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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dion Feb 01. 2020

광장에 관람자로 서있는 내 모자란 감식안과 한켠의 의문

<광장: 미술과 사회1900-2019>3부를 다녀와서

내가 컨템포러리 아트에 두려움이 있는 건 분명한 사조가 두드러지지 않고 미술사적 평가가 아직 완결되지 않아서 파악하는데 있어 근거가 될 만한 것은 나의 개인적 감각뿐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물론 요즘 제일 '핫한' 작가는 분명히 있겠지만 나는 평단의 평이나 가격 같은 정보에 가깝지 않으니까 결국 남는 것은 개인적인 감각이다. 그게 나쁜 것은 아니다. 포스트모던 이후부터는 작업은 작가의 소유물이 아닌 관람자에 의해 의미가 발생하는 것이 되었다고 하니.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컨텍스트를 파악해야 한다. 하지만 오늘날의 작품들은 그리 친절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작가가 의미를 담아 설정한 부분을 부연 설명이 없어 알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 여하튼 나는 그럼에도 전시를 봐야 했음으로 미술관에 갔다.


전시장 초입에는 「광장」이라는 제목으로 일곱 명의 작가가 쓴 일곱 편의 단편 소설을 엮은 책이 놓여 있었다. 일곱 편 각각에 광장이 등장하지만 광장 자체가 중심에 오는 이야기는 윤이형의 첫 번째 단편 정도였다.멀지않은 미래에 촛불혁명에도 불구하고 다시 수구 우파가 정권을 잡고 광화문광장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복합 문화 공간을 건립해 그 안에서 집회를 열도록 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한다. 이에 반대하는 아흔 여섯 명의 만화가들이 단톡방을 개설한다.단톡방에 광장 철거에 반대하는 릴레이 만화를 연재하자는 의견이 올라오지만 인지도 없는 만화가들은 들러리로 전락할 것이라며 단체행동을 해도 모두가 평등하지 않다며 방을 나가버린다. 이를 계기로 단톡방 분위기는 나빠지고 하나둘씩 탈퇴하게된다. 사람들이 차이와 다름 속에서도 뭉쳐서 하나의 소리를 내는 일이 쉽지않다는 것을 주인공은 절감한다. 그런 가운데 심적으로는 나가는 사람도 남는 사람도 이해하지만 어느 쪽으로도 행동을 취하지 못하고 있던 주인공에게 모임의 실질적 구심점인 만화가가 다른 몇몇의 만화가들을 대리고 주인공을 찾아온다. 그 시점에서야 왜 주인공이 선뜻 나서지도 못하고 광장철거 반대 시위에도 참석하지 않았는지가 밝혀진다. 그녀는 사고로 걷지 못하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주인공은 자신이 그린 걸을 수 있는 주인공들과 자신의 처지 사이의 괴리에 어두운 감정이 맺혀있었다. 그러나 자신을 찾아온 만화가들의 방문으로 그녀는 광장 철거에 반대하는 릴레이 만화 그리기에 참여하기로 마음을 굳히고 처음으로 자신의 만화 속 주인공을 자신과 같은 다리를 못 쓰는 장애인으로 그린다.


"광장에서 차별과 혐오가 먼저 발생했어요. 여성과 소수자, 청소년에 대한 차별을 담은 구호가 외쳐졌어요.한 자리에 모여서 같은 싸움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어떤 사람들을 자신과 같은 인격체로 보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던 거에요. 그리고 윤리적인 일을 하기 위해 만들어진 모임들에서조차 성폭력과 노동착취,나이 어린 사람들에 대한 연장자의 하대 같은 일이 숱하게 발생했어요. '자유로운 개인들의 느슨한 연대 '였는데 너무 자유롭고 느슨한 사이사이에 폭력이 숨겨져 있었던 거예요."


소설 속 이 대사는 광화문 광장 뿐 아니라 광장으로 대변되는 우리 사회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사회는 개인들로 이루어지고 개인과 개인, 개인과 사회사이의 연결은 갈등과 폭력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소설은 그럼에도 개인과 사회와의 연결은 의미 있는 연대로서도 이어진다고 이야기한다. 이런 윤이형의 메세지 외에도 다양한 작가들이 전시 제목인 광장과 관련된 생각을 펼쳐 놓았다.


