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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긴믈 Nov 23. 2019

韓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5

문헌사료를 통해 본 辰과 韓 [肆]

마. 변진한제국弁辰韓諸國


역사가 오래되고 단절적인 마한의 기록은 시기 판별에 주의해야겠지만, 비교적 늦게 형성하고 형성 이후 성원 정치체가 연속적으로 발생하는 변진한의 기록은 당대성을 인정할 만하다. 『삼국지』가 저술되는 서기 3세기까지도 그 연속성은 계속되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는 신라와 가야의 지방을 다스리던 〈소국〉이 다수 등장하는데, 그들 중에는 신라에게 있어 꽤 존재감 있는 존재로 묘사되는 것도 았다. 사벌국‧압독국‧우시산국‧거칠산국 등의 나라가 그것인데, 이들의 공통점은 『삼국지』에 수록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들은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에서 신라가 부침과 성장을 전개하는 맥락을 제공하는 주연이지만, 『삼국지』에는 아무런 존재감을 보이지 않는 것이다. 고고학 조사 성과를 통해 당대의 현장 증거가 있음은 규명이 되지만 정작 당대의 기록에 존재가 확인되지 않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서두에 말한 것과 달리 『삼국지』에 당대성이 없는 것일까?


ㅂ-① 各有長帥大者自名爲臣智其次爲邑借
ㅂ-② 大國萬餘家小國數千家總十餘萬戶
ㅂ-③ 臣智或加優呼臣雲遣支報安邪踧支濆臣離兒不例拘邪秦支廉之號
ㅂ-④ 明帝…諸韓國臣智加賜邑君印綬其次與邑長
ㅂ-⑤ 國邑雖有主帥邑落雜居不能善相制御
ㅂ-⑥ 信鬼神國邑各立一人主祭天神名之天君
ㅂ-⑦ 又諸國各有別邑名之爲蘇塗
ㅂ-⑧ 又有諸小別邑各有渠帥大者名臣智其次有險側次有樊濊次有殺奚次有邑借
ㅂ-⑨ 大國四五千家小國六七百家總四五萬戶
ㅂ-⑩ 十二國亦有王其人形皆大衣服絜淸長髮
                                                                                                    『三國志』 魏書 東夷傳 韓


그렇지 않다. 이것은 오히려 그 기록의 당대성 뿐만 아니라 당대 중국인의 시선에서 한제국 내부의 역학관계가 어떠했는지를 생생히 알 수 있는 자료가 된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우선 당시 중국인이 한제국의 규모와 구조를 어떻게 인식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ㅂ의 기사들을 보면, 『삼국지』에서 인식하는 한제국의 최소 규모는 하나의 읍락과 대응된다. 우리가 흔히 아는 신지 등의 거수들은 ⑧을 보면 한 나라의 임금이기보다는 한 읍락의 추장으로 보는 것이 적당하다. ①과 ⑧에서 확인되는 읍차라는 추장의 칭호는 이 정치집단들이 기본적으로 읍락을 단위로 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최상위 읍락거수의 명칭인 신지가 ③에서는 신운(신운신국)‧안야(변진안야국)‧구야(변진구야국) 등의 통치자를 칭하는 이름으로 등장하는데, 이는 곧 ⑩에서 왕으로 칭해지는 일국의 통치자가 읍락거수와 대응된다는 의미이다. 아울러 ④에서 조위의 명제가 한제국에 읍군과 읍장이라는 벼슬을 내린 것은 당시 중원의 시선 또한 그와 같았다는 방증이다.


⑤와 ⑥을 보면 여러 읍락들은 중앙과 주변의 관계가 맺어지면서, 중앙은 국읍이 되고 주변은 별읍으로 칭해진다. 그 규모는 ②와 ⑨에서 알 수 있듯 대국과 소국 간에 차이가 있으며 그 간극은 수천 가에 이르므로, 꽤 다양한 형태의 국이 존재했음을 생각해볼 수 있겠다. 일국의 네트워크는 ⑤에서 얘기하듯 상당히 헐거워서 신지 이하 읍락거수들은 국읍주수들에게 통제되지 않았다고 하니, 국읍이니 별읍이니 하는 관계는 읍락의 배타적 권력자들 간에 성립된 일종의 계약으로 맺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즉 '배타적 권력층 내부의 의타적 권력'인 것이다. 이러한 성격의 권력을 위시하여 모인 일국의 정치체는 ⑧에서 얘기하는 "諸小別邑"의 결합체가 아니라 결집체에 해당하며, 이 결집의 대표가 국읍이 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⑥과 ⑦에 따르면 국읍 내에는 정치적 우두머리인 신지 외에 종교적 우두머리인 천군을 따로 두었으며, 별읍 중에는 종교적 신성공간인 소도가 존재한다. 이것은 지배직역의 전문화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일국 내에서 배타적 권력이 다분히 집단적으로 유지되었을 가능성을 상정케도 한다.


