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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현 Jan 15. 2024

『구의 증명』 서평

유물론의 세계에서 사랑을 증명하는 방법

 언어는 단지 기호, 인식은 결국 표상.


 그렇다면 우리는 동일한 인식-감정을 포함한-을 가져볼 수 있을까? 모든 인간은 타인과 연결되려는 욕구를 가진다. 사람들은 이 욕구를 다양한 방식으로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다. 타인과 동일한 인식을 성취하기 위해, 대화를 나누고 온갖 수단을 이용해 스스로를 표현한다. 하지만 그런 노력이 정녕 성과를 이룰 수 있을까? 이를 위한 유일한 선택지는 예술뿐이다.


 이런 전제에서 문학은 아주 기묘한 위치에 선다. 문학은 언어로 직조되는 예술이지만 동시에 그것을 초월해야 하기 때문이다. 필자의 생각이 틀렸을지도 모른다. 문학에 이러한 의무를 부과하는 게 부당한 처사일지도 모르고. 상관없다.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지향하는 것은 모순이지만 용기기도 하다. 모순과 용기는 아름답고, 때론 고귀하다.


 최소한 문학이 그러한 성취에 '접근'하는 것은 참이다. -언어로 만들어진- 책을 읽음으로써 일반적인 언어로 얻을 수도 없는 인상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필자는 그러한 모순적인 상황에서 아름다움을 느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구의 증명』에는 아름다움이 있다.




만약 네가 먼저 죽는다면 나는 너를 먹을 거야.”


 이 문장은 ‘구의 증명’에서 가장 중요한 문장-홍보에서는 더더욱-이다. 소설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담은 결국 저 말을 실행에 옮긴다. 담은 자신이 사랑한 구가 죽자 조금씩, 그를 먹어 치우기 시작한다. 작품에서 드러나는 전반적인 태도를 고려해 볼 때, 결국 『구의 증명』은 이상의 '비상식적' 행동을 독자가 수용하도록 설득시켜야만 한다.


 작품은 구와 담이라는 두 남녀의 단상이 교차되며 전개된다. 초등학생 때 처음 만나 친구로 지내던 둘은 모두 빈곤하고 불우한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이후 각자의 삶 때문에 꽤 오래 떨어져 있긴 했다. 하지만 둘은 결국 다시 만난다. 성인이 된 구는 행방불명된 부모의 빚을 대신 갚아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무지막지한 사채업자들에게 법이라는 무기는 통하지 않았다. 그들은 결국 구를 원양어선에 팔아넘길 계획을 세운다. 그걸 눈치챈 구와 담은 도피를 감행한다. 그는 자신이 담의 삶도 망칠 거라 생각해 그녀를 떼어놓고자 한다. 하지만 담의 태도는 완강했다. 결국 둘은 함께 몇 년이나 지방을 떠돌았다. 그러던 중 누군가-사채업자들로 추정된다.-에 잡힌다. 그들에게 두들겨 맞은 구는 겨우 도망치지만, 길거리에서 쓰러지고 만다. 담이 그를 발견했을 때는 이미 죽어서 시체가 된 후였다. 원래 그녀는 구가 죽으면 함께 죽어버릴 작정이었다. 하지만 막상 그가 죽으니 마음이 변했다. 죽어봤자 사채업자들에 의해 팔려나갈 게 뻔할 뻔 자니까. 결국 담은 구를 먹어 치우고 살아남기로 한다. 자신들을 괴롭혔던 그 누구들보다 오래오래. 그렇다면 구도 계속 존재할 수 있고 자신과 계속 함께 할 수 있다. 그런 생각으로 담은 구를 조금씩, 조금씩 먹어 치우며 장례를 진행한다.


그렇다면 우린 『구의 증명』의 독서에서 어떤 인상을 얻을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은 이 작품을 상실의 아픔, 슬픔 따위를 향한 애도를 주제로 삼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런 이해는 지나치게 피상적인 이해라고 생각된다. 언젠가 구는 담에게 유럽의 옛날이야기-단순한 설화나 신화 따위일 수도 있다.-를 해준다. 요지는 '어쩔 수 없는 식인이 있을 수 있다.' 내지 '납득가능한 식인이 있을 수도 있다.'정도. 즉 '구의 증명'이란 식인이란 행위를 받아들이도록 하는 설득이다. 담은 이러한 생각을 이어받고 직접 행동에 옮긴다. 적어도 담에게는 구의 말은 참이었고, 이에 공감할 수 있는 독자에게도 참이 된다.


 문제는 증명의 배경이다. '식인'은 자본주의가 아닌 상황에서도 옳은 수 있다. 허나 구와 담을 옥죄는 것은 자본주의이고, 구의 증명도 그러한 상황에서 탄생했다. 이러한 점을 미루어볼 때, 『구의 증명』은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하지만 최진영 작가는 여기서 한발자국 더 나아간다. 필자는 이 작품에서 유난히 '몸'이라는 표현이 강조된다는 것과 영혼이나 정신 같은 관념적 단어, -사랑 이야기면 으레 나오는 상투적인- 표현들이 의도적으로 사용되지 않았다는 점 -물론 말미에 혼이라는 단어가 한 번 쓰이지만- 에 주목했다.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유물론을 기반에 둔 체제다. 가치는 화폐라는 물질에서 창출된다. 유물론이 지배하는 세계에 영혼 같은 무형의 가치는 틈입할 수 없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영혼이 부정되는 세계에선 사랑도 긍정될 수 없다. 담이 냉혹한 세계에서 자신의 사랑을 증명하는 방법은 결국 상대의 몸을 먹어 치우는 것뿐이다. 그렇게 그와 한 몸이 되고 물질적으로 결합하는 것. 괴짜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밖에 없지만, 유물론의 세상에서 사랑을 증명하는 방법은 이런 방법뿐이다. 의 증명, 성공


 결국 구와 담이 증명하고자 하는 것과 『구의 증명』이 증명하려는 것은 같다. 식인이라는 행동의 본질이 악덕이 아닐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은 최소한 물질만이 인정되는 세상, 인간보다 돈이 우위에 서는 세상, 영혼이나 사랑 따위는 배제되는 세상에 한해서는 참이다. 사랑을 증명할 방법은, 사랑하는 대상을 몸이라는 동일한 물질로 결합하는 것 뿐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에 설득되는 건 모순이다. 식인이란 행동은 -최소한 일반적으로는-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독자 중에 구의 증명에 설득된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식인이라는 납득할 수 없는 행위를 받아들이는 모순적 현상이다. 이런 점에서 『구의 증명』은 본질적으로 모순적인 소설이다. 또 독자에게 모순적 인상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런 모순적 인식은 우리에게 충격을 주기 마련이다. 작품이 그러한 충격을 지향하는 의도는 아마, 유물론적 세계에 대한 비판일 성싶다. 『구의 증명』의 읽은 사람들의 반응을 보니 호불호가 꽤 있던데, 불호인 독자들은 아마 구의 증명을 납득하지 못한 경우일 것이다.




 전술했듯 이 글은 서로 다른 두 인물의 단상이 교차되면서 진행된다. 즉, 서사를 풀어가는 방식이 고전적이진 않다. 단상 위주의 글은 서사를 따라가기 힘든 편이다. 하지만 『구의 증명』은 가독성이 워낙 좋은 편이고 문장의 흡입력도 훌륭한 편이라 어느 정도 집중할 수 있는 환경만 조성된다면 독서가 어렵진 않다. 다만 이러한 서사, 서술방식이 호불호가 꽤 갈리는 편이라는 것은 책을 읽기 전에 유의할 만한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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