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카드와 감정일기
지난달의 일이었다. 트위터에서 <살아있으니까 귀여워>의 조제 작가님을 팔로우하고 있던 중 감정일기를 만드셨단 이야기를 읽고 주문했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다가 이번 달 중순쯤 펼쳐 보았는데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친절하게 예시도 적혀 있는데 뭐가 어려운지 알 수 없었다.
사실 요즘은 글이 잘 써지지 않았다. 어딘가에서 막힌 느낌이었다. 일기장에 쓰던 이야기를 브런치에 옮겨 적곤 했는데 그마저도 힘이 들었다. 사실 일기장에 글도 꾸준히 쓰지 못했다. 처음 글을 쓸 때는 여러 가지 정리되지 않은 말들이 쏟아져 나와 서투르게나마 표현해내는 게 일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일기장에 글을 쓰는 일도 에너지가 소모되는 기분이 들었다. 한번 이야기가 쏟아지면 결국 결론은 나지 않고 싫은 일들만 잔뜩 풀어내다 끝이 나곤 했다.
그러던 중 어떤 모임의 워크숍에 가게 됐는데 어떤 분이 작은 게임을 준비해 오셨다. 감정 단어를 써서 문장을 만들어 보는 워크숍 마무리용 게임이었다. 그때 꽤나 많은 종류의 감정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게임에 어울릴만한 단어만 추려 왔다고 했는데도 수십 가지 감정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아, 이거구나.
감정 단어를 찾다 보니 나 같은 사람들을 위한 감정카드가 있단 것도 알게 됐다. 인터넷으로 이런저런 감정카드를 검색하다 보니 눈에 띄는 구매처가 있었다. 스트레스 컴퍼니의 감정카드였다. 다른 곳보다 다루는 감정의 종류도 많고, 다양한 색과 단순한 그림으로 표현되어 직관적이었다. 앞면은 단어로 뒷면은 감정이 대한 해설도 되어 있어 헷갈리는 부분도 명확하게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귀여운 게 가장 마음에 들었다.
이런저런 걸 더 구경하다 스티커도 사고 워크북도 샀다. 보다 보니 새로운 사실도 깨달았다. 내가 감정일기에서 막막했던 지점을 알게 된 거다. 나는 감정만 잘 모르던 게 아니라 내가 뭘 바라는 지도 구체화하기 어려워했구나. 감정과 욕구를 연결하는 워크북을 구경하다 보니 나는 욕구의 종류를 상상하는 것조차 몰랐던 걸 알게 됐다. 조금 더 빨리 알게 됐으면 혼자 끙끙대던 시간이 조금 나아졌을 텐데. 조금 아쉬워졌다.
배송이 오자마자 살랑살랑 설레는 마음이 들었다. 생각만큼 귀여운 것도 마음에 들었고 하나하나 내 마음에 대해 살펴보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특히 내가 표현하기 부끄럽거나 꺼려하는 마음조차도 귀여워서 좋았다. 그렇게 숨기고 싶어 하는 마음들마저 귀엽게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배송 온 김에 감정카드도 써 보고 감정일기도 써 보기로 했다. 내가 어제부터 계속 꽁해있던 문제로. 먼저 감정카드로 내게 어떤 감정이 맴돌고 있는지 들여다보기로 했다. 바닥에 카드를 모두 펼쳐 두고 내 마음에 어떤 마음이 있는지 골라보았다. 헷갈리거나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때면 뒷면의 설명도 읽어보고 구분하면서. 그렇게 몇 가지 감정을 추리기로 했다.
한 가지 일로 내 안에 이렇게 많은 감정들이 있었나 싶었다. 다른 사람이 내 이야기를 한걸 애인이 전달해준 상황이었는데 그게 내겐 기분이 안 좋았던 일이었다. 내가 없는 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한 사람에게는 화나고 짜증 나는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그게 나에게 불쾌한 일인데도 내 마음만큼 제대로 대처하지 않은 애인에게는 실망스럽고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그 자리에 없던 게 답답하고, 이런 이야기를 전해준 애인에게 미운 마음도 들었다. 그리고 이 일을 다음날까지 생각하고 있어서 괴로웠고, 이런 감정이 내 안에 맴도는 게 혼란스러웠다. 내 안의 여러 감정들이 명료해지기 시작했다.
그중 가장 큰 마음이었던 화를 두고 내 마음과 욕구를 연결해 보았다. 생각보다 많은 욕구들이 보였다. 내가 충족되고자 하는 건 나에 대한 존중이었고, 내 상처를 치유받고 싶었다.
감정카드와 워크북을 이용하다 보니 조금 더 쉽게 내 안을 들여다보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여러 마음들을 오랫동안 억누르거나 닫고 살아서 내 안에 무엇이 있는지조차 알기 어려운 일이 많았다. 그리고 단어를 알고 있는 것과 그걸 내 마음과 연결해보고 ‘내가 이런 마음이구나.’하고 찾아보는 건 다른 문제란 것도 배웠다. 오늘은 조금 더 쉽게 하는 방법을 찾았으니 이제 더 가벼운 마음으로 연습해볼 수 있겠다 싶었다.
다시 감정일기를 펼쳤다. 감정일기에는 여섯 가지 칸이 있는데 아직 원인이나 행위 선택과 같은 칸은 채우기가 어려웠다. 사실 무슨 이야기인지 잘 가늠이 되지 않는 부분도 있다. 내가 이런 감정을 가지게 된 원인을 찾아가는 방법도 어렵다. 예전에 일기를 쓰면서도 원인을 알 수 없이 넘어간 적도 많았으니. 행위 선택도 비슷하다. 내 소망이나 욕구를 실현하기 위해서, 그래서 방법이 있나? 나는 존중받고 싶은데, 저 사람은 다음번에도 나를 존중하지 않을 수 있잖아. 저 사람에게 존중받지 않아도 나 스스로 존중하고 치유하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다음 주에 상담을 가니까 상담 선생님께 다시 물어봐야지. 오늘은 내 감정을 명확하게 하고 내 욕구를 알게 된 걸로도 충분하다. 더 들여다보고, 좋은 도구도 찾고, 조언을 받다 보면 조금씩 더 내가 편안해질 수 있을 거란 희망을 가지게 된다. 그걸로도 충분한 하루가 되어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