날이 좋아서 자리를 보존하고, 날이 좋지 않아서 쫓겨난 부여왕도 아마 비슷한 존재가 아니었을까? 스케일은 달랐겠지만.


실질적 관계가 어떠했든, 중원이 인식한 한의 일국一國은 국읍을 중심으로 복수의 별읍이 결합한 정치적 중합체였다. 다만 각 읍락은 비록 국읍과 별읍으로 나뉘어져 있었을 지언정, 독자적으로 배타적 권력자를 스스로 배출하기 때문에 그 하나하나가 독립적 정치체라고 볼 수 있다. 즉 기초정치체 혹은 정치적 단위체인 것이다. 그렇다면 실질적으로 일국의 본토는 국읍에 한정될 것이며, 하나의 읍락이 인근 읍락들을 아우를 수 있는지 여부에 따라 그 읍락을 국읍 즉 국으로 인정할 수 있는지가 결정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앞서 언급한 『삼국사기』의 소국들은 서기 3세기 즈음에는 주변 읍락의 중심이 될만한 힘을 갖지는 못했을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스물이 넘는 수의 나라들이 있는데, 이 중 『삼국지』의 국명과 대응되는 것은 서라벌‧비지‧다벌‧감문‧금관‧고사포‧아라가야‧대가야 정도이다. 이외 10여 국은 다른 이름으로 불렸거나 서기 3세기에는 일국으로 인정될 만큼의 세력은 갖추지 못했거나, 혹은 후대의 지역명을 국명으로 소급한 것일 수도 있다.


이를 증명할 만한 현장증거는 경상북도 경산에서 찾을 수 있겠다. 현재도 압량면이라는 지명이 있으며, 여러 건의 한국 사서에서 압량소국 혹은 압독국으로 비정되는 경산은 임당유적을 중심으로 오랫동안 정치체가 존속했던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임당유적은 늦어도 서기전 3세기부터 인간의 문화행위가 포착되기 시작하여 조선시대까지 끊임없이 흔적을 남기는 곳이므로, 철기시대 이후 이 지역에 머물렀던 집단의 기록 외 행적을 추적할 수 있다. 고고학적 정황에 따르면 임당유적 조성주체는 서기 1세기가 되면 금호강 유역에서 꽤 강력한 권력을 표상하는 집단으로 성장하게 된다. 그러나 그 이후 분위기는 반전된다. 이전 시기까지 확인되었던 최상급 분묘는 더 이상 확인되지 않으며, 철기와 토기를 소량 부장한 분묘들로 공간이 점유된다. 물론 서기 3세기가 되면서 대형목곽묘가 등장함에 따라 다시 임당유적 조성주체를 지배한 존재가 확인되었지만, 그들이 표상하는 권력은 타지역의 최상급 분묘와 비교했을 때 여타 읍락을 아우를 수준은 아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즉 그들은 『삼국지』 저술 시점에는 일국으로 인정받을 만한 최소한의 세력을 갖추지 못했던 것이다. 일례에 불과하지만, 이렇게 보면 『삼국지』변진한조는 당대성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ㅅ-① 其十二國屬辰王
ㅅ-② 辰王常用馬韓人作之世世相繼
ㅅ-③ 辰王不得自立爲王
ㅅ-④ 十二國亦有王
                                                                                                    『三國志』 魏書 東夷傳 韓


