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적 농부아내 시점
여보, 내일 밭 좀 갈아요~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어~
햇살이 따사롭고 봄 날씨가 느껴져 농사 준비를 서둘러야 할 것 같아 말을 건네면 돌아오는 말이다. 마음속에서 온갖 말들이 턱 밑까지 올라오지만 다시 밀어 넣는다. 귀농 9년차, 그런 말들을 쏟아내 봤자 밭이 갈리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귀농 전에는 각자의 직장에서 일을 하다 보니 일하는 스타일을 알 수도 없었고, 장시간을 함께 보낸 적이 없어 귀농 초반에는 많이 삐걱거렸다. 함께 땅을 일구다 보니 연애할 때와 신혼생활, 육아와는 또 다른 부딪힘을 만드는 것이 일하는 방식이었다. 농부님은 쉬어가면서 일하는 베짱이 스타일이었고, 나는 일이 끝나야 쉬는 개미 스타일이었다. 쉬라고 농부님이 아이들을 봐주고 집안일을 도와줘도 쉬는 방법을 모르는 게 나였다. 이렇게 일하는 방식이 다르니 서로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는 일이 많았다. 사실 처음 농부님의 일하는 방식을 봤을 때, '쟤는 왜 저럴까?' 머리 위로 물음표가 자동생성 되었다.
밤호박은 후숙을 해야 하는 작물이다. 수확 후 꼭지를 다듬고 브러시 기계에 먼지를 털고 2주 정도 후숙기간을 가진다. 수확은 농부님 몫이다. 수확해서 수레에 담아 후숙하우스로 가져오면 내가 손질을 하고 다듬는다. 귀농 초반에는 손질도 둘이서 함께 했다. 손에 밤호박을 들고 손질을 하니 팔목이 아프다. 팔목이 아프던 허리가 아프던 어찌 되든 빨리 손질을 끝내고 싶어서 일부터 시작하는 반면, 농부님은 최적의 조건을 찾아 되도록 덜 아프게 세팅을 한 뒤에야 작업을 시작한다. 물론 마음의 준비도 해야 한다. 의자에 호박을 올려놓고 하면 손목이 덜 아프다, 쪼그리(작업 방석)에 앉지 말고 의자에 앉아서 해라~ 등 몸 생각하지 않고 일만 하는 나를 나무란다. 듣는 척하다가 기껏 신경 써 준 보람도 없이 원래 내 방식대로 돌아가니 결국 수확은 농부님이, 손질은 내가 하는 것이 편해 암묵적으로 일을 나눠서 하게 되었다.
그렇게 밤호박을 수확해서 나르던 농부님이 보이지가 않는다. 벌써 수확이 끝났나. 허리도 펼 겸 농부님을 찾으러 가보니 농장 곳곳에 마련해 둔 게임기 앞에 앉아 있다. 쉬는 시간이란다. 언제부터 쉬는 시간이었을까. 궁금해진다. 밤호박의 수확이란 것이 익어가는 녀석들부터 순차적으로 수확한다. 그래서 한 번에 많은 양을 오랜 시간 작업하는 것이 아니다. 그날의 수확량만큼 일을 끝내고 쉬면 좋을 텐데 게임기 앞에 앉아 있는 농부님을 보자니 저절로 가자미 눈이 된다. 금방 일어나서 다시 일하러 가는 걸 봤지만 마음에 들진 않는다. 농부님의 시점에서 나를 바라보는 것도 시선이 좋은 편은 아닐 것 같다. 할 일이 많아 장기전인데 오늘만 사는 것처럼 미친 듯이 일만 하는 걸 보면 농부님의 머리 위에도 물음표가 여러 개 생성되지 않았을까. 일을 다 끝내야 마음 편히 발 뻗고 잘 수 있는데 어쩌겠는가.
그런데 희한하게도 쉬어가면서 일해도 전체적인 일의 흐름에 지장이 없다. 어느 순간 보면 농부님이 해야 할 일이 모두 끝나 있다. 세상 신기하다. 그렇다 보니 각자 해야 할 일을 나눠서 하고 터치하지 않게 되었다. 잔소리하지 않아도 맡은 바 일만 제시간에 해내면 되니 잔소리도, 부딪힘도 줄어들었다.
부부가 함께 일한다는 것은 많은 배려와 인내심이 필요하다. 처음부터 손발이 맞으면 좋겠지만 그러기란 쉽지 않다. 초반에 삐걱거리고 부딪히다가 그 순간들을 넘기면 서로에게 익숙해지고 다루는 방법을 터득하게 된다. 무엇보다 농사일이 힘들기 때문에 고생하는 모습을 보면 미운 말은 쉽게 나오지가 않는다. 귀농 9년차, 그동안 다투고 서운한 일도 많고, 내려놓고 싶은 순간도 있었다. 같은 공간에서 함께 있고 싶지 않을 만큼 미울 때도 많지만 그동안 미운 정 고운 정 여러 겹의 마음이 쌓여 다가올 시간들도 헤쳐나갈 수 있길 바래 본다.
우리 그동안 잘해 왔자녀, 남은 날들도 잘해보자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