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사료를 통해 본 辰과 韓 [參]
라. 변진한弁辰韓 구분의 모호성
한은 삼종으로 구분되며 대개 마한‧진한‧변한으로 명명된다. 그런데 여기서 변한의 경우 『삼국지』에서 단 한 번 등장할 뿐이고, 『삼국지』의 나머지 기록에는 모두 변진弁辰으로 기록된다. 『후한서』는 아예 전부 변진으로 기록한다. 이에 대하여 청淸대의 학자 왕후이펀王會汾은 『진서晉書』와 『양서梁書』에 모두 변한이라 되어 있으니 변한으로 고쳐야 한다고 말하는데, 동의할 수가 없다. 후대 사서의 기록으로 선대 사서의 기록을 고친다는 논리는 납득하기 어렵다. 삼한을 가장 처음 기록한 『삼국지』에서는 변진의 나라와 사회 및 풍속을 묘사하는 모든 기록에 이들을 변진이라 명명한다. 게다가 진한과 변진을 합쳐 변진한이라 이르기까지 한다. 이것을 과연 단순 오기로 볼 수 있을까? 분명한 의도를 갖고 표기한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본고에서는 진한 남부에 소재했던 정치복합체를 변진이라 이를 것이며, 동남한지방의 철기시대 정치복합체를 두루 일컬을 때는 변진한이라 이를 것이다.
진한과 변진은 일반적으로 신라와 가야의 전신으로 알려져 있으며, 철기시대에 마련된 이들의 문화는 삼국시대 신라·가야문화의 토대가 된다. 신라와 가야의 역사적 전개가 분명 이질적이며 각기 독자성을 가지기 때문에, 이 둘의 물질문화 역시 비슷한 듯하지만 분명 다른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진한과 변진은 완전히 이질적인 세력인 양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제 철기시대 영남지방의 물질문화는 놀랍게도 똑같다. 기물과 시설부터 그것을 이용하는 방식까지 다른 점을 찾는 것이 더 어려운 이 상황에서, 이 둘을 고고학적으로 다른 정치복합체로 보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그들의 물질문화는 마한의 공간으로 상정되는 서남한지방의 것과 분명하게 구분된다. 그렇다면 당대의 흔적으로 차이를 상정할 수 없는 영남지역 세력들은 도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그리고 어떠한 이유로 양분된 것일까? 진한과 변진의 완전한 구분은 한을 세밀하게 묘사하는 사서로부터 출발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이는 곧 당대 중국인들의 인식과 직결된다. 그러므로 진한과 변진에 대한 논의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삼국지』와 『후한서』의 변진한 기록을 분석할 필요가 있다.
⑴ 『삼국지』 변진한조 해석
辰韓在馬韓之東其耆老傳世自言古之亡人避秦役來適韓國馬韓割其東界地與之有城柵其言語不與馬韓同名國爲邦弓爲弧賊爲寇行酒爲行觴相呼皆爲徒有似秦人非但燕齊之名物也名樂浪人爲阿殘東方人名我爲阿謂樂浪人本其殘餘人今有名之爲秦韓者始有六國稍分爲十二國
진한은 마한의 동쪽에 위치하는데, 노인들이 대대로 전하며 스스로 말하기를 '옛 망명인들로 진의 노역을 피하여 한국으로 왔는데 마한이 그 동쪽 경계의 땅을 분할해 주었다.'고 하였다. 성책이 있으며, 그들의 말은 마한과 같지 않아 나라를 〈邦〉, 활을 〈弧〉, 도둑을 〈寇〉, 잔질을 〈行觴〉이라 한다. 서로 부르기를 모두 〈徒〉라 하여 진인과 유사하니 비단 연‧제의 명물만은 아니다. 낙랑인을 〈阿殘〉이라 하였는데, 동방 사람들은 본인을 〈阿〉라 하였으니 낙랑인들은 본디 그 중 남은 사람이다. 지금도 그것을 〈秦韓〉이라 부르는 자가 있다. 처음에는 6국이 있었는데 점차 12국으로 나뉘었다.
