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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도 Dec 01. 2019

김치 냉장고를 샀다

신혼집에 들어갈 이런저런 가전을 사면서 우리 부부는 김치냉장고를 사지 않기로 했다. 우리 둘 다 집에 있는 시간이 적고 밥을 해 먹는 건 일주일 행사 같은 느낌이어서 먹을 만큼만 사 먹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가에서는 왜 김치냉장고를 안 사냐고, 그럼 대체 뭘 먹고 살 거냐고 성화였다. 너무 한국인스러운 질문에 당황스러웠지만 우리는 입주한 아파트 김치냉장고 칸에 홈카페 공간을 만들었다. 차와 간식을 좋아하는 나와 집을 예쁘게 꾸미고 싶은 남편의 욕망이 합쳐진 결과물이었다. 지금도 우리가 가장 뿌듯하게 생각하는 공간이라 만족스럽다.




그러나 이런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우리가 살림을 합친 걸 알게 된 양가에서 우릴 가만 두지 않았다. 우리 엄마는 온갖 한약들을 쏟아부었고 시할머니의 끊임없는 반찬 공세도 만만치 않았다. 일방적 사랑이자 부담이자 압력이었다. 우리 부부 둘 중 누구도 이런 상황을 바라지 않았다. 사실 양가 어른들의 사랑은 내가 느끼기엔 폭력에 가까울 때가 많다. 왜 어른들은 우리 부부의 성향과 취향과 삶과는 전혀 관계없이 본인들이 하고 싶고 주고 싶은 대로 얹어놓고 그걸 사랑과 관심이라고 부를까? 당사자들에겐 짐인데.


우리 부부 둘 다 한약을 먹지 않는다. 나는 엄마가 주는 한약이 내 몸에 맞지 않는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부대껴서 직장생활까지 무리가 갈 정도다. 아빠는 그런 내 반응을 보고 명현현상이라며 기뻐했다. 본인들은 몸의 변화를 못 느끼는 건데 나는 반응이 있다나. 부작용도 반응이라면 그런 거겠지. 남편은 한약, 양약 둘 다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둘 다 안 먹는데도 철마다 안겨주지 못해 안달이다.


우리 부부는 집에서 밥을 거의 먹지 않는다. 아침은 안 먹고, 점심은 직장에서 먹는다. 그러면 저녁뿐인데 각자 출장을 가거나 모임이 있거나 회식이 있으면 차려먹는 건 많아 일주일에 세 번. 하지만 내 머리통만 한 김치통을 주실 때면 늘 난감하다. 안 가져간다고 사양해도 늘 한 보따리라 냉장고를 열 때마다 심란하다. 그래도 먹을 거다 보니 언젠간 먹겠지 싶어 냉장고에 넣어두면 늘 마음의 짐일 뿐이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는 끝나지 않았다. 나는 일방적인 관심은 폭력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우리 집에서  하나둘씩 늘어가는 짐덩이 들을 보면 속이 꽉 막힌 기분이다. 난 다 갖다 버려야 속이 시원하다. 결혼 전엔 이런 내 성격을 아는 엄마가 이렇게 아무렇게나 짐덩이를 안겨주지 않았다. 그러나 남편은 달랐다. 남편은 싫으면서도 버리는 건 찝찝해했다. 그래서 결혼 전 남편 집에 가보면 냉장고가 쓰레기 더미 같았다. 저게 사랑일까 미련일까.


두 사람이 붙으니 결국 유예기간을 두고 버리게 됐다. 방어하지 못한 온갖 짐들을 일단 냉장고에 넣어뒀다. 저것들이 쉰내를 풍기거나 썩을 기미가 보이면 남편이 싹 갖다 버리는 걸로. 그러다 보니 냉장고는 늘 심란했다. 정작 필요한 식재료들을 저 한 구석에 밀어 넣게 됐다. 결혼하면 둘 문제가 아닌 것들로 싸운다더니 우리가 딱 그 꼴이었다.


폭발은 머지않아 다가왔다. 김장철이었다.

우리 부부는 김장 때 가지 않았다. 있는 김치도 썩어 버리는 마당에 무슨 김장까지 간단 말인가. 그래도 가야 한단 주장과 갈 거면 너 혼자 가라가 붙은 결과 둘 다 안 가게 됐다. 거기서도 우리 결혼생활을 되짚어 보게 됐지만 진짜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김장김치 두 통이 우리 집에 배당된 거였다. 넣을 곳도 없으니 어서 가져가란 김치는 우리 집 몫이 되었다. 넣을 곳도 없는 김치는 왜 우리 집 몫인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게 결혼생활의 쓴맛인 듯했다. 남편을 말없이 노려보며 씩씩대다 결국 지갑을 챙겨 나갔다. 김치냉장고를 사기로 했다.


남편은 당황한 눈치였다. 그럼 그걸 어디다 두게? 옷방에 넣을 거야. 너무 비싸잖아. 돈 있어. 전에 네 친척 어른들이 따로 챙겨주신 거. 이렇게 한 번에 결정해도 돼? 그럼 김치를 받아오지 마!!!


말이 없어진 남편을 데리고 김치냉장고를 샀다. 그래도 양문형을 안 산건 내 나름의 양보였다. 김치냉장고가 집에 온 날, 나는 양가에서 온 온갖 짐들을 거기다 다 넣어놓고 잊기로 했다. 수납공간이 늘고 유예기간이 늘고 내 인내심도 늘어났다. 이게 결혼 시발 비용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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