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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도 Oct 20. 2019

조건은 당연히 중요해

남편은 종종 이런 질문을 한다. “내가 ㅇㅇ하지 않았어도 나랑 결혼했을 거야?”(구체적인 내용은 그의 개인정보니 접어두자.) 그러면 나는 웃으며 대답한다. “아니! 나는 그 부분도 중요해서 아예 처음부터 사귈 생각조차 안 했을걸?” 그는 조금 난감한 얼굴로 그게 정답이 아니었단 표정을 하곤 한다. 그래서 짐짓 울상인 얼굴을 하고 소리친다. “그게 뭐야! 다 내 조건보고 만났네!!”


나는 이런 대화를 할 때마다 사실은 좀 당황스럽다. 그래서 위로를 해준답시고 덧붙인다.  “그니까 자신을 가져.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기가 얼마나 힘들어. 그런 이것저것이 다 맞았으니까 내가 그나마 결혼할 생각이 든 거야. 난 사랑만으론 부족해.” 그러면 남편은 세상 결백한 얼굴로 뻔뻔하게 대답한다. “난 정말 사랑만으로 결혼했는데?” 그런 그를 바라보며 내가 호들갑을 떤다. “헐!! 대박!! 그랬단 말이야? 쫌 늦은 거 같지만 지금이라도 하나하나 다 따져봐!!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 홀라당 속여먹으면 어떡하려고!!”




말만 이렇게 했지, 사실 남편도 따질 거 다 따져서 나랑 결혼하지 않았을까. 그래도 그냥 기분 좋으라고 ‘너 하나만 보고 결혼했어.’라고 서로에게 주문 외듯 하고 싶은 걸까. 나는 어느 정도 진심이 섞이지 않은 말을 부러 하긴 어렵던데. 네가 세상에서 제일 귀엽고 잘생겼고 사랑스럽다고 이야기하는 것도 ‘내가 보기에’ 그렇다는 거거든. 그래도 볼 때마다 점점 더 팔불출이 되어가고 있으니 정말로 그렇다고 믿을 날이 오겠지.


그런데 내게 결혼은 그렇게 퉁치고 넘어갈 게 아니었다. 성인 두 사람이 경제 공동체 및 삶의 공동체가 되는 일인데. 사랑한단 말로 어물쩍 넘어가는 일은 연애만으로도 충분해. 나는 다 따졌어. 너의 외모나, 흡연이나 음주 여부, 직업, 너의 본가에서 제사를 지내는지, 가족과의 독립성을 갖고 있는 인간인지, 주변 사람과 어떤 방법으로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있는지, 취미는 뭐고 돈은 어떻게 쓰는지. 그런 기본적인 것들은 당연히 다 봤다. 그리고 네가 생각하지도 못한 세세한 부분까지도 다 봤다.


식습관조차도 중요한 문제였다. 음식을 먹을 때 쩝쩝거리지는 않는지, 같이 먹는 다른 사람들을 배려할 줄 아는지, 나와 음식 취향이 어디까지 같은지, 취향이 다를 때는 어떻게 조율할 줄 아는지, 음식을 먹는 그 모든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수고스러움을 어디까지 이해하는지, 음식을 대하는 위생 감각이 어느 정도인지. 너는 그 모든 과정에서 배려와 예의가 있는 사람이었다. 나와 함께 살면 최소한 우리의 삶에 먹는 걸로 싸우진 않을 거 같았어. 그리고 우리가 먹고 즐기는 모든 시간이 즐거울 수 있을 거랑 생각이 들었지. 나는 너의 그런 면이 참 좋았다.


또는 나의 감정의 흐름에 네가 어떤 방법으로 반응하는지도 중요한 문제였다. 나는 종종 조절이 어렵기도 하고 그럴 때 적절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기도 하니까. 내가 강렬한 감정을 느낄 때마다, 감정의 갈피를 잡기 어려운 순간에도 휩쓸리지 않는 사람이어야 나와 오래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내가 벅차지만, 너는 나를 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진 점이 좋았다. 너를 보며 나를 보살피는 방법을 배우고 너를 돌보는 방법을 배우는 것도 좋았다.




의심이 많고 실패하기를 두려워하며 면봉 하나를 사도 후기를 꼼꼼하게 읽어봐야 구매하는 나에게 결혼은 도박이었다. 그런 내가 이런저런 면들을 다 고려하고도 너와 결혼하는 게 좋은 선택이었다 생각하는 것도 좋은 일이 아닐까. 너와 함께 살다가 결혼 전엔 눈치채지 못했던 부분을 발견해서 즐거우면 더 좋겠고. 너는 여전히 더 알고 싶은 사람이고 알게 될수록 따뜻하고 즐겁고 다정한 사람이다. 너를 다 알고도 앞으로도 우리의 결혼 생활이 즐거웠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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