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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dion Mar 12. 2020

존재가 필연적으로 가져오는 고통 다루기

노교수의 마지막 철학 강의


월터 교수의 마지막 강의, 2015, 팀 블레이크 넬슨



이 영화의 원제는 'Anesthesia'다. 영어로 마취, 무감각증이라는 뜻이다. 제목처럼 영화 속 인물들은 자신의 삶 속의 진실을 무감각하게 외면한 채로 살아간다. 그러면서도 의식 저편으로는 무언가 부족하다는 걸 느끼고 있기에 일시적으로나마 충족시키기 위해 불륜을 저지르거나 술을 마시거나 마약이나 자해를 한다. 고통을 잊기 위한 이 시도들은 역효과를 불러일으킨다.


영화 도입부는 월터라는 철학 교수가 괴한의 습격을 받고 정신을 잃는다. 시간은 사건 전으로 돌아가 은퇴를 앞둔 월터 교수의 강의실부터 비춰주면서 영화의 주제가 될 존재론적 의문을 던진다. 이 의문을 던지는 교수, 월터는 영화 속 인물들 중 거의 유일하게-본인이 말하기로도-충실하게 살아온 중심 잡힌 인물이다. 그는 철학과 의미와 20세기의 가치관에 대한 믿음을 상징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인간으로 산다는 건 무엇인가. 다윈보다 앞서 객관적 분석을 하려던 사상가든 사고하고 지각 있는 존재가 결국 가는 곳은 무덤이죠. 아이들조차 자라고 나면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쪽을 택할 겁니다. 생각해 봐요, 고통받으며 사느니 살지 않는 게 낫죠. 그런데도 에로스에게 홀려 헛된 욕망을 갈구하다가 번식까지 시키고 말죠. 우리가 겪은 고통을 후대에 고스란히 넘겨줍니다. 사랑하고 번식하는 일이 어찌 보면 사악한 행위라 할 수 있죠. 이렇게 형편없는 세상에 자식을 내 맡기잖아요. 그렇게 잔인한 일이 어디 있어요."


글로 읽으면 염세적인 이야기로 들리지만 사실 이 말을 하는 월터 교수의 표정은 심각하지 않다. 유머가 담긴 뉘앙스에 강의실의 학생들이 웃고 저 대사 후 교수는 강의를 마치며 "그럼 이제 불금이네요."라고 말한다. 이날의 강의 후 아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그는 자신이 불멸이 아니라 다행이라고 말한다. 현실을 받아들임으로써 의미를 찾으려 애쓰는 그의 모습에서 달관마저 느껴진다.


이 뒤로 이어지는 다양한 군상들의 우리 주변에 있을 법한 문제들에 봉착한 일상이 펼쳐진다. 사춘기의 철없는 남매, 그들의 암에 걸린 어머니, 약물중독자와 그를 갱생시키려 애쓰는 흑인 변호사, 싸커맘이 된 여피족 출신 부인과 바람난 남편, 자해를 거듭하는 좌절한 대학생이 그들이다.


자해를 반복하는 철학과 학생 소피가 말한다.

"사람들은 점점 잔인해지는 것 같아요. 말도 못 할 정도로 다들 혈안이 되어 있죠. 돈과 일에만 집착한 채 어리석게도 자만하며 만족하죠. 말이 안 통해요. 저는 그들과 맞서죠. 다 없애버리고 싶어요. 저도 섞이고 싶죠. 정말 그러고 싶은데요, 이제는 어쩔 수가 없어요. 사람들은 사소한 일에만 골몰해서 어떻게든 편하게 살려고 하죠. 어디서 뭘 사고 뭘 먹을지, 무슨 영화를 볼지, 뭘 하든 그런 식이죠."

"그렇다고 왜 화가 나?"

"그럼 대체 뭐가 남겠어요?"

"네가 꼭 그럴 필요는 없잖아."

"말하자면요, 게임 같은 거죠. 저는 규칙이 뭔지 못 들었어요. 설령 들었다 해도 규칙을 따르기에는 역부족이죠. 그래서 트집이나 잡는 거예요. 악의적이 되는 거죠. 저도 형편없는 인간이에요. 제가 그들보다 더 형편없죠. 그런 제가 너무 싫어요. 정말 외로워 죽겠어요. 세상은 왜 그리 비열하죠? 왜 그렇게 무심할까요? 왜 그렇게 이기적이죠? 저는 왜 이럴까요?...... 저는 이 세상에 맞지 않아요."


얼핏 들으면 앞서 월터 교수의 쇼펜하우어 강의 말미에 나온 말과 비슷한 이야기 같다. 그녀 역시 철학적인, 즉 다른 사소한 일상이나 물질에 대한 중독 너머 직접적인 존재론적 인식을 하는 점에서 월터 교수와 비슷하지만 그 인식에 대한 직면을 버티지 못하고 자해를 한다. 그녀의 인식은 '나'라는 주관적 대상의 고통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소피의 이 대사는 다른 등장인물들이 똑바로 자각하지 못하는 보편적 삶의 고통, 문제점에 대해 직접적으로 진술한다. 이런 그녀를 위해 월터 교수는 같이 상담사에게 가고 자해 도구인 머리 인두를 압수하지만 소피가 이후의 삶에서 그 인식을 잘 받아들여 조화를 이루는 법을 깨닫고 월터 같은 사람이 되는지는 결말에서는 알 수 없다.