弁辰亦十二國又有諸小別邑各有渠帥大者名臣智其次有險側次有樊濊次有殺奚次有邑借有已柢國不斯國弁辰彌離彌凍國弁辰接塗國勤耆國難彌離彌凍國弁辰古資彌凍國弁辰古淳是國冉奚國弁辰半路國弁樂奴國軍彌國弁軍彌國弁辰彌烏邪馬國如湛國弁辰甘路國戶路國州鮮國馬延國弁辰狗邪國弁辰走漕馬國弁辰安邪國馬延國弁辰瀆盧國斯盧國優由國弁辰韓合二十四國大國四五千家小國六七百家總四五萬戶其十二國屬辰王辰王常用馬韓人作之世世相繼辰王不得自立爲王
변진 역시 12국이다. 또 여러 작은 별읍이 있어 각기 거수가 있다. 큰 존재를 신지라 이르고, 다음에는 험측, 다음에는 번예, 다음에는 살해, 다음에는 읍차가 있다. 기저국, 불사국, 변진미리미동국, 변진접도국, 근기국, 난미리미동국, 변진고자미동국, 변진고순시국, 염해국, 변진반로국, 변낙노국, 군미국, 변군미국, 변진미오야마국, 여담국, 변진감로국, 호로국, 주선국, 마연국, 변진구야국, 변진주조마국, 변진안야국, 마연국, 변진독로국, 사로국, 우유국이 있다. 변진한 합 24국이며, 대국은 4~5천가, 소국은 6~7백가로 총 4~5만호이다. 그 중 12국은 진왕에게 신속되어 있다. 진왕은 항상 마한사람으로 왕을 삼아 대대로 세습하였으며, 진왕이 자립하여 왕이 되지는 못하였다.
土地肥美宜種五穀及稻曉蠶桑作縑布乘駕牛馬嫁娶禮俗男女有別以大鳥羽送死其意欲使死者飛揚國出鐵韓濊倭皆從取之諸市買皆用鐵如中國用錢又以供給二郡俗喜歌舞飮酒有瑟其形似筑彈之亦有音曲兒生便以石厭其頭欲其褊今辰韓人皆褊頭男女近倭亦文身便步戰兵仗與馬韓同其俗行者相逢皆住讓路
토지는 기름지고 좋아 오곡과 벼를 심기에 알맞다. 누에와 뽕을 알아 비단과 베를 짤 줄 알았으며, 소와 말을 탈 줄 알았다. 혼례는 남녀가 유별했으며 큰 깃털로 장사를 지내는데 그것은 죽은 사람이 새처럼 날아다니라는 뜻이다. 나라에서 철이 생산되어 한·예·왜가 모두 좇아 취한다. 시장매매는 모두 철을 이용하는데 중국이 돈을 쓰는 것과 같으며, 또 두 군에도 공급한다. 풍속으로 가무와 음주를 즐기며 현악기가 있는데 그 모양은 축과 같고 그것을 연주하는 음곡도 있다. 아이가 태어나면 곧 돌로 머리를 눌러 납작하게 만들고자 하기 때문에 지금 진한인은 모두 편두이다. 남녀가 왜와 근접하면 역시 문신을 한다. 보병에 적합하며 병장기는 마한과 같다. 그 풍속에, 행인이 서로 만나면 모두 멈추어 길을 양보한다.
弁辰與辰韓雜居亦有城郭衣服居處與辰韓同言語法俗相似祠祭鬼神有異施竈皆在戶西其瀆盧國與倭接界十二國亦有王其人形皆大衣服絜淸長髮亦作廣幅細布法俗特嚴峻
변진은 진한과 잡거하며 성곽도 있다. 의복·거처는 진한과 같고 언어·법속은 서로 비슷하지만 귀신에 대한 제사에 다름이 있다. 부엌은 모두 문의 서쪽에 설치했다. 독로국은 왜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12국에도 왕이 있는데, 그 사람들의 형체는 모두 장대하며 의복은 청결하고 장발이다. 또 폭이 넓은 세포를 제작한다. 법속은 특히 엄준하다.
위 기사를 분석해보자. 일단 기록되는 순서는 진한과 변진 순을 기본으로 한다. 먼저 진한에 대한 묘사는 그 위치와 출신, 성책여부, 언어 특성 등을 이야기하다가 말미에 12개의 나라가 있음을 언급하고 끝낸다. 다음으로 등장하는 변진에 대한 묘사는 진한과 비교하며 '역시' 12개국이 있음을 먼저 언급한 뒤, 변진 내 정치체들의 위계별 우두머리 명칭에 대해 상세히 나열하였다. 이는 진한에 대한 묘사에는 없는 내용으로, 당시 『삼국지』 편찬자들이 변진 내 기득권층의 위계서열에 대해 상세히 이해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그 다음으로는 진한과 변진의 국명이 나열되는데, 진한 변진의 구분 없이 섞여있으며 변진의 국에만 앞에 소속명을 붙인다.