오형근이 찍은 20대에서 30대의 젊은이들, 주황의 취업과 이민으로 한국을 떠나는 여성들의 사진, 사진과와 모델 사이를 낯설게 남겨두는 촬영방식으로 집안의 인물들을 창가에서 찍은 요코미조 시즈카의 「타인」연작, 로힝야 난민촌 방문 경험을 살려 갯벌에 집을 짓고 조수와 기상상황 속에 버티는 송성진의 「한평조차」, 휴대폰과 노트북을 분실한 경험부터 시작해 신종 자살 클럽을 취재하는 내레이션과 광화문을 배경으로 한 레이싱 게임화면을 교차시키는 김희천의 「썰매」, 체육관에서 불편하게 잠을 자는 사람들을 보여주는 영상인 함양아의 「잠」 , 에릭 보들레르가 미승인 국가인 아브하지야의 외교관 친구와 나눈 서신 교환 「막스에게 보내는 편지」등의 작업이 이어졌다. 이 작업들에서 분명한 공통점을 찾을 수 없었다. 각자 제 각각이었고 단편소설집의 첫 번째 단편 소설과 비교하면 광장이라는 주제가 직접적으로 들어가 있지 않았다. 처음에는 이런 제 각각의 느낌이 어리둥절하게 다가왔지만 곧 이런 주제들, 사회 속의 개인의 초상이나 살 곳에 뿌리 내리기를 통한 생존의 문제, 디지털 세상 속에서의 시공간에 대한 인식 변화와 그 속에서 일어나는 폭력, 재난을 비롯한 현대 사회에 벌어지는 각종 위기 속의 공동체, 국가라는 공동체의 성립 조건 등의 주제들이 모여 광장의 다양한 목소리, 사회 안의 다양한 요소들을 보여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요소들의 다양성은 포스트모던 이후의 변화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거대 담론에 대한 거부와 주체의 확대를 통한 탈 중심화가 하나의 순수하고 이성적인 답만을 추구하길 거부하게 했고 여러 목소리들의 공존이 자연스럽게 되었다. 전시 안에서 통일성 보다 작가와 작업 개개의 의식과 색채가 제각각인 점은 이런 변화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광장의 '느슨한 연대' 처럼 느슨하게 모인 작업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런 가운데 가장 직접적인 주제 제시를 하는 작업이 서사가 분명한 소설이었다는 점은 흥미롭다. 물론 포스트 모더니즘적인 해체성을 추구하는 소설이었다면 서사 자체가 무너진 글일 수도 있었겠지만. 컨템포러리 아트에서 컨텍스트를 읽어내는 과정은 소설을 읽는 것과는 다르지 않을까. 동시대 미술하면 나는 친절한 서술이 아닌 던져 놓는 듯한 제시의 방식이 떠오른다.


그렇게 컨템포러리 아트에 대한 부담감에 눌려 있다가 문득, 미술이 ‘사회와 개인 사이에 의미 있는 역할을 할 수 있는가‘ 에 대한 의문으로 생각이 옮겨갔다. 미술로 연대하는 일이 가능할까? 가능하더라도 그 연대가 긴밀한 것일 수 있을까? 관람자 개인으로서 작가 개인이 만든 작품을 보면서 느끼는 바가 사회적 의미를 만들어 낼 것 같지는 않았다.그 느낌이 가시적 변화를 이끌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물론 작가의 작업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시대적으로 사회적으로 완벽히 동떨어져 있지는 않다. 작가가 적극적으로 사회에 대한 의미를 담기도 한다. 하지만 당장 법을 바꾸는 변화와 미술 작품 발표가 같은 위력을 지니지는 않지 않나.그것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그 결과적 위력을 크게 기대하는 일이 별로 미술의 특성에 맞지 않은 지도 모르겠다는 것이다. 참여한다는 자체에, 과정에 의미를 둘때에서야 개인이 미술을 통해 사회와 연결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문제는 참여가 된다. 작업을 함만으로 작가의 참여는 확실하지만 관람자의 참여는 어떻게 이루어 져야 하는 걸까. 나는 이 전시를 본 것만으로도 충분히 참여하게 된 것 일까? 동시대 미술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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