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사료를 통해 본 辰과 韓 [貳]
다. 마한제국馬韓諸國
문헌의 기록만으로 추측했을 때, 실재 여부와 관계없이 중원인 서기 2세기 전반기에 한을 인식하게 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잠부론』에 기록된 서기 2세기 중엽경의 한은 한씨 성을 가진 인물이 위만에 패하여 바다를 건너 한왕이 되었다는 전설적인 이야기뿐이다. 하지만 이후 중원인의 세계관에서 동방의 제국은 구체화를 거듭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삼국지』에 기록된 서기 2세기의 한이 그 모습을 명징하게 보여준다.
ㄷ-① 馬韓…有爰襄國…月支國…楚離國凡五十餘國
ㄷ-② 始有六國稍分爲十二國
ㄷ-③ 弁辰亦十二國
ㄷ-④ 有已柢國…馬延國弁辰狗邪…國弁辰安邪國馬延國…斯盧國優由國
ㄷ-⑤ 弁辰韓合二十四國
『三國志』 魏書 東夷傳 韓
삼한에는 총 78개국이 있는 것으로 셈해지지만, 실제 나열된 나라의 이름은 80개국이다. 다만 ㄷ의 ④에서 같은 나라 이름이 중복되는 것에 대하여 단순 실수로 파악하고 삭제해야 하는지, 혹은 오기로 인한 우연한 중복인지 단정하기 어렵다. 기실 전자라 해도 79개국인데, ②․③․⑤의 산출이 오류인지 ④의 나열이 오류인지 알 수 없다. 아울러 명단 속 나라들이 『삼국지』 편찬 당대에 실재하던 것들인지, 실재 여부와 관계없이 중원에 이름이 알려진 것들을 나열한 것인지 알 수 없다. 가령 목지국의 경우 준왕과 연결 지어 생각되는 경우가 있는데, 당대에 하나의 권력체가 수백 년 동안 존속했을 가능성은 상당히 낮을 것으로 판단하므로 전자와 후자 중 무엇을 '믿느냐'에 따라 목지국이 존재했을 것으로 상정되는 시점이 상당히 달라질 것이다. 전자를 믿는다면 고고학적으로 보았을 때 목지국을 위시한 마한은 서기 2세기 이후에 본격적으로 정치체를 형성하게 되며, 한에서는 신생세력에 해당할 것이다. 반면 후자를 믿는다면 ①과 ④에 기록된 나라들은 '전해진바 한에 존재하거나 했던 나라들'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느 쪽에 가능성의 무게를 더 얹을 수 있을까? 솔직히 판단이 서지 않는다. 이것은 단순히 『삼국지』에 기록된 한제국의 수량과 실재를 비교하는 문제를 넘어 마한, 혹은 한의 성립 시점까지 좌우해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앞서 중원에 한이 인지되는 시점을 서기 2세기 전반기로 잡았다. 그런데 이 시점은 공교롭게도 고고학적 시대구분상 철기시대 중기(원삼국시대 전기)에서 철기시대 후기(원삼국시대 후기)로 넘어가는 과도단계로 이해되며, 정치체의 발생이 남한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하는 때이다. 특히 서기전 2세기부터 단절 없이 〈지배자〉가 확인되는 영남지방의 경우 정치체의 통합도가 한 단계 더 높아지는 시기로서, 한의 권력체에 일대 변화가 있었음을 시사한다. 즉 이 시기를 한의 성립시점으로 주장한다 하더라도 무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한과 한씨는 준과 별 관계가 없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으며, 서기 2세기 이후 등장하는 새로운 권력체의 상징적 시조로서 조선왕이었던 준이 꼽힌 것일 뿐이라는 해석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인정하게 되면, 마한을 둘러싼 여러 사서들의 공통적인 묘사들 즉 마한이 진한과 변진에 비해 우월하다는 기왕의 인식에 치명적인 문제가 야기된다.
아직 논할 계제는 아니지만, 이해를 돕기 위하여 물질문화에 대한 내용을 간단하게 짚고 넘어가보겠다. 서기전 2세기에 울산 등지에서 최초의 정치체가 발생하는 영남지방은 서기전 1세기가 되면서 금호강유역을 중심으로 원거리 교역망을 형성함에 따라 물적 번영을 이룩하게 된다. 이후 영남은 이러한 상승세를 유지하여 서기 2세기가 되었을 때 본격적으로 고대왕국에 이르기 위한 준비단계를 마치고, 그 전신인 〈소국〉 즉 복수의 읍락으로 구성된 정치적 복합체를 형성하게 되었다. 반면 마한은 서기전 1세기 이후 과거의 강력한 권력체가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되고, 간혹 영남으로부터 이주한 것으로 판단되는 정주집단들이 단속적으로 확인되는 것을 제외하면 서기 2세기까지 유력집단이나 권력체를 짐작할 수 있는 흔적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즉 권력의 물적 표상이 중단되다시피 한다는 것이다. 마한에서 권력체가 다시 활발하게 형성되는 시점은 서기 2세기 이후이며, 그 신생 권력체가 권력을 표상하는 방식은 주변의 물질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것이었다. 고고학적 시선에서 어떤 권력체가 타자의 물질문화를 가지고 와 자신의 권력을 표상하거나 의례를 행하는 행위는 단순히 교류와 교환의 결과만으로 읽히지 않는다. 그것은 양자 간의 권력 차이와 물적 기반 정도를 이해할 수 있는 단서로 여겨지기도 한다.
