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과거로 나를 되돌려준다면?'
한 번쯤 들어본 이런 가정이 나를 유쾌하게 한 적은 없다. 나는 그런게 지긋지긋했다. 즐거웠던 기억도 있지만 되돌리고 싶지 않은 상처들이 나를 더 힘들게 했다. 내게 과거란 상처를 들쑤시는 일일 뿐이었다. 되도록 기억하지 않고 많은 시간을 묻어두는 일이 차라리 편했다.
또는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그때 제대로 내가 상처를 인정하고 들여다보았다면, 그게 더 나았을까?' 상담을 다닌 이후에도 그게 더 나은 일이라 확신하지는 못한다. 당시 나는 최선을 다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린 시절의 나, 폭력적인 가족 안에서 방임되던 나, 가부장적인 위계구조에서 모두에게 외면당하던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어떻게 내가 내 생존의 방식을 선택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선택은 늘 가해자가 했다. 나는 어쩔 수 없는 공격에서도 나를 지키려고 노력했을 뿐이다. 만약을 가정하는 일은 잘못을 나에게도 지우는 일이다. 나는 충분히 홀로 자책했다.
어쨌거나 나는 생존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그렇게 살 수는 없었다. 충치가 났을 때 진통제를 먹는 일은 당장의 고통과 부담을 줄이는 일이다. 하지만 충치는 스스로 낫지 않는다. 치료시기를 되도록 앞당겨야 치료 기간도 비용도 줄이는 것처럼 나도 상담소를 찾아갔다. 다행이도 그 때의 나는 금전적인 여유가 있었다. 나를 고통스럽게 하던 원가족으로부터 경제적으로 독립했다. 물리적 거리도 있었다. 또는 이런 조건으로도 아직 스스로 설 수 없었다. 내 삶은 원가족의 폭력에 덮쳐진 기분이었다.
상담소를 찾고 나서도 과거의 상처를 안아주는 일은 고통스러웠다. 어떤 상처인지 알아야 보듬을 수 있으니까 하긴 하는데 상담소를 가는 발걸음은 늘 무거웠다. 가기만 하면 눈물이 멈추지 않아서 다 쏟아내고 나면 퉁퉁 불은 눈으로 밥을 먹었다. 브런치에 글을 쓰면서도 운 적이 많았다. 그런 내모습이 참 거북했다. 후련한 기분이 든 적은 별로 없고 기운을 다 써버려서 지친 적이 많았다. 그래서 상담을 종료하고 나서는 브런치에 거의 글은 쓴 적이 없다. 내 마음이 폭풍같아질 때 빼곤.
그래도 다 말하고 쓴 것은 잘한 일이었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떠들고 나서야 나를 아는 곳에서도 나에 대해 떠들고 다닐 자신이 생겼다. 다 쓰고나서 내 글을 읽어보니 나 자신을 부끄러워해야 할 일은 크게 없었다. 그게 글을 다 쓰고 나서야 보였다. 내가 살아온 가난이나 내가 당한 폭력이나 다 내가 감당하며 살아온 일이지만 당연하게 감당할 일은 아니었다. 그걸 인정하고 나를 숨기지 않았을 때, 내가 살아온 주변은 생각보다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어차피 나를 좋아할 사람들은 그런 것과 상관없이 나를 좋아해주었고, 그런 걸 빌미로 나를 판단할 사람들이 이제와서 크게 두렵지 않다.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 많이 바뀌었나 돌아보면 딱히 그렇지도 않다. 여전히 나는 원가족과 연을 끊지도 않았고, 내 부모 말고도 내 친척이 나를 무시하기도 한다. 새로 얻게된 관계들도 그리 합리적이게 행동하지 못할 때도 많고 늘 지지고 볶고 산다. 죽고 싶다는 생각도 종종 한다. 하지만 전보다는 내 바닥이 깊지 않다고 느낀다. 바닥을 메울 수 있는 힘을 조금씩 기르고 있다. 그리고 바닥에 덜 내려가고 있다. 내려가더라도 나를 잡아줄 것이 있으리라 믿으려 노력한다. 내 삶의 마지막은 즐거운 것으로 마쳤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