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 말에 귀농을 하고, 내 생애 처음으로 흙에 씨를 뿌려봤던 2017년. 그 영광을 함께 했던 월동시금치. 마당 한 켠의 사과나무 아래, 작은 공간을 마련해 월동시금치 씨앗을 뿌리고, 눈으로 덮여도 살아남은 생명력을 신기해 하며 2018년 초봄에 수확을 했었다. 처음으로 내 손으로 직접 작물을 키워내고, 수확해 맛본 월동시금치는 정말 꿀맛이었다. 봄과 가을에도 시금치 씨앗을 파종했고, 초봄의 그 맛을 기대하며 수확을 했으나 뭔가 2% 부족했다. 역시 추운 겨울을 이겨낸 시금치의 맛이 진리인가.
달큰했던 그 맛을 잊지 못해 매년 텃밭에 월동시금치를 파종했다. 눈이 아직 오진 않았지만 된서리를 맞아가며 자란 월동시금치를 지난 12월 초에 솎음수확을 했다. 텃밭에 바짝 엎드려 자라고 있는 월동시금치를 보고 있으니 입안에 군침이 돈다. 뿌리 쪽으로 칼을 찔러 넣어 수확한 월동시금치의 핑크빛 뿌리를 보니 역시나 배신하지 않는 맛을 내게 선물해 주리라는 믿음이 생긴다. 핑크빛 뿌리의 달큰함은 추운 겨울이라는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결과였다.
철저하게 계획을 세우고 귀농을 하더라도 많은 변수들이 생겨 여러 개의 허들을 지나야 한다. 2~3개월 안에 구할 수 있을 것 같았던 집과 땅은 외지인이라는 이유로 정보자체가 차단되기도 한다. 한적하고 조용한 슬로우 라이프를 살 것만 같던 시골생활은 그동안 겪어보지 못한 여러가지 일들로 판타스틱한 하루하루를 보낼 때도 있다.
오래된 농가주택에서 사계절을 살아봐야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여름에 스콜처럼 폭우가 내리면 마당이 물에 잠겼다. 오래 전에 지어진 주택이라 마당의 물 빠지는 구멍이 작았다. 구멍에 쌓이는 흙과 돌멩이, 낙엽들을 치워야했다. 일기예보에 많은 비가 예상되면 비 오기 전에 마당을 쓸어줘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폭설이 내리는 겨울에는 고립이 되기도 했다. 미리 냉장고를 가득 채워야 했었다. 계절이 주는 고난을 이겨내고 지금은 마당에서 고기도 구워먹고, 한여름에는 집터파크를, 겨울에는 눈놀이를 실컷 할 수 있는 소소한 행복이라는 달큰함을 느낀다.
귀농 첫 해, 처음으로 밤호박을 심었을 때는 모르는 것 투성이었다. 귀농 당시 해남의 멘토링 시스템 덕분에 선도농가에서 밤호박 재배에 대해 배울 수 있었다. 어르신에게 가르침은 받았으나 헷갈렸다. 곁순제거를 할 때 생장점이 자라는 줄기를 싹뚝 끊어버린 것이었다. 다행히 초반에 발견해 밤호박을 제대로 키울 수 있었다. 실수라면 실수요, 고난이라면 고난이라고도 할 수 있는 상황들을 겪고, 지금은 MSG 좀 쳐서 눈 감고도 곁순제거는 할 수 있다.
전투적 생계형 농부에게 귀농의 역경을 이겨내는 것은 삶과 직결된 것이지만 추운 겨울을 이겨낸 월동시금치의 달큰함만큼이나 성취감의 짜릿함도 있다. 무엇보다 허들을 여러개 지나다보면 작물에 대한 두려움도 많이 줄고, 어엿한 농부라는 직함을 내밀 수 있게 된다. 역시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면 어떤 형태로든 결과가 남게 된다. 최강한파의 겨울이라는 고난허들을 넘기 위해 오늘도 달린다.
귀농 8년차이지만, 여전히 넘어야 할 허들이 남았다는 게 함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