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을 넘게 근무하던 직장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착잡하다. 걱정해주는 주위 분들 덕분에 오랜만에 전화 통화를 하게 되는 분도 여럿이라 반갑기도 하다. 몇 해 전, 같은 직장에 근무하던 분들에게서 요 며칠 전화가 여럿 온다. 하긴 대통령보다 좋다는 초등 교장 8년 중에 7년을 남기고, 철밥통 공직 7년 반을 남겨두고 아무런 대책도 없이 그만두니 그럴만도 하겠다.
한때는 가까이 자주 보며 일했지만, 이런저런 저마다의 일로 소식이 뜸해지니,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그냥 다들 잘 살아 있구나, 여기며 그렇게들 산다. 가끔은 생존 확인을 하고, 받기도 해야 할 나이인데 이래 무심하게 사나 싶다. 한 곳에 지긋하게 눌러앉아 살던지, 한 직장에 오래 근무하면 자연스레 자주 보게 되니 안부 묻기의 필요가 덜하기도 하지만, 역마살이 잔뜩 낀 나 같은 사람은 무심하면 안 되는 건데 하고 후회스러운 마음이 생긴다.
교육대학,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교사로 입직한 이후에는 대개 해당 광역지자체를 벗어나는 일이 드물다. 교사 임용시험을 다른 지역에 응시하는 경우, 배우자의 직장 문제로 이동하는 경우 등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고향 근처, 그곳에서 교직 생애를 보내게 마련이다.
그에 비하면 내 경우는 참 특이하다 하겠다. 이사를 참 많이 하고 살았다. 더 이상 이사는 못 하겠다고 손사래를 치는 아내의 마음도 능히 이해하고도 남는다. 집 평수를 늘려간다고 이사를 한 것도 아니고, 아이들 교육 문제로 그런 것도 아니라 순전히 남편인 나의 직장 일이었으니 미안함이 크다. 그래도 남편 덕에 여러 지역, 낯선 나라 등 다양한 곳에서 살아 봤으니 좋지 않았냐고 아내의 입에서 ‘불’ 자가 나올 때마다 박박 우겨본다.
스물네 살, 갓 깎아 놓은 밤톨 같은(이 표현이 스스로 하기에는 좀 거시기하지만) 청년의 첫 근무지는 거제시 둔덕면 둔덕초등학교 상동분교였다. 면소재지 언덕배기 자취방에서 3년, 결혼해서도 그곳 자취방에서 신혼생활 1년을 했다(월세 5만 원, 결혼 후에는 보증금 100만 원에 월세 7만 원). 도시로 나가자는 젊은 새댁의 성화에 창원시로 근무 학교를 옮겼다,
도시의 화려한 밤의 환락의 맛을 조금씩 느껴가던, 2000년 11월에 느닷없이 교육부 전문직 공채 시험에 합격하면서 서울 생활을 시작. 사실 말만 서울 생활이지 처음에는 일산시, 몇 달 후에 아내가 발령받은 학교가 안산이라 출퇴근 힘들다고 석 달 만에 안양으로 이사, 2년 후에 다시 일산에서 살았으니 직장만 서울이고, 경기도민으로 살았다. 그 사정을 자세히 모르는 친구 놈들한테는 ‘너 서울 살아봐냐’고 가끔 큰소리친다. 남대문 문턱이 소나무인지 참나무인지를 두고 싸우는 녀석들에게는 다 먹힌다.
그래도 2000년대 초반 일산의 변화와 발전은 대단했다. 진주 촌놈이 그 변화의 현장에 나도 살고 있다는 아무 쓸데없는 자부심이 있었다는 건 부인하지 못한다. 그것도 1년, 이집트 카이로한국학교로 파견 근무를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4년을 살았다. 귀국 후에는 6개월을 일산에 살다가 창원으로 귀향. 다시는 돌아가지 않으리라는 다짐이 무색하게 7년 만에 다시 교육부가 있는 세종시로 가서 혼자 18개월 동안 오피스텔 생활을 했다. 마음도 몸도, 직장의 업무도 힘든 시기였다. 그 뒤에 완전히 이사를 해서 가족이 다시 모였지만, 아이들은 대학과 직장으로 흩어지고, 대신 딸애가 키우던 까만 냥이, 팬서가 새 식구가 되었다.
가지런하고 깨끗하지만 황량하기도 했던 ’ 행복도시 세종‘에서 3년 6개월을 그렇게 살다가 2019년에 태국 방콕으로 3년간의 파견 근무를 다녀왔다. 귀국하고 바로 경남 창원시 진해구에 있는 초등학교장으로 발령을 받아 와서 이제 1년. 다시 세종집으로 돌아 갈 준비를 하고 있다. 한 달에도 두세 번은 다녀오는 집인데도, '돌아갈 집'이라는 어감이 따뜻하면서도 쓸쓸하다.
대충 세어보니 이사를 17~8회 정도 했다. 카이로와 방콕에서의 이사도 다섯 번이나 된다. 그 사이에 세종, 방콕, 창원에서 혼자 살기도 세 번이나 했으니, 전생에 나라를 구한 정도의 업(業)을 쌓은 게 틀림없다. 교직 생활을 한 사람 중에 이렇게 잦은 이사와 혼자살이를 한 경우는 몇 안되지 싶다. 참으로 심한 역마살이다.
형편이 좀 나아지고는 포장이사를 한다고는 해도 이사 전후에 해야 할 일이 적지 않다. 하루이틀에 끝나는 일도 아니다. 이사는 그만해야지 하는데, 그래도 앞으로도 두어 번은 더 해야지 싶다.
언젠가 마당 한켠에 햇살이 조용히 내려앉는 그런 집에 이삿짐을 풀고 나면, 아내도 그동안 수고했다고 내 어깨를 토닥여 주겠지.
그런 꿈이 아직 내게 있다.