소피 외에도 각각의 인물은 의존과 중독뿐 아니라 사랑, 우정, 가족의 관계도 가지고 있지만 그것조차도 한 개인으로서 인간이 가지는 삶의 고통을 없앨 수 없다. 월터의 피습으로 깨달음을 얻은 불륜을 저지르던 남편은 부인에게 말 걸기를 시도하지만 거부당하고, 일과 여자에 눈이 멀어서 마약중독자 친구의 마지막 부탁을 거절한 변호사는 뒤늦게 그의 부고를 접하고 길가에서 구역질을 한다. 물론 영화에는 희망적인 부분도 있다. 마약중독자 친구는 한 사람을 구하고 죽음으로서 비로소 평온을 얻고 남매의 어머니는 성공적으로 수술을 치르며 끝나가는 결혼 생활을 술로 달래던 싸커맘은 술을 버리며 의지를 다진다. 영화는 이런 희망과 절망의 뒤섞임을 통해 삶의 본모습을 더 충실히 보여준다. 그냥 흘러가는 것, 그래서 의미를 찾기 위해 몸부림치나, 그 조차 힘들어 늘 고통스럽지만 그게 삶이라고.


말미에 영화는 다시 월터 교수의 강의실로 되돌아온다.


"20세기는 나의 세대이자 여러분이 태어난 때이기도 하죠. 많은 이들에게 희망, 자유, 가능성의 시대, 또 누군가에게는 자포자기와 절망의 시대. 가장 인간적인 세기. 니체가 옳았다는 것을 제대로 실감하게 됐죠.


우리는 결국 멋지게 그러나 가슴 아프게 혼자입니다. 이런 공허감 속에서 철학은 최악의 경우 구시대의 관심사로 전락하죠. 옳고 그름, 선과 악에 대한 논의를 제시해온 의미론적이고 자기반성적인 상대주의가 되고 말죠.

의미를 잃어버린 자아를 탐색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가장 자극이 될만한 또 다른 질문을 던집니다. 요컨대 이런 거죠. 어떤 질문들일까요?


우리는 대체 왜 사는가? 어떻게 하면 인간답게 살 것인가? 그들은 지금 어떤가 묻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답을 찾고 있습니다. 다음 세기 여러분의 시대가 오면, 우리는 뭘로 버틸까요? 누군가에게는 터무니없고 종잡을 수 없는 진리 탐구를 결국 단념하게 될까요? 윤리? 도덕? 선? 그 자체로는 입증될 수 없는 원리들이 지금이라고 쉽게 입증되나요? 아니면 이런 게 끝내 다 무의미한가요? 이제 끝인가요?


우리는 도시를 파괴하거나 지구를 돌이킬 수 없게 바꾸죠. 전 세계 어디서나 얼굴 보며 얘기할 수 있어요. 그런 것들에 빠져 있는 와중에도 필요한 곳에 생명력을 불어넣기도 하죠. 그런데도 왜 여전히 목적의식을 추구할까요? 그리고 필요치 않다고 장담하면서도 그걸 어디서 찾고 싶어 할까요? 그래서 우리는 방황합니다. 과학기술, 의학, 무신론이 우리의 환상을 불사를 때입니다. 전능하나 실상은 더 나약하고 두려움과 불안에 차서 우리를 제대로 이끌지도 못한 채로요.


이 강좌가 끝난다고 해서 이런 난국이 끝날 것 같지 않아요. 계속될 겁니다. 내가 30년 이상을 가르쳤는데 아직도 부족한 것 같아요. 여러분이 모임에서 실존주의자 얘기를 술술 꺼내는 정도는 돼야죠.


'군중은 거짓이다'


도저히 소통이 불가능하다는 그릇된 믿음이 만연한 시대에, 여러분, 질문을 주저하는 일 없이 마음의 빗장을 여세요. 멋진 34년이었습니다. 서로 타인이 되지 맙시다. 서로에게 배운 것들을 모른 척하지 맙시다. 그게 더 중요하죠. 여러분의 전성기는 오늘부터 에요. 우리 모두 그러길 빕니다."


강의실에서의 장광설은 모든 이야기의 주제 정리를 시도한다. 이런 웅변적인 대단원의 막 이후 월터 교수는 어이없는 폭력으로 인해 식물인간이 되어버린다. 삶의 의미, 철학, 20세기를 상징하는 인물인 월터 교수는 'Anesthesia'의 상태에 빠졌다. 이런 시대에서 그는 다시 깨어날 것인가?


그는 의식을 잃기 전 다음과 같은 몽테뉴의 말을 남긴다.

"양배추를 심고 있을 때 죽음이 날 찾아오길 바란다. 죽음에 무심한 채, 아직 할 일이 남아있을 때."

삶을 받아들이듯이 죽음 역시 받아들이는 그의 자세는 갑작스러운 변고 앞에서도 굳건하다.     


그의 상태를 담담히 받아들이는 그의 아내는 그가 적어도 어떤 고통도 느끼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고 화면이 검게 페이드 아웃되면서 마침내 영화는 끝난다. 필연적으로 고통이 동반하는 '삶'에 어떤 자세를 취하느냐는 우리의 몫으로 남긴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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