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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윽고 슬픈 독서가 Apr 20. 2016

『스포츠와 여가』X『포르토벨로의 마녀』

어크로스 더 유니북스


메모는 쓰일 때에는 아무런 가치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메모가 온전히 메모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은 단 한 순간. 메모가 어딘가에 붙여졌을 때다. 전혀 상관없는 메모라 하더라도 메모가 어떤 물건이나 장소, 혹은 사람에게 붙으면 그것의 고유한 속성은 사라진 채 메모는 사전이라도 되는 듯 그것을 정의한다. 기억도 이와 다르지 않다. 한 사람이 몸으로 부딪힌 체험이나 기억은 한 장의 메모에 적힌 문장을 앞서지 못한다. 그만큼 메모는 가장 현실적인 곳에 붙여지는 가장 불확실한 상상의 산물이다.


“이 글은 오툉에서 찍은 사진들에 부친 메모다.”

P.21


제임스 설터 작가의 세 번째 장편소설 <스포츠와 여가>는 주인공인 화자가 필립 딘의 행적을 바라보며 남긴 메모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주인공이 지켜보는 남자 필립 딘은 수재에 매력적인 외모, 자유로운 정신을 가진 청년이다. 주인공은 필립 딘과의 첫 만남에서부터 질투와 동경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감정은 고스란히 필립 딘과 그의 연인이 되는 관능적인 젊은 처녀 안마리와의 관계로 향한다. 필립 딘은 안마리와의 만남을 통해 선로를 벗어난 자유로운 사랑의 행각과 욕정을 해소하지만 이탈된 선로의 거리만큼 불안감이 커지며 잘 닦여진 아스팔트 길을 그리워하게 된다.


“나는 추적자다. 이 말의 요점은, 내가 딘이 모르는 것도 안다는 것이다.”

P.76


주인공은 필립 딘이 지나간 길에 한 장씩 메모를 붙인다. 그런데 그것이 모두 진실인지, 정말로 필립 딘이 행한 행동들에 대한 메모인지는 알 수 없다. 여기까지만 보면 주인공은 자신이 원하는 이야기 속으로 필립 딘을 안내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주인공은 말한다. 자신은 필립 딘이 어떤 행동을 했는지 상상으로 남길 수는 있어도 예측하지는 못한다고. 삶의 주민은 딘이고 자신은 삶의 하인에 불과하다고. 이것이 작가가 말하는 메모의 정의이다. 과거의 행적, 기차가 지나가는 선로의 뒤를 정의할 수는 있어도 결코 기차가 앞으로 나아갈 선로를 미리 설계하지는 못한다는 것. 이것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메모의 정의이고 주인공이 메모를 남기는 이유이다.


“깨끗하게 씻은 그녀의 알몸을 보자 그는 더더욱 겁에 질린다.”

p.224


주인공이 남기는 메모는 필립 딘을 향한 감정과 같이 동경과 두려움으로 가득하다. 동경의 편에는 길을 만들어 달리는 필립 딘의 1952년형 들라주가 있고, 두려움의 편에는 들라주에서 내려 안마리와 캄캄한 방에 들어가 정사를 나누는 필립 딘이 있다. 주인공은 필립 딘이 사랑에 성공하는 것을, 그래서 잘 닦여진 아스팔트 도로를 달리게 될 지루한 들라주를 두려워 한다. 그것은 딘 역시 마찬가지다. 코스 요리로 배를 불리고 안락한 침대에 몸을 눕히는 일상의 안락함은 그에게 있어 곡예와도 같다. 하지만 이것이 딘의 진정한 속마음일지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딘은 코스 요리를 먹었고, 안락한 침대에 누웠을 뿐, 그 뒤의 해석과 메모는 주인공이 남긴 것이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오직 내게만 의미 있는 것이지만 더는 감추지 않으련다. 그 시간은 과거가 되었으므로”

P.21


주인공은 필립 딘에게서 무엇을 기대했을까? 딘이 그의 매력을 지켜볼 수 있도록 오랫동안 알몸으로 남아있길 원했을까? 아니면 그의 알몸이 캄캄한 방에 머물러 있길 원했을까? 이 질문에 답은 확인할 길이 없다. 왜냐하면, 주인공은 언제나 딘의 행동 뒤에 메모를 붙였기 때문이다. 그가 붙인 메모는 그 자신과 메모를 보는 우리에게 영향을 미칠 수는 있지만, 필립 딘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수없이 많은 메모를 뒤져봐도 그 정답을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다만 그의 메모 뒤에 한 장의 메모를 덧붙일 수 있다면 이 정도는 붙일 수 있을 것 같다. “메모를 남길 때 주인공의 행동은 한없이 역동적이었으며 그의 표정은 한없이 평안해 보였다.” 라고.


다시 이 소설의 첫 장을 열어보자 이런 문장이 보인다. “현세의 삶이란 한낱 스포츠와 여가일 뿐임을 기억하라.”

이 문장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삶은 같은 듯 같지 않은 두 가지 갈림길 사이에 서게 되는 일종의 도박이다. 이 명제의 폭발로 생겨난 우주, 그곳에 자리 잡은 작품 중에는 유독 관찰자의 시선이 많은데 파울로 코엘료 작가의 <포르토벨로의 마녀>도 그렇다. 이 작품에서는 ‘아테나’라는 이름의 주인공을 바라보는 다양한 화자들의 목소리가 나온다. 그들은 그녀의 매력과 자유를 향해가는 그녀의 삶을 동경한다. 그리고 제각기 그녀의 삶이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에 대해 배팅(이 소설에 빗대면 ‘메모'라 말해야겠다)을 한다.


이렇듯 삶의 길에서 관찰자의 목소리가 많은 것. 그 이유는 어쩌면 간단히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스포츠의 승패를 일시적인 즐거움 혹은 아쉬움으로 남기려면 직접 뛰어선 안 되기 때문이다. 그저 관람을 통해 평안한 오후 한때를 즐겨야 하기 때문이다.


Written by Dalmoon
1984romaingary@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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