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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정철 Apr 18. 2018

합리적 중년_이기적 유전자의 이타주의

이기적 유전자의 이타주의적 행동

진화생물학의 근원적인 딜레마가 있다. 이타주의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유기체는 자신의 유전자를 다음 세대로 전달하는 것, 더 많은 자손을 퍼트리는 것이 존재의 목적이자 이유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읽고 어느 독자는, 슬픔에 잠겼다고 한다. 진화의 주체가 인간 개체나 종이 아니라 유전자이며 인간은 유전자 보존을 위해 맹목적으로 프로그램된 기계에 불과하다는 글을 보고, 인간이라는 존재 가치가 고작 그것이었냐 하는 자괴감을 느꼈기 때문이리라. 아무튼 이기적 유전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타주의는 이해할 수 없는 기제임에 틀림없다. 자기 유전자를 남겨야 하는데 남을 돕는 이타주의라니...

 

학교에서나 가정에서 남과 이웃을 돕고 살아야 한다고 배웠고 또 가르친다. 성경에도 있지 않은가, 네 이웃을 사랑하라.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는 격언도 있다. 남을 돕는 일, 그것도 아무런 반대급부를 바라지 않고 다른 사람을 돕는 행동을 하는 사람을 우리는 우러러본다. 21세기 인재의 기본 조건 중에 꼭 들어가는 것이 '협업' 능력이다.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려 서로 도우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요건이 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남을 돕는 행동 즉 이타주의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인간 본성의 굉장히 놀라운 자질처럼 보인다. 하지만 앞서 얘기한 것처럼 이타주의는 자연선택의 작동방식, 즉 자신의 유전자를 후대에 전달해야 하는 생물의 이기적인 소명에는 맞지 않는 행동이다.

<DNA>

이런 패러독스를 해결하기 위해 진화생물학자들이 제시한 해결책이 바로 친족 선택과 호혜적 이타주의다. 친족 선택(Kin selection)은 생물학적 이타주의의 일종으로, 유전적으로 근친 관계에 있을 가능성이 높은 개체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이타 행위를 설명하는 이론이다. 친족 선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전자 연관도라는 개념을 먼저 알아야 한다. 유전자 연관도는 자신과 다른 개체가 공유하는 유전자의 비율을 의미한다. 부와 모 각각에게서 절반씩의 유전자를 물려받으므로 자식은 부모와 50%, 형제끼리도 평균적으로 50%의 유전자를 공유한다. 부모의 형제의 경우는 25%를 공유하고, 사촌의 경우 부모와 50%를 공유하는 사람의 자식이므로, 12.5%를 공유한다. DNA를 다음 세대로 물려주는 진화의 원리를 따르자면, 유전자 연관도가 높은 친족의 생존을 돕는 게 확률적으로 적절한 행동이 된다. 형제자매와 사촌에 물에 빠진 경우, 유전자 연관도가 높은 형제자매를 구하는 것이 자신의 유전자를 후대에 남기는데 유리하다는 의미다.

 

한편, 호혜적 이타주의(Reciprocal altruism)는 보답을 염두에 두고 타인을 돕는 걸 말한다. 간단하게 표현하면 '네가 내 등을 긁어주면, 나도 네 등을 긁어주겠다'라는 의미다. 호혜적 이타주의에 대해서는 다른 글 <이성과 감성 사이>에서도 언급한 내용인데, 대표적인 예가 흡혈박쥐의 피 나눠주기다. 흡혈박쥐가 자기가 마신 피를 다른 박쥐에게 나눠주는 행동을 하는 이유는, 다른 박쥐들도 자신에게 그렇게 행동해 줄 것을 기대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동물뿐만 아니라 인간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집단생활을 한 이유도, 작은 집단이 커져 씨족, 부족, 국가 공동체로 나아갈 수 있었던 필요충분조건이 호혜성이었을 것이다. 인간보다 더 크고, 더 빠른 포식자들로 부터 살아남기 위해서는 ‘나’ 혼자가 아니라 ‘우리’라는 울타리가 필요했다. 내가 다른 사람을 도와주면 다른 사람도 나를 도와줄 것이라는 믿음, 내가 가진 음식을 나줘주면, 내가 음식을 구하지 못했을 때 그가 나에게 음식을 나줘 줄 것이다라는 신뢰가 없었다면 인간의 공동체 생활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서로의 등을 긁어주고 털을 골라주는 침팬지>


집단주의의 해체

이렇게 각 개인이 모여서 상호 협력하여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사회학적 원리를 집단주의(Groupism)라고 한다. 원시시대에서 인류는 집단적으로 행동하지 않으면 멸종에 처할 확률이 높은 취약한 존재였다. 다른 동물들과 다르게 출생 후의 인간은 혼자서는 일어서지도 먹지도 못하는 나약한 존재다. 생후 1년이 지나야 겨우 걸을 수 있고, 인간보다 더 빠르고 사나운 맹수들에 비하면 성인이 되더라도 혼자서는 생존이 힘들 수밖에 없었다. 자연히 사냥, 채집, 육아 등 생존을 위해 다른 인간들과 집단을 이루어야 했고, 그 이후 지금까지 집단주의 문화를 발달시켜 왔다. 집단주의는 '만인은 일인(一人)을 위하여, 일인은 만인을 위하여'를 그 원칙으로 하고 있다. 군대나 기업이 이러한 집단주의 문화를 수용한 대표적인 집단체라고 볼 수 있다. 집단주의의 가치를 기반으로 해서 다양하고 복합적인 요소를 목표로 가지며, 집단적 자립이 가능한 거대한 집단체를 공동체라고 한다. 이러한 공동체를 통해 개인은 자기가 필요한 것을 그것으로부터 얻으며, 공동체도 개인이 공동체의 목표와 이익을 위해 헌신할 때 발전하게 된다. 집단은 개인의 안전과 필요에 의해 생겨나고, 개인이 그것으로부터 생존과 안전을 보장받기도 하지만, 그것이 지나칠 때는 부작용이 생겨나기도 한다.


