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로 건너온 마차
문헌을 보았을 때, 원시한국에서 말을 사육했던 흔적이 포착되는 때는 조선 멸망기인 서기전 109년이다.
이 시기는 전한 무제가 재위하던 원봉 2년이며, 전한이 대군을 이끌고 조선으로 진격하던 시기이다. 아래는 당대상을 구체적으로 기록한 『史記(사기)』 조선열전의 일부 내용이다.
其秋遣樓船將軍楊僕從齊浮渤海兵五萬人左將軍荀彘出遼東討右渠
그 해 가을에 누선장군 양복을 파견하여 제로부터 배를 타고 발해를 건너게 하였고, 군사 5만으로 좌장군 순체는 요동에서 출격하여 우거를 토벌하게 하였다.
右渠發兵距險
우거는 군사를 일으켜 험준한 곳에서 대항하였다.
左將軍卒正多率遼東兵先縱敗散多還走坐法斬
좌장군의 졸정인 다가 요동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출진하였으나, 싸움에 패하여 군사는 흩어지고 다도 도망하여 돌아왔으므로 법에 따라 참형하였다.
樓船將軍將齊兵七千人先至王險右渠城守窺知樓船軍少卽出城擊樓船樓船軍敗散走
누선은 제의 병사 7천을 거느리고 먼저 왕검에 이르렀는데, 우거가 성을 지키고 있으면서, 누선의 군사가 적음을 엿보아 알고, 곧 성을 나와 누선을 치니 누선군은 패해 흩어져 도망갔다.
將軍楊僕失其衆遁山中十餘日稍求收散卒復聚
장군 양복은 그의 군사를 잃고 10여일을 산중에 숨어 살다가 점차 흩어진 병졸들을 다시 거두어 모아들였다.
左將軍擊朝鮮浿水西軍未能破自前
좌장군도 조선의 패수 서군을 쳤으나 깨뜨리고 전진할 수가 없었다.
天子爲兩將未有利乃使衛山因兵威往諭右渠
천자는 두 장군의 군세가 유리하지 않다 여기고 위산으로 하여금 군사의 위엄을 갖추고 가서 우거를 달래게 하였다.
右渠見使者頓首謝願降恐兩將詐殺臣今見信節請服降
우거는 사자를 보고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하기를, 항복하기를 원하였으나 두 장군이 신을 속여서 죽일까 두려워했는데, 이제 신의의 징표를 보았으니 항복하기를 청하겠노라 하고
遣太子入謝獻馬五千匹及饋軍糧
태자를 보내 들어가 사죄하게 한 뒤 말 5천 필을 바치고 군량을 보내었다.
人衆萬餘持兵方渡浿水使者及左將軍疑其爲變謂太子已服降宜命人毋持兵
무리 만여 명이 무기를 지니고 막 패수를 건너려 할 때 사자와 좌장군은 그들이 변을 일으킬까 두려워 태자에게 말하기를, 이미 항복했으니 사람들에게 병기를 버리라고 명하라 하였다.
太子亦疑使者左將軍詐殺之遂不渡浿水復引歸
태자도 역시 사자와 좌장군이 자기를 속이고 죽일까 의심하여 끝내 패수를 건너지 않고 사람들을 이끌고 돌아가 버렸다.
山還報天子天子誅山
산이 돌아와 천자에게 고하니 천자는 산을 죽였다.