ㄹ-① 臣幘沾韓忿攻帶方郡崎離營
ㄹ-② 辰韓…其耆老傳世自言古之亡人避秦役來適韓國馬韓割其東
『三國志』(소흥본) 魏書 東夷傳 韓
ㄹ-③ 馬韓最大共立其種爲辰王都目支國盡王三韓之地
ㄹ-④ 辰韓耆老自言秦之亡人避苦役適韓國馬韓割東
『後漢書』 東夷列傳 韓
ㄹ-⑤ 遣瓠公聘於馬韓
ㄹ-⑥ 馬韓王讓瓠公曰辰卞二韓爲我屬國
ㄹ-⑦ 對曰…王憤欲殺之左右諌止乃許歸
ㄹ-⑧ 前此中國之人苦秦亂東來者衆多處馬韓東與辰韓雜居
ㄹ-⑨ 至是寖盛故馬韓忌之有責焉
『三國史記』 新羅本紀 赫居世居西干
ㄹ-⑩ 王出獵獲神鹿以送馬韓
ㄹ-⑪ 遣使馬韓告遷都
ㄹ-⑫ 靺鞨掩至王帥兵逆戰於七重河虜獲酋長素牟送馬韓
ㄹ-⑬ 王作熊川柵馬韓王遣使責讓…王慙遂壞其柵
『三國史記』 百濟本紀 溫祚王
그렇다면 물질문화상을 통해 보았을 때 마한의 공간에서 형성된 정치체가 가장 우월했다고 판단할 수 있는 시점은 언제인가? 그 시작은 서기전 4세기로 올라간다. 서기전 4~2세기 사이의 마한은 조선으로부터 건너오거나 스스로 제작한 동기, 그리고 중원으로부터 건너온 철기를 이용하여 '조선과 유사한 형태'로 권력을 표상한다. 또한 동시기 진한과 변진의 공간에는 정치체를 통치했다고 생각되는 권력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지도자〉는 그 이전 청동기시대부터 한반도 전역에 존재해 왔겠지만, 〈지배자〉의 등장에는 공간별로 시기차가 있었던 것이다. ㄹ의 몇몇 기사들을 보면 마한 일원에 대하여 ‘진왕’이 갖는 존재감과 영향력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다. 아마 당시에는 〈목지국왕〉으로 상징되었을 진왕(ㄹ-③)은 새롭게 유입된 권력체의 거취를 결정(ㄹ-②․④․⑧)하거나, 한의 일원으로부터 공물(ㄹ-⑩․⑫)을 받거나, 그들의 성장을 통제(ㄹ-⑨․⑪․⑬)하는 등 한에서 가장 존재감이 강한 지존으로서 군림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는 서기전 2세기 중엽을 기점으로 반전되는데, 이것을 잘 나타내는 기록이 바로 ㄹ의 ⑤~⑦에 드러나는 호공과 마한왕의 갈등 기사이다. 이외에도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에는 ⑬ 이후 마한왕에게 대항하고 마한을 장악하려는 백제의 움직임이 점진적으로 포착된다. 『삼국사기』에서 한의 분위기가 환기되는 정황은 공통적으로 서력기원 직후부터 감지된다. 이러한 요소들을 감안한다면, 『삼국지』 등 여러 사서에 묘사되는 마한의 모습은 서기 2세기 이후보다는 서기전 2세기 이전에 더 가까운 것이다. 서기전후 2백여 년의 공백기를 지나 서기 2세기를 맞이한 후 포착되는 새로운 정치적 움직임은, 〈목지국왕〉으로 상징되는 기성 진왕이 아닌 신생 진왕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이 새로운 진왕이란, ①에 따르면 신책첨한臣幘沾韓의 왕으로 생각된다. 신책첨한왕은 대방과의 기리영전투를 주도했던 것으로 생각되며, 정초鄭樵의 『통지通志』에서는 신분고한臣憤沽韓으로 기록되고, 『삼국지』의 신분고국臣濆沽國으로 상정된다.