그 다음으로는 생계와 의례에 관련된 내용이 기술된다. 농업과 잠업, 상업, 혼례, 장례 등에 대해 묘사하는 이 기사에 대하여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이들의 생략된 주체를 변진으로 상정하였다. 이는 송宋대에 제작된 판본에 기인한 것으로, 여기에 따르면 맨 처음 진한 관련 기사는 진한전, 그 이후 변진이 등장하는 기사부터는 변진전으로 구분되어 있다. 즉 원전에는 없는데 송본에서만 확인되는 것이다. 허나 이렇게 구분하면 "弁辰亦十二國"조 이하로는 모두 변진에 관련된 이야기가 된다는 말인데, 그렇게 본다면 일단 직후에 나오는 24개국의 나열이나 편두풍습에서 언급되는 진한의 존재가 상당히 어색해진다.
그러므로 『삼국지』 변진한조의 기사 구성은 24개국명의 나열 이전으로 '진한; 위치, 출신, 거주, 성책, 언어, 구성원'과 '변진; 구성원, 구성원별 위계와 우두머리 명칭'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다시 진한과 변진의 24개국명 및 인구수가 언급되고 바로 생계와 의례, 풍속이 따라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가무와 음주, 악기, 편두, 문신, 군사, 양보 등 각종의 풍속과 문화에 대한 이야기가 끝나고 나면 또 다시 변진이 등장한다. 즉 그 이전의 이야기들은 굳이 분리하자면 모두 진한의 이야기에 해당하는 게 적당하다. 이러한 관점으로 진한조의 구성을 다시 정리하면, 위치 → 출신과 거주 → 성책 → 언어 → 나라 수 → 변진의 나라 수 → 읍락의 위계와 우두머리 명칭 → 나라 명단 → 나라의 수효와 규모 → 진왕과 지배층 → 풍속으로 구성된다. 이러한 구성은 마한조와 상당히 흡사한데, 마한 역시 위치를 시작으로 하며 이후 생계경제 → 통치자 → 거주와 성책 → 나라 명단 → 나라의 수효와 규모 → 진왕과 지배층 → 중원과의 관계사 → 풍속을 이야기한다. 몇 가지 차이점을 제외하고 전체적인 흐름은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진한의 풍속이 서술된 이후 변진이 재차 언급되면서, 가장 먼저 진한과 잡거한다는 서술을 통해 위치 정보를 밝히고 있다. 즉 마한조와 진한조의 시작과 같다는 것이다. 뒤이어서는 성곽에 대한 정보가 나오는데, 이 역시 진한조의 순서와 상통한다. 다음으로 나오는 내용은 변진의 의복, 주거, 언어, 법속, 제의 등 풍속에 대한 내용이다. 마한조와 진한조는 이 지점에서 언어와 나라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야 하는데, 이것은 진한조에서 모두 얘기하고 있으므로 생략한 것으로 판단한다. 풍속은 모두 상세한 묘사보다는 진한과의 비교를 통해 기술을 전개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모두 같거나 비슷하다고 얘기되기 때문에 추가적으로 서술할 얼마 없었던 것 같다. 어쨌든 기본적인 구성은 마한조나 진한조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삼국지』 변진한조에서 진한조와 변진조를 굳이 나눈다면, "弁辰與辰韓雜居" 부터 변진조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겠다. 독로국은 왜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했는데, 이 때 독로국은 변진독로국이 아니라 그냥 독로국이라 표현되었다. 독로가 국의 본명이며 앞선 변진은 진한과의 구별을 위해 따로 소속을 명시한 것인데, 여기서는 굳이 변진을 붙이지 않았으니 이를 포함한 전후 기록은 모두 변진에 대한 이야기임을 짐작할 수 있다. 변진의 왕 혹은 변진인의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보이는 기사에서 머리모양은 장발을 늘어뜨리는 형태임을 특별히 기술한 것으로 보아, 이것은 진한과 다른 풍속이 아닐까 짐작한다. 광폭세포로 제작된 청결한 의복이나 특별히 엄준한 법속 역시도 중국인들이 특별히 인식한 변진의 문화일 것으로 사료된다.
⑵ 『후한서』 변진한조 해석
『후한서』에는 진한과 변진에 대한 내용이 명확하게 분리된다. 진한에 대한 내용이 먼저 나온 뒤에 변진에 대한 내용이 따라온다.