내용을 간략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누선장군 양복이 이끄는 수군과 좌장군 순체가 이끄는 육군이 양동으로 왕검성을 공격하였으나, 단 한 번도 성공적으로 공략하지 못한다. 이에 한漢은 무력으로써는 조선을 무너뜨리기 힘들 것이라 생각하고 위산을 사자로 보내 우거왕에게 항복을 권하였고, 우거왕은 이를 받아들인다. 이때 우거왕이 취한 행동을 통해 우리는 조선의 목마를 짐작할 수 있다. 그는 곧바로 태자를 보내 말 5천 필과 군량을 보내는데, 당시 조선은 왕경이 포위되어 국가의 존망이 위태로운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즉시 상당량의 말을 내어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유통이 곤란한 최악의 상황에서도 말 5천 필 정도는 융통할 수 있을 정도의 대규모 목마가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는 대규모 목마의 흔적과 달리 실제 평양을 비롯하여 조선의 영역이라 생각되는 지역에서 '조선의 마구'라고 생각되는 것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물론 한반도 서북부에서 적지 않은 수의 거마구가 확인되고 있으며 개중에는 청동으로 제작한 乙을자형·관형·권총형 기물 등, 한의 문화권에서는 확인되지 않는 독특한 형태의 거마구도 있다. 그리고 학계에서는 이를 서북한지방 즉, 조선 고유의 마구양식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그러나 일단 한반도 북부지역에서 출토되는 마구들은 대체로 서기전 100년을 전후한 시기의 유적에서 확인된다. 위만조선의 멸망이 서기전 108년이니, 고고자료를 통해서는 조선 멸망기 혹은 조선이 망하고 낙랑이 설치된 후부터 차마구가 들어왔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거기다, 아까 언급했던 소위 ‘조선계 마구’로 추정되는 것들에 대해서는, 최근 그러한 학계의 다수설을 정치하게 비판하는 연구(孫璐 2012)가 이루어져 있으므로 이에 대해 잠깐 소개하겠다.
쑨루孫璐는 박사학위논문인 「고대 동북아시아 차마구와 기마구의 변천」을 통해 한반도를 비롯한 동북아시아지역의 고대 마구에 대해 연구했다. 이에 따르면 서기전 100년을 전후하여 등장한 한반도의 마구는 주로 거마구이며, 동시기 중원의 제후왕급 무덤에서 출토된 것과 대체로 비슷한 종류의 물건이 발견된다. 이들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분량이 너무 많으므로 삼국시대 신라와 가야의 마구를 주제로 하는 본 연재에서는 다루지 않고, 다만 앞서 언급했던 서북한지역의 乙자형동기와 관형동기, 그리고 권총형동기와 P피자형동기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乙자형동기는 영흥 소라리유적이나 다롄 잉청쯔大連 營城子유적 등 극소수의 사례를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 서북한지방에 위치한다. 말 그대로 새 을乙자 향태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명명되었는데, 가운데 부식으로 인해 파손된 부분을 따로 관管형동기라 일컫기도 한다. 청동제 대롱 내부에는 목재가 확인되는 경우도 있어서 본디 목재로 심을 만든 후 청동으로 겉을 감싼 것이라 생각된다. 특히 남포 태성리유적의 10호묘에서는 두 점은 을자형동기가 목심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 형태가 온전히 출토되어, 이 기물이 본디 Π·π파이자, 혹은 几궤자 형상을 띠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오카우치 마쓰자에岡內三眞와 리순진은 乙자형동기와 권총형동기를 한반도 북부지역의 토착 차마구를 대표하는 기물로 보았다. 특히 권총형동기의 경우 삿갓형동기와 함께 쌍두마차의 멍에 부속구로 상정하였는데, 그들의 견해는 이후 서북한의 차마구를 논의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는데, 이후 KBS의 역사스페셜이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고조선의 쌍두마차'를 추정복원하여 대중들에게 소개한 바 있다.
[그림 2]가 바로 대중에 익히 알려진 조선, 혹은 낙랑의 마차이다. 여기에는 말방울이나 재갈, 권총형동기, 삿갓형동기, 일산살 꼭지 등 다양한 출토품이 복원되었지만 정작 乙자형동기는 확인되지 않는다. 이것은 아마 을자형동기의 쓰임과 위치를 잘 알 수 없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乙자형동기를 고삐걸개로 추정하는 의견이 있지만, 그것은 반영되지 않은 것 같다. 그렇다면 고삐걸개는 무엇인가? 마차를 운전하기 위해서는 양 손에 고삐를 잡아야 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1인용 마차일 경우에는 운전 외의 작업을 할 수 있는 동승자가 없으므로 불편을 초래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운전자의 양 손을 자유롭게 하기 위하여 허리에 착용하는 부속을 고삐걸개 혹은 고삐손쥐개掛繮鉤라고 한다. 고삐걸개는 마차가 널리 쓰인 중국에서 많이 확인되었는데, 다양한 형태가 있으나 이 글에서는 을자형동기와 가장 비슷하다고 생각되는 궁형기弓形器를 사례로 다뤄보고자 한다. 아래 [그림 3]은 궁형기弓形器의 여러 형태와 출토상이다. 궁형기의 용도에 대해서는 깃대 장식이나 활 전면 보강대 등 다양하게 논의되지만, 뭐가 되었든 마차의 부속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은 고고학적으로 분명히 확인되었다.
