게 스스로 목욕을 하는 건가 싶기도 했다.
뿌꾸의 털은 짧은 편인데, 이중모가 빽빽하고 방수처리라도 되어있는 마냥 물을 부으면 그대로 몸을 타고 흘러내려버리는 모질이었다. 그래서 만져보면 항상 건강하고 탄력 있는 털이었고 더러움이 묻는 일도 좀처럼 없었다. 그래도 날이 따뜻해지면서 스멀스멀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혹시나 진드기 같은 게 붙어 있을까 봐 큰 맘먹고 목욕을 시켜 주기로 했다!
목욕이라는 일상 행위에도 우리 가족이 큰 맘을 먹어야 했던 것은, 우리 뿌꾸는 물을 너무 싫어하기 때문이었다. 작년 여름에 날이 너무 더워서 털 코트 입은 뿌꾸는 얼마나 더울까 안쓰러워하며 주문한 대형 조립형 수영장에 물을 받고 있으니, 뿌꾸는 기겁을 하며 안 들어가려고 무진 애를 썼다. 아직 물이 익숙지 않아서 그럴 거야 하며, 겨우 어르고 달래 뿌꾸를 들고서 수영장 안에 집어넣었더니 표정이 아주 가관이었다. 왜 나한테 이러는지 모르겠다며 원망이 잔뜩 서린 눈빛으로 쳐다보길래 괜히 미안해졌다. 워낙 자주 짖지 않는 애라 말로 화내지는 않았지만, 눈이 축 처지고 꼬리도 덩달아 굳어버리는 게 잔뜩 겁먹은 게 분명했다. 모처럼 마당에 큰 공사 했는데, 뿌꾸 반응이 신통치 않아 다들 머쓱해하며 슬쩍 목욕이나 시키고 금세 마당으로 다시 놓아주었다
지금은 그때보다 무려 8개월은 더 자란 상황. 힘이 세졌음은 당연하거니와, 거의 매일 마당 뜀박질과 장거리 산책을 하면서 체력도 더 좋아져, 과연 우리 자매가 뿌꾸를 얌전히 목욕시킬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더 미룰 수 없었다! 유기농 샴푸와 수분 흡수가 좋고 빨리 마른다는 스포츠 수건, 대형견들이 그렇게 좋아한다는 마약 쿠션을 마련하고 김해로 들어서는 우리 자매의 태도는 의연했다, 기필코 우리 막내를 깨끗하게 목욕시키리라!
작전은 이랬다. ‘아이 목욕하니 기분 좋다, 목욕하러 가고 싶다, 목욕이나 갈까?’ 하며 ‘목욕’ 단어를 며칠 전부터 뿌꾸 귓가에 재잘댄다. 뿌꾸가 ‘목욕’이 뭐지? 하고 갸웃 댈 때쯤 낮 시간에 뿌꾸를 번쩍 들어 집 안 샤워실로 들인다. 미리 준비해놓은 온수를 슬쩍슬쩍 끼얹으며 간식으로 혼을 빼놓는다. 물에 익숙해지고 공포심이 줄어들면 우리 자매는 재빠르게 비누칠과 헹굼을 끝내고, 화장실에서 수건으로 물기를 다 닦아 낸다. 운이 좋다면 드라이기로 털 건조까지 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거실에 마련해놓은 대형견 방석에 뿌꾸를 올려놓고 어느 정도 뽀송해질 때까지 데리고 있는다. 이는 목욕 후 갑자기 찬 바람 쐬어서 감기 걸리지 않도록 하는 예방 목적과 집 안을 들어와 보고 싶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뿌꾸에게 집 구경을 시켜주기 위한 우리 자매의 흑심이 더해진 계획이었다.
해맑은 뿌꾸는 오늘도 언니들이 마당에서 같이 뛰어다니며 놀아줘서 좋은 모양이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얌전히 데크 위에 앉은 뿌꾸를 번쩍 들었다. '음, 무게가 더 늘어난 것 같군' 하며 후다닥 욕실로 들어가 동생과 욕실 문을 닫았다. 낯선 장소에 들어온 뿌꾸는 어리둥절하다. 뿌꾸는 겁이 많은 편이라 맘에 안 드는 낯선 곳에 오면 굳어 버린다.