辰韓耆老自言秦之亡人避苦役適韓國馬韓割東界地與之其名國爲邦弓爲弧賊爲寇行酒爲行觴相呼爲徒有似秦語故或名之爲秦韓有城柵屋室諸小別邑各有渠帥大者名臣智次有儉側次有樊秖次有殺奚次有邑借土地肥美宜五穀知蠶桑作縑布乘駕牛馬嫁娶以禮行者讓路國出鐵濊·倭·馬韓並從市之凡諸貿易皆以鐵爲貨俗憙歌舞飮酒鼓瑟兒生欲令其頭扁皆押之以石
진한은 노인들이 스스로 말하기를, '진의 망명인들로 고된 노역을 피하여 한국에 오자 마한이 그들의 동쪽 경계의 땅을 분할해 주었다.'고 한다. 그들은 나라를 〈邦〉, 활을 〈弧〉, 도둑을 〈寇〉, 잔질을 〈行觴〉, 서로 부르기를 〈徒〉라 하여 진의 말과 흡사하므로 혹은 〈秦韓〉이라 이르기도 한다. 성책과 가옥이 있다. 여러 작은 별읍은 각기 거수가 있는데, 큰 존재를 신지라 이르고, 다음에는 험측, 다음에는 번예, 다음에는 살해, 다음에는 읍차가 있다. 토지가 기름지고 좋아 오곡에 적합하며 누에와 뽕을 알아 비단과 베를 짠다. 마소를 타고 다니며 혼인은 예로써 하고 행인들은 길을 양보한다. 나라에서 철이 생산되어 예·왜·마한이 모두 모여 좇는다. 시장의 모든 거래에는 모두 철을 화폐로 사용하며, 풍속은 가무와 음주를 즐기고 악기를 연주한다. 아이가 태어나면 머리를 납작하게 하고자 모두 돌로 누른다.
弁辰與辰韓雜居城郭衣服皆同言語風俗有異其人形皆長大美髮衣服絜淸而刑法嚴峻其國近倭故頗有文身者
변진은 진한과 잡거하며 성곽·의복은 모두 같으나 언어·법속에는 다름이 있다. 그 사람들의 모습은 모두 장대하고 머리카락이 아름다우며 의복은 깨끗하고 형법은 엄준하다. 그 나라가 왜와 가까우므로 문신을 한 사람이 꽤 있다.
『삼국지』와 『후한서』의 내용을 비교하면, 확실히 앞서 짐작했던 바와 같이 농업과 잠업, 상업, 철, 풍속 등에 관련된 내용이 진한조에 해당함을 알 수 있다. 다만 변진의 내용일 것으로 짐작했던 거수 관련 내용들은 진한조에, 진한의 내용일 것으로 짐작했던 문신 이야기는 변진조에 배치되었다. 『후한서』의 분류를 신뢰한다면 『삼국지』의 "始有六國稍分爲十二國弁辰亦十二國又有諸小別邑各有渠帥"는 내용 상 "始有六國稍分爲十二國弁辰亦十二國"을 묶어 변진 12국조가 진한 12국조에 대응하여 후술된 것으로, 또한 뒤따라오는 "又有諸小別邑各有渠帥"는 공통 내용으로서 진한과 변진의 별읍을 다스리는 거수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겠다. 문신 이야기가 변진조에 배치된 것은, 독로국이 왜와 접해있다는 기사에 근거하여 임의 조정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삼국지』의 내용은 진한과 변진의 내용이 순서대로 따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辰韓在馬韓之東"조를 시작으로 변진한에 대한 정보를 분별 없이 나열하는 양상일 것이다. 그 내용을 분석하면 "辰韓"이라는 언급은 일반적으로 생략되며, 변진에 대한 정보를 특별히 기술할 때는 꼭 "弁辰"을 언급한다. 즉 진한을 표준으로 한 상태에서 변진을 특별히 구분하는 양상인 것이다. 그러므로 출철出鐵이나 편두扁頭 등의 기사들도 기왕의 인식대로 변진만의 기록이라 하거나 『후한서』의 기록대로 진한만의 기록이라 할 수 없으며, 동남한지방 전체를 아울러 묘사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 경우 고고학적 성과를 통해 현상을 파악하는 수밖에는 없는데, 출철의 경우 시기를 달리하며 진한과 변진에서 모두 활성화됨을 알 수 있으며 편두로 변형된 두개골 역시 신라와 가야의 고분에서 모두 확인된다.
