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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윽고 슬픈 독서가 Apr 22. 2016

『완벽한 캘리포니아의 하루』X『제브데트 씨와 아이들』

어크로스 더 유니북스


목표 지점을 향해 한참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리다 보면 지저분한 흙먼지가 주변을 뿌옇게 만든다. 겨우 흙먼지를 가라앉히고 주위를 둘러보면 목표는 어느새 사라져버리고, 출발점 역시 너무나 멀어져 보이지 않는 경우가 있다. 자본과 발전을 목표로 달려온 현대 사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더 나은 삶(이것은 누구도 그 실체를 모르는 지향점이다)을 향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달려온 우리가 멈춰 선 곳에서는 돌아갈 안식의 숲도, 앞으로 나아갈 목표도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을 일찍이 깨닫고 글을 쓴 이가 있다. 바로 미국의 생태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리처드 브라우티건 이다. 리처드 브라우티건은 1967년 발표한 자신의 대표작 <미국의 송어낚시>를 통해 목가 소설의 대표주자가 된다. 그리고 그가 활동한 1950~60년대 미국 사회. 즉 물질 만능주의와 기계 사회 구축을 위해 달려가던 미국 사회에서 자연의 삶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이들의 우상이 된다. 

 

<완벽한 캘리포니아의 하루> 이 작품집 역시 리처드 브라우티건 작가가 전하는 목가적 삶의 메시지가 가득한 작품집이다. 이 작품집에는 총 62개의 단편 작품이 담겨 있다. 한 권의 작품집에 62편의 단편이니 책의 페이지가 2,000페이지는 되지 않을까 짐작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책은 221페이지에 불과한 비교적 적은 분량의 책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면 ‘초단편’이라는 대답이 나오게 된다. 실제로 이 작품집에 실린 작품들은 짧으면 2페이지, 길면 6페이지 정도에 불과한 짧은 이야기들이다.

 

작가는 이 작품집에서 자신의 조부모 시대인 제1차 세계대전 시절과 부모의 시대인 제2차 세계대전 시대, 그리고 자신의 시대인 물질만능주의 시대의 이야기를 순차적으로 풀어가고 있다. 이 작품집의 구성이 그러한 이유는 작가가 자신의 젊은 시절을 보냈던 1960년대 미국. 그러니까 목가적 삶은 온데간데없고 물질로 부품을 채운 자동차만 가득한 시대가 왜 만들어졌는지를 짚고 가기 위해서다. 실제로 이 작품집의 첫 작품인 <잔디밭의 복수>에서 물질사회를 대표하는 잭은 자연을 대표하는 벌의 공격을 받게 된다. 하지만 복수는 잭의 손에 32바늘의 상처만 주었을 뿐, 그 이상의 위협은 되지 못한다. 오히려 잭의 자동차 바퀴에 잔디밭은 짓밟히고 석유는 녹색을 지우기 시작한다. 

 

이렇듯 첫 작품에서 작가는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돌아보며 목가적 삶의 종말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작품들과 흐르는 시간 속에서 목가적 삶은 절대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녹음으로 가득했던 캘리포니아에는 수백만 대의 차들이 경쟁하듯 달려와 교통체증과 함께 숨 막히는 향기를 내뿜기 시작했고(<캘리포니아로 모여드는 사람> 中), 오래전에 시작된 자연의 노래는 미국의 먼지에 녹음되어 모든 것에 내려 앉았다(<태평양에서 불탄 라디오> 中). 그 덕에 물질만능주의를 살아가는 이들은 너무 많은 실탄을 들고 있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탄이 동날까 두려워 많은 실탄을 들고 다닐 수밖에 없게 되었다(<앨마이러> 中). 그런 사회에서 물질을 거부하는 작가와 같은 사람들은 너무 오래 죽어가다 보니 죽는 방법을 잊어버린 개처럼 살아갈 수 밖에 없다고(<겨울 양탄자> 中) 작가는 한탄스럽게 이야기한다.

 

결국,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작품이 넘어가면 넘어갈수록 물질 사회는 매캐한 매연을 빠르게 세상에, 그리고 사람들의 몸속에 퍼뜨리기 시작한다. 그것을 인정하기는커녕 인지하기도 전에 작가가 사랑한 숲과 나무는 베어지고, 시와 소설은 땔감으로 전락했으며 작가와 시대의 미래 역시 암 선고를 받은 이의 여생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 단편집은 말하고 있다. 그리고 단편집의 마지막 작품 <제1차 세계대전과 로스앤젤레스 비행기>에서 작가는 

나는 가장 덜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지인의 죽음을 알리려고 애를 썼지만, 죽음은 원래 말로는 덮을 수 없는 사건이다. 언제나 말의 마지막에 가서는 누군가가 죽는다. 라고 표현함으로써 작품집을 마무리한다. 이 말은 목가적 삶의 종말을 알린 조부모 시대부터, 현재까지의 시대를 살아온 작가가 말하는 마지막 대사다. 작가는 목가적 삶은 추억하고, 되새기고, 돌아가려 해봐도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아프게 인정하고, 자신의 길고 긴 이야기의 끝에 죽음을 선고한다. 다만 작가가 선고한 죽음의 원인은 작가가 제공한 것이 아니다. 이미 죽음은 작가가 손쓸 새도 없이 벌어진 현실이고, 작가는 그것을 말로 내뱉을 뿐인 것이다. 이 무력한 죽음의 선고를 내뱉으며 작가는 어떤 비참함을 목구멍에 넘겼을까? 작가의 기준으로 봤을 때 이미 죽은 사회를 살고 있는, 그래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잃어버린 우리가 질문의 답을 찾아낼 수는 없을 것이다.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목가적 꿈을 꿨지만, 현실의 알람시계가 잠을 깨워 불면에 시달린 리처드 브라우티건. 그처럼 ‘급변하는 시대 때문에 잠 깬 이들'을 매개체로 만들어진 우주에는 이런 소설도 있다. 바로 오르한 파묵 작가의 <제브데트 씨와 아들들>이다. 이 작품에서 인물들은 1905년부터 1970년까지 정치, 사회, 종교 등 급격히 변화한 터키 사회를 온몸에 새기며 앞으로 나아간다. 이 작품들의 인물들 역시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작품 속 인물들처럼 시대의 알람에 억지로 잠에서 깨 거리로 내몰리는데 그들의 몸짓과 선택을 보면서 하루에도 수십번 알람을 들으며 일어나야 하는 우리들은 어떤 선택을 하고 있는지 돌아보면 어떨까 싶다. 그 끝에 죽음의 선고가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Written by Dalmoon
1984romaingary@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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