특히 군대문화가 대표적인데,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대한민국의 모든 남자들이 의무적으로 군대를 다녀와야 하고, 거기서 파생된 집단주의 의식이 가정과 기업, 심지어 학교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개인보다 집단을 우선시하고, 개개인의 가치보다는 국가와 민족, 집단의 존재 가치를 먼저 생각하는 문화가 우리 사회에 굳건히 자리 잡고 있다. 최근 뉴스에서 어느 유명 사립대학교 응원단이 이슈가 된 적이 있다. 새로 들어온 응원단원을 훈련시키는 과정에서 선배들의 가혹행위가 있었고, 졸업한 선배들과의 모임에서 후배들에게 상식에 벗어난 선배 시중 등의 행동을 강제했다는 내용이다. 이 응원단은 오랜 전통과 역사에도 불구하고 결국 해체되고 말았다. 그 응원단이 받들어 온 '전통'이라는 것이 응원단을 구성하고 있는 개개인의 존재와 역할은 무시한 채, 단지 응원단이라는 집단만을 신봉해 왔다는 어리석은 전통이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억눌려 왔던 개인들이 이제는 더 이상 참지 않고 그들의 이익과 가치를 내세우며 불합리한 전통에 반기는 든다. 이런 시대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집단'은 이 대학의 응원단처럼 '해체'라는 막다른 결과와 마주할 수밖에 없다.

  

합리적 개인주의자 선언

사람들의 의식과 문화가 변화하고 있다. 2017~2018 트렌드 코리아의 20가지 키워드 중에는 '개인'이 중심에 있는 것들이 많다. 2017년의 경우, 지금 이 순간을 즐겨라는 '욜로 라이프', 혼술혼밥 등 나 홀로족이 이끄는 경제를 의미하는 '내 멋대로 1코노미', 집단이 아니라 개인이 생존을 책임져야 하는 시대를 말하는 '각자도생의 시대' 등이다. 2018년의 경우, 작고 확실한 행복을 말하는 '소확행', 일과 개인적 생활의 조화를 일컫는 '워라밸', 개인만의 안식처 '커렌시아', 개인의 존재 가치를 스스로 드러내는 '세상의 주변에서 나를 외치다' 등도 있다. 이런 키워드의 중심에 '개인'이 있다. ‘개인’이 시대의 흐름을 읽어내는 중요한 키워드라는 의미다. 현대의 개인은 개인의 안전과 생존을 국가나 기업에만 맡겨 놓거나 의지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강하다. 국가나 기업이 개인을 위해 최소한의 무언가를 해 주기를 바라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집단의 가치를 맹목적으로 신봉하며 그것에 만족하거나 안주하지 않는다. 직장이 개인의 생활과 삶을 위해 필요하다는 인식과 함께 개개인의 가치와 차이를 인정하고 또 인정받고 싶어 한다. 그동안 집단주의의 가치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자신을 희생해 온 기성세대에게는, 이런 경향이 지나친 개인주의로 비치기도 한다.

<혼자 식사할 수 있도록 해 놓은 식당, 출처=주간조선>

지나친 개인주의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여기저기서 들린다. 개개인이 저마다 자기 이익만을 추구한다면 결국에는 집단이 아니라 개인만 남을 것이고, 그렇게 해서는 개인도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다. 개인과 집단의 가치 충돌과 갈등이 조정되고 합의되는 어렵고도 수고로운 과정이 필요한 이유다. 이런 시대의 변화와 흐름의 와중에, 현직 부장 판사인 문유석의 『개인주의자 선언(문학동네, 2015 )』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는 우리 사회의 집단주의 풍토에서 오는 여러 불합리와 폐해를 지적하면서 '합리적 개인주의'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역설한다.


'합리적 개인주의자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사회를 이루어 살 수밖에 없고, 그것이 개인의 행복 추구에 필수적임을 이해한다. 그렇기에 사회에는 공정한 규칙이 필요하고, 자신의 자유가 일정 부분 제약될 수 있음을 수긍하고, 더 나아가 다른 입장의 사람들과 타협할 줄 알며, 개인의 힘만으로는 바꿀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타인들과 연대한다. 개인주의, 합리주의, 사회의식이 균형을 이룬 사회가 바로 합리적 개인주의자들의 사회다.'


인간이 사회라는 집단을 이루어 온 그 근본적인 이유를 부정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개개인의 가치만을 추구하다 보면, 서로 간의 가치 충돌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개인 간의 입장 차이를 인정하고 조정하고 타협하면서 개인의 가치를 추구하고, 개인이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협력과 연대가 필요함을 인정하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인간의 위대한 여정(21세기북스, 2017)』에서 배철현 교수는 인간의 이타적 행동이 결국은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는 호혜적 이타주의론에 의문을 던지면서, '인간 본성의 핵심은 이타적 유전자다. 공감, 배려, 친절, 정의, 희생, 정직 등은 이타심이라는 씨앗에서 피어난 꽃이다. 그 열매가 바로 컴패션(compassion)이다. 다른 사람의 고통(passion)을 자신도 함께(com) 느껴 그 고통을 덜어주려고 애쓰는 마음과 행동’이다.'라고 했다. 지금이 바로, 우리 인간이 가진 본성인 이타적 유전자의 그 근본으로 돌아가는 여정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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