간식을 머리 위에 올려놓고 말을 걸고 해도 뿌꾸는 커다란 눈망울만 데록 데록 굴리며 대체 여기가 어딘가 하는 표정으로 우리를 쳐다보기만 했다. '에잇 어쩔 수 없지, 이렇게 된 이상 속전속결이다!' 하며 온수를 슬쩍 뿌꾸 몸에 끼얹으니 어라, 생각보다 반응이 얌전하다. 그 넘치는 힘으로 욕실을 초토화시키면 어쩌지 하던 걱정은 사라졌고, 살짝 달큼한 향이 나는 샴푸를 짜내서 조물조물 문질러주기 시작했다. 발을 씻을 때는 앞발을 쓱 올려주는 매너까지 보여주니, 우리 뿌꾸가 어른이 다 되었구나 하고 뿌듯하기 까지. 다만 이게 뿌꾸 자의적인 얌전함이라기보다 너무 놀라서 굳은 것에 더 가깝기는 한 것 같지만 말이다.
아직 털갈이 시기가 아니라서 털이 빠지지도 않았고, 우려했던 진드기 같은 것도 없었다. 샴푸 칠하고 다 헹궈낼 때까지도 뿌꾸는 끝까지 얌전했다. 어찌나 착한지 아이 이쁘다 아이 착하다 우리 뿌꾸 우쭈쭈만 무한 반복했던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쉴 새 없이 떠드니까 그 소리에 정신이 없어서 가만히 있었던 걸 수도 있겠다.
미리 준비한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내고 보니 뿌꾸는 여전히 눈만 동그랗게 뜬 채 꼬리가 축 쳐져 있다. 하지만 얌전하니까 기회는 지금이야 하고 드라이기를 켜서 몸통 털을 말리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뿌꾸는 계속 영문모를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기만 할 뿐, 우려했던 드라이기와 뿌꾸 간 유혈사태도 없이 아주 평화롭게 목욕이 끝났다. 우당탕탕 할 것 같았는데 왜 이렇게 조용하니 하고 화장실 문을 열어보시던 엄마 아빠도 물에 빠진 생쥐 꼴을 한 얌전한 뿌꾸 모습에 웃음을 참지 못하신다.
자, 이제 나가자! 하면서 뿌꾸를 욕실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문을 열어주니 뿌꾸는 킁킁 거리며 거실로 향한다. 당장 마당으로 보내라는 엄마 아빠 눈치를 피해, 뿌꾸를 안고서 우리 방에 미리 가져다 놓은 대형견 방석에 뿌꾸를 올려놓았다. 세상 얌전해서, 어찌나 감격스러웠던지! 뿌꾸가 계속 이러면 무릎에 얌전히 앉아있는 무릎견이나, 효리네 민박에서 보던 것처럼 강아지랑 같이 잠드는 것도 가능할 것만 같았다.
뿌꾸는 낯선 이 곳이 우리 언니들이 생활하는 공간이구나 하며 킁킁거리고 다녔다. 그 와중에 약간 삐졌는지, 우리랑 눈도 안 마주친다. 그 고집 있는 꼴이 또 우스웠다. 거실로 쪼르르 뛰쳐나와서는 TV를 보고 계신 엄마 앞에 딱 붙어 선다. 이 엄마 껌딱지! 언니들이 자기 괴롭혔다며 일러바치는 듯했다.
그러다 바깥으로 통하는 방충망을 보더니 내보내 달라고 떼를 쓴다. 이 줏대 없는 강아지가 전에는 밖에서 안으로 들여보내 달라고 난리 더니, 지금은 또 나가고 싶다고 계속 낑낑대고 있다니. 결국 집 안에서 같이 놀려고 했던 우리 자매의 흑심은 꺾이고, 뿌꾸와 데크에 앉아서 나른한 햇살을 받으며 시간을 보냈다.
이상하게도 뿌꾸는 정신없이 뛰어다니다가도 단 둘이 데크에 앉아있을 때는 세상 순한 강아지가 된다. 그냥 얌전히 앉아 있다가 쓰다듬어 주면 그 손길에 좋다고 꼬리 흔든다. 목욕해서 삐졌을 수 있지만 언니들 장난에 꼬리 흔들며 받아주는 것을 보고, 우리 뿌꾸는 정말 천사야 하고 생각했으니까. 올여름에는 뿌꾸 수영장을 다시 한번 설치해봐야겠다. 목욕을 이렇게 용감하게 이겨내는 것을 보니, 뿌꾸도 조금씩 성장하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