궁형기는 형태적으로 乙자형동기와 비슷하며 이후 변이되는 형태는 더더욱 几자형에 가깝기 때문에, 乙자형동기 역시 고삐걸개로 볼 수 있다고 본 것 같다. 하지만 이에 대하여 쑨루는 을자형동기의 크기와 형태, 시기 등을 근거로 이를 부정한다. [그림 1]과 [그림 4]를 비교해보면 알겠지만, 허리에 착장하기에도 불편할뿐더러 고삐를 걸 갈고리도 마련되어 있지 않다. 게다가 [그림 3]의 궁형기는 선진시대까지만 존재하며, [그림 5]와 같이 궁형기 이후에 등장한 고삐걸개들도 전국시대 이후에는 완전히 등장하지 않으므로 시기상 맞지 않는다. 이에 대하여 쑨루는 멍에, 특히 쌍원차의 멍에라는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였다. 즉 을자형동기의 본 모습이 궤자를 띠고 있으므로, 그것이 중국의 쌍원차식 멍에와 형태적으로 상당히 흡사하다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쌍원차에 궤자형 멍에가 사용되는 것이 전한 말과 후한대에 해당하므로, 조선의 공간에 한의 마구가 본격적으로 유입되는 서기전 1세기와 시기적으로도 부합한다고 할 수 있다.
멍에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깊게 파고들기 위해서는, 일단 고대 중국의 마차 종류를 알아야 한다. 고대 중국의 마차는 우마와 차를 연결하는 방식 즉 계가법系駕法이 시기별로 다르며, 그에 따라 멍에의 형태도 달라진다. 가장 먼저 사용되었던 것은 멍에軛가 견인력靷의 전부를 담당하는 액인식軛靷式으로, 선진시대의 쌍두마차에 활용되었다. 이때 쌍두마차는 두 마리 우마의 어깨 위에 있는 멍에를 하나의 멍에대로 연결한 후 가운데에 하나의 끌채輈로 우마와 차를 연결하므로 독주차獨輈車라고도 한다. 전국시대 말부터는 우마의 견인력을 멍에가 좀 더 안정적으로 전달하기 위하여 어깨 위의 멍에와 그 앞의 가슴띠胸帶를 연결하는 흉대식胸帶式이 사용되기 시작한다. 흉대식 계가법의 등장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우마 한 마리가 마차를 끄는 일두마차Einspanner가 활용되기 시작하였는데, 이 일두마차는 우마의 양 옆에 두 개雙의 끌채轅를 연결하므로 쌍원차雙轅車라고도 한다. 쌍원차는 끌채가 굽은 정도에 따라 둘로 나눌 수 있는데 크게 굽은 것을 곡원형曲轅形, 비교적 덜 굽었거나 곧은 것을 직원형直轅形이라 한다.
곡원형은 이전 액인식의 긴 멍에대를 살리면서 끌채를 멍에대 양 끝에 연결하는 방식이다. 끌채는 수레의 바닥으로부터 뻗어나오는데, 우마와의 연결점이 우마의 어깨 위에 있기 때문에 높이 차이가 매우 크다. 그렇기 때문에 마차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끌채가 곡선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경우 안정성이 매우 떨어지므로, 쌍원차는 점차 직원형으로 나아가게 된다. 직원차는 끌채를 멍에의 양 발치에 연결하는 것이기 때문에 차 바닥과의 높이 차이가 그다지 크지 않다. [그림 6]의 2와 3을 비교한다면 그 차이를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을자형동기가 사용된 한반도 서북부의 마차는 어떤 형태였을까? 서북한의 거마구는 시기적으로 전한대에 해당하는 서기전 1세기이며, 당시 중국에서는 한창 곡원형 쌍원차가 활용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乙자형동기의 멍에대는 어떤 형태인가? 앞서 '고조선 마차'의 멍에대로 권총형동기와 삿갓형동기를 상정한 것이 있었는데, 형태적으로 알맞다고 생각한다. 정백동에서 출토한 유물 중 권총형동기와 유사하면서도 멍에대의 중간 장식으로 상정되는 기물이 있는데, 이것과 권총형동기·P피자형동기·乙자형동기를 조합해보면 [그림 8]과 같은 형태를 상상할 수 있다.
