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검은 비닐봉지

그것은 사랑이었다.

by 쌤작가

외할머니 집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은 항상 시끌벅적했다. 하나라도 더 싸주시려는 외할머니. 한 쉬도 쉬지 않으시고 이리저리 다니시며 냉장고 안의 각종 반찬과 식혜, 텃밭에서 수확하신 고추, 무, 배추, 그리고 수돗가 장독대의 고추장, 된장, 간장 등을 계속 담고 또 담으셨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가지 런지 마룻바닥에 놓아져 있던 여러 개의 검은 비닐봉지들.


"엄마야, 이런 거 줘도 우리 안 먹는다 했다 아이가. 됐다 마!"

그 앞에서 엄마는 이런 거 줘봤자 안 먹는다고, 필요 없으니 제발 좀 그만 싸라고 신경질을 부리곤 했다.

외할머니는 듣는 둥 마는 둥, 내게 비닐봉지를 어서 차에 실으라는 무언의 눈짓을 보내셨다. 그리고는 또다시 엄마에게 뒤도 돌아보지 않으시고 말씀하셨다.

"야야 정선아, 이거도 가 가그라~"

그렇게 말씀하시며 또 무언가를 검은 비닐봉지에 담고 계셨다.

결국 돌아오는 자동차 트렁크 안에는 외할머니가 주신 각종 반찬과, 채소들로 가득 차 있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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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을 하고, 아이가 태어나고, 정신없이 일하고 육아를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부모님 집에 소홀히 하게 되었다. 부모님이 계시는 울산까지는 생각보다 선뜻 가기 어려운 먼 곳이 되었다. 그렇다고 전화를 자주 하는 살가운 아들도 아니다 보니 부모님 마음 한편이 많이 서늘하지 않을까 항상 생각한다. 두 아들이 다 멀리 나가 각자 살기 바쁘니 말이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나는 이제 한 집안의 가장이고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내 가족의 행복이니 말이다.


하루는 울산에 출장 갈 일이 생겨 혼자 차를 끌고 내려간 적이 있었다. 아침 일찍 고객사를 방문해야 했기에 하룻밤 부모님 집에서 자기로 한 것이다. 오랜만에 혼자 방문한 집은 그대로였다. 조금 더 세월을 견디신 것 같은 부모님과, 오래간만에 요란하게 돌아가는 부엌, 어느덧 여러 가지 야채로 무성해진 옥상 텃밭만 조금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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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 힘들게 요리하지 마시고 외식을 하자는 나의 말에 엄마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시며 말씀하셨다.

"그냥 집에서 먹어~!"


곧이어 차려지는 밥상. 검은 콩이 들어간 검은 밥. 살짝 데쳐진 미역과 초장. 몸에 좋다는 돼지감자 조림. 돼지고기가 들어간 된장찌개. 아들용 갈비찜. 그리고 전체적으로 아버지를 위한 싱거운듯한 간. 집을 떠난 지 꽤나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엄마의 밥상은 그대로였다. 엄마 밥을 먹으며 이내 마음이 편안해졌다. 자연스럽게 오가는 옛날이야기들.


순간 떠올랐다. 최근 들어 부쩍이나 내 어릴 적 이야기를 많이 하시는 엄마. 그날도 그랬다. 내가 어릴 적에 뭘 잘했었는지, 어릴 적에 형이랑 둘이서 어떤 말 못 할 장난을 쳤는지, 옛날 어디서 무엇을 했었는지 등등. 시시콜콜한 나의 어릴 적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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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엄마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은 형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코 묻은 어린아이였다. 사춘기를 견디며 방에 틀어박혀 지내던 소년이었고, 시험공부한답시고 유세 부리던 철없는 아들이었다. 그렇게 엄마 밥상에서 우린 과거에 있었다. 유난히 행복해 보이던 엄마의 얼굴.


다음날 아침 일찍 나갈 준비를 하는데, 익숙한 검은 비닐봉지들이 현관문 앞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대충 열어보니 김치와, 아내가 좋아한다고 말했던 물김치, 특별히 아는 사람이 준거라고 자랑하셨던 붉은 감자, 동네 시장에서 직접 공수해 오신 깨와 콩가루, 아는 지인에게 특별히 싸게 샀다고 하시는 화분가루. 나에게 한마디 상의도 없이 이미 바리바리 싸 놓으신 것이다.


"엄마, 이거 다 못 들고 간다. 이렇게 많이 주면 다 먹지도 못하고 버려."

어느새 투덜거리고 있는 나. 순간 내 눈에 들어온 조금은 실망하신 듯한 엄마의 얼굴.

"그럼 조금씩만 가져갈게."


나의 대답에 다시 신나게 검은 봉지에 이것저것 더 담아 주시던 엄마.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 쉴 새 없이 설명해 주시던 엄마. 그때 문득 떠오른 예전 외할머니 집의 풍경.


그때 깨닫게 되었다. 그 검은 비닐봉지 안에 들어 있는 것은 그냥 음식이 아니라는 것을.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어릴 적 엄마와 나의 추억이고, 자주 뵙지 못하는 죄송한 아들의 마음이며, 멀리 있는 아들과 조금이라도 더 함께 있고 싶은 엄마의 사랑이라는 것을.


최근에 가끔 엄마랑 통화를 할 때면 자주 외할머니 댁에 다녀오시는 것 같다. 야채와 고추장과 된장이 없을 때, 반찬이 필요할 때 외할머니 집을 다녀오시는 것 같다. 지금도 그때처럼 외할머니와 티격태격하실까. 문득 궁금해졌다. 그때의 검은 비닐봉지가 떠올랐다. 지금은 그 속에 어떤 마음이 담길까. 검은 비닐봉지가 조금씩 가벼워지도록, 전화라도 자주 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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