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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상수 Nov 25. 2021

교실수업 개선

#교육 칼럼 2

흔히 우리나라 교육에 대한 풍자로 '19세기의 교실에서 20세기의 선생님들이 21세기의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말을 많이 한다. 사실 일리 있는 말이다. 정부가 바뀔 때마다 맨 먼저 부르짖는 모토가 '교육개혁'이 된 지도 반 세기가 지났건만 우리 교육의 현실은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캄캄하다. 20여 년 전 문민정부에서는 소위 '교육개혁위원회'까지 만들어 22개 분야에 120개의 과제를 추진하기도 했다. 물론 그 이전의 7.30 교육개혁에 비해서는 상당히 광범위하고 미래지향적인 신교육체제를 구현하려는 의지가 강했으나 관제 개혁의 한계로 성공하지 못했기에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교육은 개혁의 대상이 되고 있을 뿐이다.


과연 우리 교육의 문제는 어디에 있고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 것인가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고민하고 또 이런저런 해결책들을 내놓고 있지만 변화의 기미는 별로 보이지 않는다. 입시위주 교육과 사교육의 성행, 상대평가의 한계, 고학력 지향 등 많은 요인으로 인해 개혁의 고삐는 좀처럼 쥐어지지 않고 있다. 외형적 성장으로 보면 우리나라 교육의 규모는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연구원(IMD)에서 매년 주요 60여 개 국가를 대상으로 발표하는 국가경쟁력 순위 중 인프라 영역의 교육경쟁력이 25위(2018년)이며, 그중 '25-34세 인구의 고등교육 이수율'과 '학생 1인당 교육 관련 공공지출' 분야에서는 3,4위를 차지하고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실상을 들여다보면 우리 교육의 현실은 그리 희망적이지 않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상당히 심각한 문제들을 해결할 역량을 키우고 있지 않다는 게 우리 교육의 가장 큰 난제이다. 창의성 결핍이나 인성교육의 부재 등도 지적할 만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한 개인으로서 지녀야 할 자율성과 자기 주도적 배움 능력의 결핍이 아닌가 한다. 이러한 문제의 극단적인 양상을 보여주는 드라마가 요즘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을 정도로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잘못된 교육으로 인한 폐해가 만연해 있다.


지난 교육에 대한 반성으로 상급 기관에서 역점을 두고 시행하는 정책 중에 소위 '교실수업 개선'을 주제로 하는 여러 가지 사업들이 추진되고 있다. 교실수업 개선 실천사례 연구발표대회나 수업명인제 등을 통해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교실수업을 전개하도록 연일 홍보와 연수를 강화해 왔다. 물론 교실수업 개선을 통해 수요자 중심의 학습 활동이나 과제 학습 등이 도입되어 어느 정도 학습자를 고려하는 풍토가 생기고 있는 점은 고무적이다. 그러나 교실수업 개선의 한계는 아직도 교사 주도의 수업을 통해 학습이 이루어진다는 데에 있다. 굳이 '좋은 교사는 가르치지 않는다'라는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교단 중심의 수업은 이제는 버려야 한다.


그러면 보다 미래지향적이며 오늘의 난제들을 해결할 역량을 키울 수 있는 교육은 어떠해야 할까? 극단적인 양극화 문제와 빈발한 환경 재해, 잔혹한 범죄의 증가, 극심한 이기주의 등의 여러 문제들이 교육 하나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보다 나은 미래를 후손들에게 남기기 위한 최선의 노력은 결국 교육을 통하지 않고서는 실현하기가 어렵다. 이제는 교실수업의 개선이 아니라 교실수업의 폐기가 그 출발점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미 앞서가는 선진국에서는 교과목까지 폐지하기도 하고 아예 교실 자체도 없애버릴 정도로 교육의 혁신을 꾀하고 있다. 당장 교실 밖을 나가 사회 현장에 나가서도 제 몫을 해 낼 수 있는 아이들이 필요한 것이다. 한 줄로 세워서 등수를 매기는 교실에 갇혀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사방이 트인 곳에서 360도의 방향으로 줄을 세우면 모두가 일등인 것이다. 제도적 틀 안에서 교육과정 안에서 점진적으로 하나하나 고쳐 나갈 시간이 없다. 정말로 과감하면서도 혁신적인 전환점이 필요한 시점이다.


교육의 핵심은 가르침이 아니라 배움에 있고 배움은 학습자의 온전한 권리이자 책무이다. 일부 학부모나 교사의 인생에 학생들을 더 이상 조연으로 삼지 말아야 할 것이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은 이미 세 살부터 배움이 시작된다는 말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라고 치부하며 자기 인생의 조연으로 아이들을 장식 삼아 훈육하는 시대는 종언을 고해야 한다. 배움에 목마른 아이들에게 외적 간섭이나 영향은 적을수록 좋다. 보고 배운다는 말처럼 학습자 주변의 환경을 배움터로 만들어 놓아야 한다. 교실수업 개선을 꾀하기 전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먼저 다양한 분야의 학습 환경을 최대한 학습자에게 제공하고 각자가 지향하는 배움의 역량을 키울 수 있도록 적절하게 조언하는 일 뿐이다.  [Jan 22.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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