ㅁ-① 景初中大興師旅…東夷屈服
ㅁ-② 其後高句麗背叛又遣偏師致討
『三國志』 魏書 東夷傳 序
ㅁ-③ 景初中明帝…定二郡諸韓國臣智加賜邑君印綬其次與邑長
ㅁ-④ 時太守弓遵樂浪太守劉茂興兵伐之遵戰死二郡遂滅韓
『三國志』 魏書 東夷傳 韓
ㅁ-⑤ 魏遣幽州刺史毋丘儉將萬人出玄菟來侵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東川王
ㅁ-⑥ 魏幽州刺史毋丘儉與樂浪大守劉茂方大守王方大守王遵伐髙句麗
ㅁ-⑦ 王乗虛遣左將真忠襲取樂浪邊民
『三國史記』 百濟本紀 古爾王
하지만 신분고국은 기리영전투를 기점으로 마한에서의 주도권을 잃어버렸을 것으로 생각된다. 조위曺魏의 영향력 확대를 제재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였던 신분고국은 대방군의 기리영을 공격했으나, ㅁ의 ④에서 알 수 있듯 결국 패배해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기리영전투의 발발과 신분고국이 몰락하는 정황을 분석해보겠다. 기리영전투가 발발한 시점은 서기 238~239년 사이로 생각된다. 이 시기 중원의 패권을 장악했던 존재는 난세의 간웅으로 유명한 조조의 손자 조예 즉 조위 명제였는데, 그는 혼란을 틈타 공손도-공손강-공손연 3대에 걸쳐 독자적 영향력을 구축한 요동의 공손씨를 제압하고 동이의 공간에 대한 장악력을 강화하려 하였다. 그리고 서기 238년, 명제는 대군을 일으켜 공손씨를 절멸하고 그들이 장악했던 동이의 한군현을 평정(①․③)하게 된다. 이후 대방군은 명제의 목적대로 한을 부용으로 삼고자 했는데, 여기에 반발했던 신분고국과 한제국이 기리영으로 진격하게 된 것이다. 이후 전쟁의 경과와 기간 등은 알 수 없지만, 대방태수 준이 전사(④)한 것으로써 미루어 짐작컨대 상당한 접전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후 ②․⑤․⑥에 따르면 조위는 다시 동쪽으로 진격하여 고구려를 치게 된다. 이유는 불분명하지만 조위가 동이에 대한 장악력을 강화하려는 계획의 일환이었던 것으로 생각되며, 이 고위전쟁을 위하여 낙랑과 대방의 태수들도 출전하게 되었다. 여기서 한의 돌출된 행동이 다시 시작되는데, 마한의 일원인 백제국왕 고이가 이 틈을 타 낙랑으로 진격하여 경계의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왔던 것(⑦)이다. 이 시기는 기리영전투가 발발했을 것으로 예상되는 지점으로부터 7년이 지난 서기 246년으로, 3세기 중엽에 해당한다. 여기서 모순점이 발생하는데, 서기 246년에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진군한 대방태수 궁준은 앞서 언급했듯 그 이전 기리영전투에서 전사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기록상의 오류인지, 기록자의 혼동인지, 연대의 왜곡인지는 알 수 없다. 혹은 기리영전투가 7년 이상 지속되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기리영전투나 고위전쟁이나 모두 접전이었던 만큼 그 둘을 동시에 진행하는 것은 무리였을 것이라 생각한다. 아무튼 군을 이끌고 한 군현을 자극하는 주체가 신분고국에서 백제국으로 변경되었다는 것은, 추후 서술하겠지만 고고학적으로도 무언가 시사점을 제공한다. 서기 3세기 한반도 중서부지방의 물질문화상을 보면, 공교롭게도 서기 3세기 중엽을 기점으로 새로운 헤게모니의 등장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고대왕국 백제의 본격적인 개막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정리하자면, 마한은 서기전 4세기 이후 진의 공간에서 가장 먼저 신진 정치체로서 모습을 드러낸 뒤 수백 년간 진왕을 배출한 정치복합체였다. 그러나 진한 형성 이후 그 영광은 퇴색되고, 점차 최고권력자의 자리를 그들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이후 수백 년이 흘러 이 땅에는 또 다시 새로운 정치집단이 들어오게 되고, 그들로 인해 마한은 다시 활기를 찾게 된다. 물론 이 시기의 마한이 이전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되찾았을 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신분고국이라는 새로운 대표를 위시하여 한 군현과 비등한 입장에서 전쟁을 치를 정도의 역량을 갖추는 데는 성공하였다. 하지만 신분고국을 위시한 마한은 서기 3세기 중엽의 기리영전투를 기점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는데, 그것은 수백 년에 걸친 군웅할거시대의 종말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이제 크고 작은 군장들이 다스리던 여러 나라들 사이에서는 중앙집권적 고대왕국의 싹인 백제가 군계일학으로 대두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