권총형동기와 P자형동기 역시 각각 닮은 형상을 따와 명명한 것인데, 평양 정백동에서 출토한 P자형동기의 경우는 비교적 완전한 형태를 띠었기 때문에 본디 어떤 형태였는지 알 수 있게 되었다. 오카우치 마쓰자에와 리순진은 이것을 멍에대 부속으로 보았고, 이에 대하여서는 다른 견해가 없는 듯하다. 다만 어떤 마차의 멍에대인가에 대하여 역시 쑨루와 의견이 갈린다. 오카우치 마쓰자에와 리순진은 권총형동기와 P자형동기를 조합했을 때 구멍이 좌우로 한 쌍식 4개가 되기 때문에, 쌍두마차의 멍에를 고정한 구멍으로 보았다. 그러나 쑨루는 P자형동기의 구멍 사이 너비가 대략 45cm 정도로 좁기 때문에 우마 두 마리를 나란히 놓고 연결하기에 무리가 있다는 견해를 제기하였다. 중국의 진시황릉과 대보대한묘에서 출토한 멍에대를 보면, 당시 중국 쌍두마차의 멍에대는 내측 간격이 60cm 내외로 규격화되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쑨루는 P자형동기와 권총형동기의 구멍 크기가 서로 다르므로 용도도 달랐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즉 안쪽의 작은 구멍 두 개는 하나의 멍에를 고정하며, 바깥의 큰 구멍 두 개는 각각 끌채를 고정한다는 것이다. 실제 쌍원차의 계가 방식을 보면 멍에대 양끝의 구멍은 고삐를 통과시켜 고정하기 때문에, 곡원차는 구멍이 커질 수밖에 없다. 이에 따라 복원되는 서북한의 마차는 긴 멍에대와 하나의 멍에를 연결하고, 멍에대 양 끝에 두 개의 끌채를 연결하는 곡원형 쌍원차이다.
그런데 서북한에서는 정작 당대의 마차가 실물로 확인된 바 없다. 분묘에서 출토되는 거마구들도 중국과 달리 마차 한 개체분의 것들이 세트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개중 몇 가지만 맥락 없이 부장된다. 이것은 서북한이 실제로 마차를 사용했다거나 혹은 사용하던 마차를 그대로 부장한 것이 아니라, 마차의 사용과는 관계없이 무덤 주인의 권위나 권력을 물적으로 표상하기 위해 채택한 부장품일 가능성을 시사한다. 물론 마차를 소유자의 권력과 연결하여 무덤까지 가져가는 것은 당대 중국의 방식이다. 중국은 상대 이후로 거마 부장갱車馬坑을 따로 마련하여 말과 마차 세트를 실물 그대로 매장하는 것이 전통이었다. 그러나 이는 점점 간소화되어 선진시대 이후로는 마차의 모형이나 그림을 대신 부장한다든지, 몇 개의 차마구로써 마차 전체를 상징하는 부장 방식이 등장하게 된다. 하지만 마차 실물을 부장하는 방식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는데, 전한 중기가 되면 열후급 이상의 무덤에서는 다시 실용 마차가 부장되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서북한의 거마구 부장 방식은 선진시대 이후의 그것을 따른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당시 서북한에는 전한의 열후급과 같은 존재는 없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조선이 망한 뒤 그 공간은 한사군에 의해 통치되었기 때문에 군현 태수급을 상회하는 인물은 없었다고 봐야하는 것이다. 다만 이와 같은 쑨루의 견해에 한 가지 의문은 있다. 마차의 형태나 부장 방식에 있어 당대 중국의 것을 그대로 수용했다는 사실은 알겠는데, 그러한 맥락과 맞지 않는 출토품을 대체 무엇으로 해석해야 하는 것일까? 중국식 곡원형 쌍원차와 중국식 마차 부장 방식, 게다가 그것을 영위한 존재는 한의 군현, 하지만 정작 부장된 것은 권총형동기니 을자형동기니 하는, 중국에서 등장하지 않는 형태의 물건들이다. 그렇다면, 중국의 마차 형태와 부장 방식은 받아들이면서 기물은 자기들이 디자인해서 만들었다는 것일까? 설치되지 얼마 안 된 군현이? 그것도 수용하자마자? 한사군 이전의 토착 마차문화를 생각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의 논의를 진행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