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농부아내 Dec 13. 2024

얄미운 그분을 생각하며, 김장배추



속상하고 섭섭한 이 마음을 어떻게 풀지?

살다 보면 속상한 일도 많이 생긴다. 사소한 말 한마디에서부터 조심성 없는 행동 등 다양한 이유로 속상함을 느낄 수 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날 때는 화가 났다고 표현하고, 화를 삭이고 감정을 정리하다 보면 속상하고 섭섭한 마음이 든다. 머릿속이 꽃밭이 아닌 이상에야 살다 보면 누구나 한번 이상 느끼게 되는 감정들이다.


귀농 전, 그분은 회사일로 바빠 아이들이나 나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적었다. 귀농 후, 하루 중 많은 시간을 그분과 함께 보내게 되었다. 서로가 서로를 다루는 기술이 거의 없다시피 한 상태여서 귀농 초반에는 트러블이 많았다. 불만과 속상한 마음을 바로 얘기했고, 농사가 시작되고 일이 많아진 그분은 나의 불만사항을 잊어버렸다. 그런 반응에 마음은 더 타들어갔고 결국 그분은 잊어버리지 않도록 칠판에 불만사항을 적어 달라고 했다.


칠판에 나의 요구사항들이 주르륵 적혔다. 물건 쓰고 나면 제자리에 두기, 서랍장 끝까지 닫기, 치약은 끝부터 짜서 쓰기 등 알고 보면 사소한 것들이었다. 귀농 후 하루의 대부분을 함께 하니 사소한 것들이 서로 맞지 않아 불만이 쌓인 것이었다. 칠판에 적힌 불만들이 다시 내 마음에 쌓이는 데는 며칠 걸리지 않았다. 적힐 때야 신경 써서 지켜주었지만 시간이 흐르면 제자리로 돌아갔다. 농사를 함께 지으며, 웃고 우는 세월이 길어질수록 서로에게 익숙해졌다. 불만들은 익숙함으로 대체되었다. 일상에서 느끼는 익숙함과 태도에서 오는 섭섭한 마음은 다른 것이었다. 이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하나.



묵언수행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어쩌고..... 의 상태까지 갈 것도 없다. 말해 봤자 내 입만 아프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나에게는 새로운 스킬이 생겼다. 바로 묵언수행이다. 이쁘고 고운 말로 포장해 말을 하든, 속상한 마음 그대로 다 드러내 말을 하든 튕겨져 나오는 말들이 허공에서 흩어지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묵언수행의 기간은 길어졌다. 묵언수행은 분기별로 찾아오는 것도 아니었다. 아무 때고 시작된 묵언수행은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2주까지 할 때도 있었다. 특히 원가족(결혼 전 가족)과 관련된 일에는 어김없이 발동이 되었다. 이번 김장시즌에도 그랬다.


배추 배달을 다녀온 날, 뻔히 내가 싫어할 것을 알면서도 그분의 어머니가 챙겨 주신 것을 빠짐없이 받아왔다. 장을 본 지 며칠 지나지 않았던 터라 냉장고가 가득 차 있었는데 가져온 것을 어찌해야 하나. 둘째가 교정을 하고 있어 마이쮸는 먹지도 못하는데 두 봉지나 보냈다. 추워지는데 대봉을 꽝꽝 얼려서 보냈다. 먹고 싶지 않은 것을 먹어야 하고, 먹이고 싶지 않은 것을 먹여야 했다. 나는 솔로몬이 아니다. 마음의 여유도 없다. 속상하고 섭섭한 마음만 가득 찼다. 묵언수행 스타트~


얄미운 그분을 생각하며 발로 차~ 김장배추

김장을 하기 위해 잘 자란 녀석들은 잡아먹고, 부족한 아이들은 더 자랄 수 있도록 밭에 그대로 두었었다. 된서리가 내리기 시작해서 텃밭 김장배추를 정리했다. 올해는 텃밭에 조금, 비닐하우스 안에 많이 심었다. 노지 텃밭 배추는 날씨가 추워지니 벌레가 속까지 파먹지는 않았는데, 비닐하우스가 따뜻해서 그런지 벌레가 많이 먹어 갈아엎기로 했다. 내년 1월 말쯤 밤호박을 심기 위해 밭을 갈 때까지 그대로 두면 배추가 너무 살아있어 땅을 여러 번 갈아야 한다. 그래서 이 녀석들을 전부 뽑아 말려야 했다. 손으로 뽑기엔 체력적 한계가 있어 발로 차서 넘어뜨렸다.





얄미운 그분을 떠올리며 있는 힘껏 발로 찼다.


아~ 속 시원해~


뿌리가 뽑히며 픽픽 쓰러지는 김장배추를 보고 있자니 내가 발 힘 조절을 못한 건가, 그분이 너무 얄미운 건가 헷갈린다. 배추를 뽑아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가녀린 아녀자의 발길질에 이렇게 쉽게 뽑힐 배추가 아니다. 김장이 끝나고 물을 주지 않아 뿌리가 일부 말라 쉽게 넘어간 것이다. 절대 묵언수행으로 쌓은 내공을 발에 실어 뽑힌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치자.


긴 하우스 끝까지 발차기를 끝내니 속이 다 후련하다. 언제 다 뽑냐고 걱정했던 것이 무색할 만큼 순식간에 끝났다. 그분 덕분에 일이 빨리 끝났고, 그분 덕분에 답답했던 마음이 후련해졌다. 어쩌면 모든 일의 원인과 과정, 결과 속엔 그분이 계실지도....?



x 이 글을 읽는 동안 "그분"은 어떤 인물이 특정 지어지기 때문에 호칭을 생략했습니다. 생각하시는 "그분"이 맞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