⑶ 진한 Default
『삼국지』와 『후한서』 한조의 전체 구성을 보았을 때, 한에 대한 개요적 서술이 앞서고 뒤이어 삼종이 마한 → 진한 → 변진 순으로 기술된다. 그리고 각종의 분량은 기술 순서대로 점점 줄어든다. 이 세 집단은 중국인들에게 별종으로 규정되며 실제 서술에도 상이한 습속들이 다수 확인되지만, 어디까지나 한이라는 상위 스케일에 묶인 존재들이다. 진한을 서술하는 중에 변진제국에 대한 내용이 등장하고, 마한을 서술하는 중에 진한 염사지역 사람인 소마시의 활약이 기술되는 것은 이들이 결국 같은 한의 족속들임을 강하게 인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기술 순서에 따라 내용 분량이 줄어든 현상은 진한과 마한의, 그리고 변진과 진한의 습속에서 공유되는 내용을 대부분 후술에서 배제하였기 때문으로 판단할 수 있다. 그런데 세 집단의 습속에 대한 비교 서술에서 마한과 진한의 언어는 같지 않다不…同고 표현한 반면, 진한과 변진의 습속은 대부분 같거나同 유사하고相似 그렇지 않더라도 일부 다른 부분이 있다有異고 표현한다. 내용이 섞이는 부분에서도 마한조의 진한 관련 내용은 진한 수장층의 일원이 국제적인 활동을 한 것을 따로 서술한 반면, 진한조의 변진 관련 내용은 진한과 변진의 나라를 아예 뒤섞어 서술해버린다. 이를 보면 왠지 진한과 변진의 관계는 마한과 진한의 관계보다 더 밀접하다는 생각이 든다.
『삼국지』와 『후한서』의 변진한조는 위에서 얘기한 특성들을 포함하여, 변진제국의 이름에만 앞에 소속명을 붙인다는 점과 변진 관련 내용에만 변진이라는 주어가 따로 표기된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게다가 내용면에 있어서도 변진은 대부분 진한과의 유사 정도를 비교하는 형태로 전개되며, 그 분량은 진한조의 부록처럼 상당히 빈약하다. 혹시 당시 중국의 시각 속에서 진한과 변진은 분명히 별개의 집단이지만 지역적으로 동남한이라는 하나의 스케일Scale에 묶여 있고, 중국인들이 둘 중 진한을 표준Default으로 삼았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중국인들에게 당시 한반도 동남부 즉 영남지방은 '광의의 진한'이라는 거대한 스케일 속에 '협의의 진한'과 그에 비교하여 일부 다른 점이 있는 변진이 별개의 하위 스케일을 갖춘 공간으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그럼 중국인들이 한반도 동남부에 진한 디폴트를 갖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상세한 내용은 후술할 고고학적 검토를 통해 파악 가능하겠지만, 현재까지의 내용들로 추정컨데 동남한에서 중국과 가장 먼저 접촉한 것이 진한으로 정체화된 정치체들이었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기실 고고학적으로 보았을 때 동남한에서 중국과 가장 먼저 접촉했을 것으로 판단되는 지점은 사천 늑도유적이다. 늑도유적에서는 중국 화폐인 반량전과 오수전, 그리고 일본의 야요이토기가 출토되었기 때문에 일찍이 한-중-일 국제 교역의 거점으로 상정되었다. 다만 늑도는 서기전 2세기가 지나면 더이상 전과 같은 기능을 하지 않는데, 앞서 가정했던 것처럼 중국인이 한을 인식하는 시점이 서기 2세기라면 서기전 2세기의 늑도는 그냥 진辰의 한 지점이었을 것이다. 이후 중국과 동남한의 접촉은 서기전 1세기가 되면서 금호강유역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이루어지는데, 금호강유역의 배타적 권력자와 정치체가 대개 이때부터 우후죽순 등장하였을 것으로 생각되므로 이 시점부터 대략 200년 간의 기억이 진한을 동남한의 표준으로 삼게 되는 근간으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이 시기에 물론 변진의 공간으로 상정되는 창원과 밀양에서도 배타적 권력자의 면모가 확인되지만, 이 시기에는 진한과 변진의 분화가 뚜렷하지 않았던데다가 정작 변진이 중국과 접촉하는 시기에 이 두 지역은 그다지 존재감을 보이지 않으므로 의미 없는 반례라고 생각한다. 김해를 위시한 변진은 서기 2세기를 기점으로 중국의 문물을 대거 받아들이는 반면 진한에서는 중국의 물건을 위세품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이는 중국과의 물적 교류가 진한에서는 끊어지고 변진에서는 이어짐을 의미하므로, 『삼국지』의 저술 시점을 보았을 때 비교적 중국은 비교적 최근에 변진을 직접 인지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