그렇다면 변진한제국을 지배한 존재들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 ㅂ-③에 따르면 한제국의 국읍주수는 신지로 불렸으나, 또한 ㅅ-④에 따르면 나라에는 왕이 있다고 하였다. 전자가 마한의 기록이고 후자가 변진의 기록이니 전자와 후자의 시기가 다르다고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애석하게도 전자에는 변진의 구야와 안야가 포함되므로 당대성이 있는 기록으로 봐야 한다. 현재까지의 고고학적 견지에서 두 나라의 신지는 서기전 1세기 이전에 절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신지와 왕이 아예 별개의 존재인 것일까? 각종 읍락거수들 중 대거수가 신지가 되고, 그 신지는 그대로 한 나라의 왕이 되는 것일까? 아니면 ㅅ-④의 〈변진국왕〉과 ③의 〈자립왕〉이 다른 존재일까? ④를 보고 다시 ①을 보면, 진왕에게 신속된 12국은 두 가지 해석안을 제시할 수 있다.


1안: 변진한 24국 중 진한과 변진을 특정하지 않는 12국이 진왕의 관할 하에 있다.
2안: 변진 12국은 독자적 왕이 존재하는 반면, 진한 12국은 모두 진왕의 관할 하에 있다.


서기 3세기 중원의 인식 속에 진한과 변진은 뚜렷하게 구분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ㅅ-①에서 그 둘 중 무엇도 특정하지 않았다는 것은 ㅅ의 기사들을 1안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그러나 이렇게 될 경우 한 가지 모순이 생기는데, ③에서 '자립하여 왕이 될 수 없다'는 진왕이 ④의 〈변진국왕〉을 신속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기사 속의 왕들이 모두 일관된 성격을 갖는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국읍신지가 한 나라의 대표 지배자로서 ④의 〈변진국왕〉과 대응되는 존재라고 하더라도, 그 존재가 과연 ③에서 말하는 〈자립왕〉과 같은 성격의 지배자가 맞는지 단언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일단 ③에서 진왕은 자립하여 왕이 될 수 없다고 하였다. 이 말인 즉슨 "辰王"과 "自立爲王"의 〈王〉은 글자만 같을 뿐 성격이 다른 직위 혹은 칭호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같은 맥락에서, ④의 "王"이 ③의 진왕이나 자립왕과 별개의 존재일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겠다. 이렇게 정리했을 때, ㅅ-④는 변진 12국에 단순히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이 있었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당연히 그 임금은 ㅂ-③의 신지 혹은 "安邪踧支(濆)" · "拘邪秦支廉"을 지칭할 것이다.

ㅂ-③의 문장 구성은 초엽부를 "臣智/或加優呼/臣雲遣支報"로, 후엽부를 "拘邪秦支廉/之號"로 구분할 수 있다는 점에 누구나 동의한다. 이때 초엽부는 "신지는 혹 우대하는 호칭이 더해지는데, 신운(신국)은 견지보,"라고 해석할 수 있으며, 후엽부는 "(변진)구야(국)는 진지렴의 칭호(이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문제는 중엽부의 "安邪踧支濆臣離兒不例"인데, 이는 "安邪踧支濆/臣離兒不例"로 구분하여 "안야(국)는 축지분, 비공식적으로는 신리아"라고 해석하거나 "安邪踧支/濆臣離兒不例"로 구분하여 "안야는 축지, 분신[신분고국]은 리아불례,"라고 해석한다. 전자는 "支濆"을 앞의 "支報"와 같은 용어로 판단하고, 안야국에 축지분과 신리아라는 칭호가 있었다고 해석한 것이다. 후자는 "濆臣"이 '臣濆' 즉 신분고국의 오기로 판단하고, 이하 리아불례를 신분고국 신지의 명칭으로 해석한 것이다. 이때 "不例"는 글자 그대로 법식이 아닌 즉 비공식적이라는 의미로 간주되기도 하지만, 그 자체를 고유명사 즉 번예의 다른 표기로 판단하기도 한다. 하지만 번예는 하급 거수이므로, 어미의 리아가 어떤 의미가 되었든 신지를 넘어서 특별히 우대하는 호칭으로 간주하기가 어렵다. 게다가 신분고국은 서기 2~3세기 마한에서 가장 우월한 정치체로 꼽힌다.


