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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농부아내 Dec 03. 2024

너도 기미가 있구나, 알배추



김장을 하기 위해 텃밭에서 배추를 뽑고 덜 자란 배추는 그대로 두었다. 기온이 떨어져 코 끝이 찡해지니 겨울이 온 것 같지만 해남은 아직 날씨가 한겨울에 있지는 않아서 배추밭 정리를 하지 않았다. 겨울과 함께 찾아온 게으름을 핑계로 텃밭에 배추 몇 포기가 남아 있으니 저녁거리로 배추전을 만들기로 했다.


남겨 둔 배추들이 사이즈가 작긴 해도 며칠 사이 단단하게 결구가 되어 있었다. 칼로 밑동을 싹둑 잘라 겉잎은 뜯어내고 알배추로 만들었다. 깨끗한 겉잎은 우거지를 만들어 먹으면 맛나다. 이미 김장용으로 수확한 배추로 우거지를 만들어 냉동실에 쟁여 두었다. 그래서 오늘 뽑은 배추 겉잎은 흙으로 돌려보낸다.





요녀석, 작아도 실하게 잘 컸네~

작은 알배추 하나로 뭘 만들어 먹을까 고민할 것도 없다. 연둣빛 도는 중간잎들은 국거리나 반찬을 만들고 노란 속잎들은 배추전이나 쌈으로 먹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입에 침이 고인다. 뭐니 뭐니 해도 봄배추보단 가을배추가 달큰하니 덜 자랐다고 뽑아서 버릴 게 아니다.


집으로 가져와 용도에 맞게 한 장씩 뜯으며 분리를 시작했다. 속을 들여다보니 배춧잎에 까만 점들이 콕콕 박혀 있다.





깨씨무늬다.

배추를 키울 때 질소 비료의 불균형으로 생기는 점들이다. 외관상 보기에 께름칙할 뿐 건강에는 해롭지 않기 때문에 적당한 까만 점들은 먹어도 상관없다. 한 장씩 뜯으며 가끔씩 보이는 까만 점들을 보고 있자니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있다.


기미다.

귀농 후 짙어진 눈 밑 기미를 보는 것 같다. 귀농을 할 당시에는 30대 후반의 나이였지만 청춘이라 여겼다. 한낮의 땡볕 아래 일할 때도, 이글거리는 햇빛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하우스에 들어갈 때도 민낯이었다. 농사일을 시작할 때는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장갑, 장화, 모자, 마스크까지 챙긴다. 장시간 일하는 동안 지루함을 이겨 낼 이어폰도 필수템이다.


어휴~ 챙길 것이 이리도 많으니 선크림 하나쯤은 빼먹어도 괜찮겠지? 선크림을 선물로 받긴 했지만 장식품이 되었고, 챙이 넓은 작업 모자가 햇빛을 충분히 가려 주리라 생각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햇빛을 무시했던 결과는 처참했다. 깨씨무늬는 질소 비료가 많거나 적어도 생길 수 있는 증상이지만, 눈 밑 기미는 햇빛이 과해서 생기는 증상이었다.


배추에 생긴 까만 점들의 수가 적은 상태로 밀봉해 냉장고에 두었더니 증식했다. 빠른 소비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눈 밑의 기미를 하나 둘 발견했을 때부터 선크림을 바르기 시작했지만, 이미 생긴 기미는 증식보단 존재감을 드러내기로 했나 보다. 짙어졌다. 눈만 드러내고 온몸을 꽁꽁 싸맨 채 일하는 마을 어르신들을 보면 답답해 보였는데 짙어진 기미를 보니 이제는 알겠다. 깨씨무늬를 만나지 않으려면 적절히 비료를 써야 하듯, 기미가 고개를 내밀기 전에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꽁꽁 싸매고 선크림을 바르는 수밖에...


하지만, 나는 오늘도 생얼로 텃밭을 둘러보고, 하우스로 출근하겠지. 이번 생은 망했으니 다음 생엔 만나지 말자, 기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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