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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ebomy Dec 23. 2022

시간차 감동

그래도 감동은 감동.

멕시코에서 지냈을 땐 스페인어를 전혀 구사하지 못했다. 현지에서 생활하며 배우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정말 '생존'을 위한 스페인어였다. 시간이 흘러 헤어지게 되었을 때, 학생들로부터 마음을 꾹꾹 눌러 담은 스페인어 손편지와 작은 선물을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직 한국어로 마음을 담아 쓰기에는 학생들의 수준이 높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음은 감사히 받았지만 A4 사이즈에 빽빽한 스페인어로 쓰인 편지는 나에게는 사실 너무 어려운 독해 지문에 불과했다.


멕시코에서 학생들에게 받은 손편지는 한국 집 어딘가에 둔 채, 다음 근무지인 스페인으로 향했다. 스페인에서 지내는 동안은 본격적으로 공부를 했던 것 같다. 다시 시간이 흘러 스페인 생활을 마무리 짓고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방 청소를 하다 오래전 받은 멕시코 학생들의 스페인어 손편지를 우연히 발견했다. 3년이 지나 전해지는 손편지의 내용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내용이었지만, 멕시코에서 만난 학생들에게 문득 미안한 마음이 들어 코끝이 찡해졌다. 내가 그때 이 편지를 읽을 수 있었더라면 싶은 후회와, 학생들의 마음이 늦게나마 전해져 오는 감동이 한데 뒤섞여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휩싸였다. 그때의 기억은 아직도 꽤 선명하게 남아 있다.


오늘 드디어 한 과정을 마무리했다. 짧은 기간이었고 한글부터 배운 학생들이었다. 이제 겨우 간단한 말을 할 수 있게 된 정도일까? 오늘 마지막 시간에 나도 한국어로 마음을 꾹꾹 담아 카드를 전해줬다. (너무 어렵지 않은 한국어로 썼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저는 한국어로 카드를 썼어요. (학생들의 한숨)
하지만 언젠가 이 카드 내용을 스스로 이해하는 날이 오기를 바라요.
정 궁금하면 번역기 어플 돌리든가... (웃음)"


듣자 하니 손글씨는 번역기 어플의 카메라로 인식이 안 된다고 한다. 정 궁금하면 내가 한글을 가르쳐 주었으니 타이핑을 해서 번역기 어플로 해석을 할 수 있겠지. 아무튼 일단 내 메시지는 베일에 싸인 암호인 셈이다. 본국에 돌아가면 다들 현생이 바빠 한국어 공부를 할 시간이 있을까 싶지만, 언젠가 내 메시지가 해석되는 날이 오기를. 그리고 내가 겪었던 시간차 감동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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