하지만 이 시기에 대응되는 고고학적 정황은 1안보다는 2안에 더 무게를 두게 한다. 진한의 공간으로 상정되는 금호강-형산강-동천-태화강과 동해 일대의 정치체는 서기전 2세기부터 꾸준히 성장을 거듭하여 복수의 읍락을 아우를 수 있는 지배자를 배출할 수 있게 되었다. 반면 변진의 공간으로 상정되는 낙동강 중하류와 남해 일대의 정치체는 서기 1세기까지 배타적 권력의 물적 표상이 거의 확인되지 않는다. 물론 진한과 물질문화 트렌드에는 발을 맞추지만, 창원 다호리 1호묘나 밀양 교동 3호묘 등과 같은 서기전 1세기 한정의 돌발적 현상을 제외하면 제대로 된 권력 표상은 서기 2세기의 김해 양동리 162호묘를 기점으로 본격화된다. 이 차이는 낙랑을 매개로 했을 한과의 교역 시점과 유의미하게 맞물리는데, 이 얘기는 나중으로 미루도록 하겠다. 결론만 말하자면, 서기전 1세기 이후 변진한의 배타적 권력은 철을 이용한 경제력에 중원과의 외교력이 중합한 것으로 생각된다. 서기 1세기가 들어서면서 진한은 벌써 중원의 물건으로써 권력을 표상하는 트렌드가 쇠퇴하기 시작하고, 서기 2세기 이후로는 자체적으로 권력 표상 기물이나 방식을 마련하게 된다. 하지만 변진은 서기 2세기부터 본격적으로 한의 기물을 이용하여 지배자의 권력을 표상하고, 그것은 서기 4세기 낙랑이 몰락할 때까지 이어진다.


즉 서기전 2세기 이후의 고고학적 정황은 곧 진한과 변진의 정치적 태도가 상이할 수밖에 없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에서는 진왕에 신속된 12국 중에 진한과 변진의 나라들이 섞여 있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오랜 역사를 가진 진한의 권력과 네트워크 vs 새롭게 대두한 변진의 권력과 네트워크. 전자가 후자에 비해 더 공고하고 굳건하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그러므로 진왕에 신속된 12국은 진한의 12국이며, 변진의 왕은 자립왕인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독립적인 지배자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정리하자면 변진한제국의 임금들은 기본적으로 최상급 읍락거수인 신지급에 해당하며, 이들 중 일부는 특별히 우대하는 호칭을 갖기도 한다. 진한 연결망은 진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과 주변의 질서가 정립되어 있었던 반면 변진은 그 안에서 유효한 정치적 연결망은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때 진왕은 자립하여 왕이 될 수 없다 하였는데, 그것은 진왕이 진한제국의 왕들 사이에서 대표직으로 선출되었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즉 ㅂ-⑤에서 이야기하는 국읍과 별읍의 관계와 같이 진왕과 신지들 사이에는 의타적 권력관계가 맺어져 있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때 진왕은 단순히 진의 왕이 아니라 한에만 있는 독특한 최고지배자 직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이 임금들의 권력은 어디에서 왔을까? ㅅ-②에 따르면 진왕은 늘 마한인으로 삼아 대를 이어 계승한다. 이 기록의 진왕이 변진한의 우두머리라고 앞에서 특정했는데 이제와서 마한인으로 삼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삼국지』와 『삼국사기』에는 진한인들이 본인들의 정착 과정을 설명할 때, 처음에는 마한으로 갔다가 마한왕의 지정으로 그 땅에 가게 된 것이라 이야기한다. 이러한 구술적 기록은 진왕의 계통에 대한 이해를 붙는다. 진왕을 마한인으로 삼는다는 것은 한을 지배한 엘리트의 출처가 마한임을 시사한다. 물론 진한 노인들이 그들의 정착 과정 즉, 마한에 도래하자마자 그곳 왕에 의하여 살 땅을 지목받았다는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다. 다만 변진한에 정치체가 형성되기 훨씬 이전부터 마한의 공간에는 조선으로부터 전파된 배타적 권력의 물적 표상이 확인된다. 즉 변진한으로 도래한 배타적 권력자들은 마한에서 정치적 경험을 쌓은 존재들이 대다수일 것으로 생각된다. 기록상에는 진왕이 마한인이라 했지만, 이 〈마한인〉을 유이민으로 간주한다면 변진한의 배타적 권력자 전체를 이른바 〈마한인〉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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