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곽재구 시인의 시 ‘사평역(沙平驛)에서’가 있다. '사평역에서'는 열차를 기다리는 승객을 통해서민들의 일상을 나지막이 읊조린다. 언뜻 보면 깊은 밤 간이역에서 막차를 기다리는 승객을 그린 낭만적인 시로 보인다. 그러나 그 시대를 살아내야 했던 고달픔과 아픔이 시 전편에 흐른다. 물론 상세한 표현은 생략과 압축으로 감춰져 있다. 화자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감기 걸린 사람이 누구인지? 그들은 무슨 사연을 안고 대합실에서 막차를 기다리는지? 우리는 각자 해석을 하여야 한다.
시 '사평역에서'를 읽고 영감을 받은 소설가 임철우는 시를 소설로 풀어쓰기로 했다. 독자들이 시에서 받은 궁금함을 1983년 가을 <<민족과 문학>>을 통해 소설 <<사평역>>으로 설명한다. 시는 서정을 중심으로 쓰인다면 소설은 서사를 중심으로 이뤄진다. 소설가는 시에서 생략되고 비어있는 부분을 메꿔주는 역할을 자처한다. 시가 가지고 있는 기본 정조는 그대로 가져가면서 소설의 문법에 충실하게 썼다.
우리도 시를 소설로 변조하는 글을 써 보자.
표제 "시"를 하나 제시하겠다. 여러분에게 제시하는 시는 여백이 많은 시다. 그 여백을 채우는 것이 여러분이 해야 하는 소설 창작 작업이다. 제시된 시를 재 해석해서 여러분의 소설로 바꿔 써 보자. 단 기본 조건을 제시한다. 즉 제시된 '시'를 노트에 옮겨적고 A4용지(대학노트)에 소설을 쓰는데 주어지는 시간은 합쳐서 20분이다. 주어진 시간 내에 A4용지(대학노트) 한쪽면은 제시된 시를 적고 반대편 한쪽면은 소설로 무조건 메꿔야 한다. 물론 시의 분위기가 여러분이 쓰는 소설 속에서도 풀려 있어야 한다. 여러분의 소설적 감수성 그리고 순발력과 상상력을 보고자 한다.
제시된 "시"
월식(月蝕)/김명수 시 전문
달 그늘에 잠긴
비인 마을의 잠
사나이 하나가 지나갔다
붉게 물들어
발자국 성큼
성큼
남겨 놓은 채
개는 다시 짖지 않았다
목이 쉬어 짖어대던
외로운 개
그 뒤로 누님은
말이 없었다
달이
커다랗게
붉은 솟은 달이
슬슬 슬슬 마을을 가려주던 저녁
시작한다는 신호음과 시를 동시에 받았다. 생전 처음 접하는 '시'다. 시 전문을 노트 한 면에 옮겨 적으면서 아득했다. 길게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주어진 시간 내에 한 면을 채워야 한다는 물리적인 부담으로 문장이나 스토리는 일단 쓰면서 생각하기로 했다. 문맥이나 단어를 교정 볼 틈도 없다. 쓰다 보니 아뿔싸... 그 바쁜 와중에 볼펜 잉크가 떨어졌다. 볼펜을 교체하고 마지막 줄을 쓰고 있으니 '그만'이라는 신호가 떨어진다. 노트를 제출하면서 "쓴소리 듣지 않을까"하는 불안감이 들었다.
==============================여기서 잠깐
여기까지 글을 읽는 여러분도 아래에 제가 소설이랍시고,
쓴 글을 읽어보기 전에 위 표제시를 소설로 변경해서 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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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식]
달도 없는 저녁이었다.
풀벌레 소리도 없었다. 그날 저녁 나는 앓고 있었다. 홍역에 걸렸는가 보다. 뒤늦은 홍역에 나는 며칠을 끙끙 앓던 밤이었다. 사나이 하나가 사립문을 열고 마당에 들어섰다. 나를 보기만 하면 꼬리 치던 백구가 목이 쉬어라고 짖어댔다. 그러나 어둠을 틈탄 사나이는 마루에 걸터앉았다.
그때 누님이 내 머리 위에 얹었던 물수건을 대야에 담더니, 물 대야를 들고 조용히 방문을 열고 나갔다. 나는 아픈 꽃 열에도 불구하고 온통 신경을 써서 방문 밖 마루에 신경을 집중했다. 두런두런 둘이 속삭이는 소리는 백구의 짖는 소리가 삼켜서 잘 들리지 않았다.
나는 이불을 걷고 조용히 일어나서 방문 앞으로 다가갔다. 침을 바른 손가락으로 방문 창호지를 살며시 눌렀다. 월식으로 캄캄한 밤이었다. 검은 두 사람의 형태만 보일 뿐이었다. 백구의 목소리도 잦아들고 있었다.
나는 누님과 사나이가 두런거리다가 손을 잡고 얼굴을 포개는 것을 보았다. 가슴이 쿵쾅거리는 것도 있었지만 두려웠다. 사방은 어둑한데 희미한 두 사람의 형태가 하나로 변해가자 나는 슬슬 두려워졌다.
얼마쯤 지났을까. 두 사람이 조용히 일어나서 사립문 밖으로 걸어 나갔다. 내 신경은 온통 사립문 밖으로 쏠려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어둠을 뚫고 은밀하게 누님이 들어오고 있었다. 발자국 소리도 들리지 않는 밤이었다.
나는 재빨리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웠다. 누님은 우물에서 물 한 두레박을 푼 물을 대야에 담아서 들어왔다. '자고 있니?" 누님의 목소리는 깊은 터널을 막 지나온 목소리인 듯 차분했다. 내 머리에 물수건이 얹어지자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누님은 떠나지 않은 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두런두런 누님의 뒷 이야기를 퍼 날랐지만 외면했던 나였다. 내가 뚫어놓은 창호지로 길게 바람소리가 들어왔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님의 거칠어진 손을 잡고 얼굴을 쳐다봤다. 누님의 두 눈에서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달 그늘에 텅 빈 마을에서 나는 누님에게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한참을 울다가 그쳤다. 백구는 다시 짖지 않았다.
목이 쉬게 울던 백구. 누님의 아픔은 월식처럼 아쉬움에 있었고 나는 그 누님의 아픔을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