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러려고 귀농했나..

전지적 농부아내 시점

by 농부아내


핸드폰이 울린다. 농부님이 방으로 들어가 한참 통화를 하고 나온다.


아내 : 또 나가? 나가야 돼?

농부 : 응~ 갔다 올게.


귀농 후 우연한 계기로 시작하게 된 것이 밤호박 조합의 사무장 일이다. 가정경제에 큰 도움은 되지 못하지만 무연고지인 해남에서 발을 넓히는데 일등공신이었다. 그 이후 이리저리 불려 다니는 일이 더 많아진 농부님. 그러면 소는 누가 키우냐는 걱정에 본격적으로 농부아내가 농사일에 참여한 것이 2019년쯤이다.



농번기, 그나마 덜 바쁜 농부

밤호박 조합의 사무장이 하는 일 중 하나가 종자와 박스 주문을 받아 공장에 오더를 넣고 제품이 도착하면 회원 농가들에게 배포하는 일이다. 12월부터 주문을 받고 취합해 1월부터 2월까지 종자배포를 한다. 날짜를 정하고 종자 받으러 오세요~라고 알려도, 어르신들이 대부분이라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 어르신들 편한 시간에 사무실로 찾아오시다 보니 우리 농장일을 하려고 하면 전화가 와서 나가야 했다. 적당한 시스템을 농부님이 만들긴 했지만 어디에나 블랙리스트는 존재한다. 더구나 일 년 농사로 생활하는 농가도 많기에 울리는 전화를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곁순 제거 작업이 시작되는 밤호박 농가의 농번기인 4,5월쯤 되면 그나마 우리 집 농부님은 덜 바쁘다. 요령이 없던 시절에는 혼자서 하우스 세 동의 곁순 제거 작업은 버거웠기에 농부님의 손이 필요했다. 사무장 모드일 때도 틈틈이 농장 일을 하긴 했지만 이때만큼은 전업농으로 열농만 하면 되니 그나마 덜 바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다. 밤호박 판매가 빠르면 5월, 늦어도 6월에는 시작되기 때문에 이제 포장박스를 배포할 차례다. 수시로 울리는 핸드폰 소리와 함께 사무실과 집을 오가다 보면 어느새 하루가 저문다. 그나마 덜 바빴던 농부님의 반짝 농번기도 그렇게 지나가고 우리 농장도 밤호박 판매가 시작된다.


전지적 농부아내 시점

귀농 초반에는 이리저리 불려 다니며 밖에서 뭘 하고 돌아다니는지 집에 오면 녹초가 되는 농부님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미숙한 농사일을 익히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기에 농장이 아닌 집 밖에서 시간을 보내고 오는 농부님을 이해할 수 없었다. 혼자서 고온의 하우스에서 일하고 있으면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들이 주르륵 흐를 때도 있었다.


내가 이러려고 귀농했나…


새벽부터 하우스에 출근해 고온의 하우스에서 아픈 허리를 부여잡고 일하다 보면 짐 싸서 도망가고 싶은 날들도 많았다. 농알못의 상태에서 귀농을 선택했기에 이런 삶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아이들이 어릴 때 귀농을 선택해서 나는 아이들 케어와 집안일에 신경 쓰고 농사는 농부님이 알아서 하리라 생각했다. 내가 그렸던 귀농은 그러했다. 하지만 시골에서 무연고지라는 것은 집을 구하는 것부터 쉽지가 않았다. 농사일은 해 본 적도 없어서 많은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보와 인맥이었기에 누군가는 밖으로 다니며 발을 넓혀 나가야 했다.


사무장으로서 어르신들에게 밤호박 농사 비법들을 배우고, 인맥을 차근차근 넓혀 나가 빛을 발하는 건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다. 귀농 9년차. 농부님의 시간들이 빛을 발하면서 가공 사업에도 도전할 수 있게 되었고 밤호박 농사도 아직까지는 순항 중이다. 귀농 초에는 이해할 수 없던 농부님의 어깨에 놓인 많은 짐들의 이유가 이제는 눈에 보인다. 수시로 울리는 농부님의 핸드폰이 밉지가 않다.


아침을 먹으며 오늘 하루 일정이 어떻게 되는지 공유한다. 농부님의 일정을 듣고 있으니 오늘 하루도 바쁘고 정신없음을 예고하는 것 같다.


아내 : 내가 도와줄 건 없어?

농부 : 찾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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